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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레드 콤플렉스는 극복되지 않았다 <앨리스 죽이기> 김상규 감독
2019년 7월 31일 수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지난 사건을 들추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언론의 보도와 맹렬한 태양처럼 뜨거운 이데올로기의 언어가 대중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까닭에, 누구 하나 냉정한 가슴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쉽지 않았던 때. 2014년 11월, 남편과 함께 다녀온 북한 여행기를 강연 형식으로 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재미교포 신은미 씨의 사건도 그런 경우다. ‘종북 콘서트’라는 말로 명명된 신 씨의 행동은 기어코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몰고 왔다. 이듬해 1월 법원이 무죄 판결을 냈지만, 신은미 씨는 이미 출입국관리법 위반에 따라 강제 출국 됐고 그를 향해 들이치던 플래시의 거친 기세도 한풀 꺾인 상황이었다. 소리 없는 시간이 더 흘렀다. 김상규 감독은 그렇게 묻혀버린 듯하던 5년 전 사건을 스크린으로 끌고 들어와 묻는다. 그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다큐멘터리 <앨리스 죽이기>로 2015년 강제 추방당한 재미교포 신은미 씨의 당시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편과 함께 다녀온 북한 여행기를 토대로 국내에서 토크콘서트를 벌인 게 시비에 오르면서 벌어진 2014년의 상황이다. 신은미 씨와 그의 행보에 관심을 두고 취재를 시작한 계기를 알고 싶다.
대학을 다니던 2002년, 2박 3일로 금강산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남북관계가 많이 좋아졌을 때라 정부가 대학교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일반보다 저렴한 가격에 갈 수 있었다. 그때 느낀 설렘과 두려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실제 북한 금강산에서 누나뻘 되는 미화원과 어찌어찌 대화를 시작했는데, 내가 과연 북한 사람과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 싶은 느낌이었다.(웃음)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신은미 씨가 북한에 다녀온 뒤 표현하는 그 설렘과 두려움이 뭔지 잘 이해가 됐다.

처음부터 그를 찍으려던 계획은 아니라고 들었다.
북한에 직접 다녀온 사람을 통해 그들 사회를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우리나라는 북한을 악마 그 자체로 보지 않나. 일부에서는 반대로 북한에 약간의 환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양쪽 모두 너무 극단이다. 내가 금강산에서 느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조명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던 중 신은미 씨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북한 여행기를 읽었다. 북한에 방문할 수 없는 한국 (국적의) 사람인 나와 달리 (재미교포인) 그는 상대적으로 그곳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고, 나보다 관련 경험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에 촬영을 제안했다.

  평양을 여행 중인 신은미 씨.
평양을 여행 중인 신은미 씨.

영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행사는 2014년 11월 조계사에서 열린 ‘신은미&황선 전국 순회 토크 문화 콘서트’(이하 ‘토크 콘서트’)일 것이다. 신은미 씨는 자신의 여행기를 강연 형식으로 전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고, 당신도 그에 맞춰 카메라를 들었다. 그때만 해도 상황에 이렇게 깊게 발을 들일 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대여섯 번의 순회 토크콘서트가 예정돼 있었다. 내 경우에는 두 차례 정도만 촬영할 생각이었다.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 특성상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11월 19일 조계사에서 열린 첫 토크 콘서트에 누군가 잠입했고, 휴대폰으로 몇몇 장면을 촬영했다. 다음날 그 영상이 TV조선을 통해 보도됐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포착했다. 곧이어 두 번째로 예정돼 있던 대전 토크콘서트가 취소됐다.

영화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후 토크 콘서트는 여러 매체를 통해 ‘종북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보도됐다.
영화에 당시의 정치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담지 못해 아쉽다. ‘종북 콘서트’ 논란이 나오기 2년 전인 2012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선에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였고, 그걸 공론화하는 데 앞장섰던 정당이 통합진보당이었다. 국정원 존폐에 대한 논의까지 진행됐으니 국정원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 2013년 중반 (의도적으로) ‘이석기의 내란음모 혐의’를 터뜨렸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정보였는데도 말이다. 결국 통합진보당 해산까지 이르게 됐다. 그건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없애 가는 일련의 과정이었다고 본다. 그 시간을 거쳐 우리 사회에 북을 추종하는 세력이 암약하는 것도 모자라 공개적으로 활동까지 하고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그런 상황에 언론이 가세해 신은미 씨의 토크콘서트를 ‘종북 콘서트’로 명명했고, 이 명칭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대로 사용하며 힘을 실어줬다는 주장이다. 관련 논란을 주도한 몇몇 종편 언론의 보도에는 특히 비중을 할애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당시 TV조선은 “서울 한복판에서 종북 콘서트가 열렸다”면서 국민에게 안보 위기감을 조성했다. 많은 언론사들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로 이득을 취했다. 앞서 말한 정치, 사회적 상황이 (그런 보도를 하기에) 적절한 조건으로 맞아떨어진 게 아닌가 한다.

처음 토크 콘서트가 취소된 대전에서의 상황을 돌아보자. 신은미 부부를 초대한 주최 측(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은 계획대로 행사를 강행하자고 주장한다. 반면 신은미 씨 남편은 무리한 행사 진행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 갈등 관계는 영화에서 두 차례 반복된다. 이 대목은 영화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라고 본다.
신은미 씨를 초청한 분들은 통일 운동가다. 반면 신은미 씨 부부는 여행자다. 둘 사이에는 당연히 입장 차이가 있다. 살아온 방식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운동을 해온 분들은 목표만 정당하다면 부당한 탄압이나 압력은 극복해나가는 게 옳다고 본다. 회피하거나 주저하는 게 아니라 뚫고 나가는 거다. 신은미 씨는 그들의 입장을 들어주려는 편이었다. 하지만 신은미 씨의 남편은 행사에 초청받은 사람으로서, 또 미국 시민권자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생길 때에는 미국 대사관과 신중하게 협의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해결하려는 편이었다. 그 사이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는 과정이 여럿 있었고,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토크 콘서트' 당시 오른쪽부터 황선 씨, 신은미 씨.
'토크 콘서트' 당시 오른쪽부터 황선 씨, 신은미 씨.

영화를 보다 보면 주최 측이 예상치 못한 곤경에 놓인 신은미 씨 부부에게 다소간 강경 대응을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행사 강행이든 기자회견 진행이든, 어느 정도는 부부에게 부담을 지워주는 모양새였다는 생각이다.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신은미 씨는 10대 초반 ‘리틀 엔젤스’로 활동했다. 남북 간 체제경쟁 중이던 1960년대 만들어진 청소년 문화사절단이다. 타지에서 부모님 없이 고된 훈련을 감당했고 유엔이나 각국 정상 앞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그 과정에서 대중 앞에 서는 두려움이 적어졌고, 힘든 상황을 스스로 이겨내는 훈련이 됐다고 본다. 성악가가 되는 데도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신은미 씨의 그런 에너지나 경험이 당시 어떤 계기를 만나서 표출됐던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 외부에서 신은미 씨 부부와 주최 측을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려 인지했다면, 당신 영화는 그 내부에서도 서로 조금씩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충돌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신은미 씨와 당시 주최 측은 북한에 대한 비슷하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연출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관객이 두 쪽의 이야기 모두를 꼼꼼하게 들어보고 과연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를 판단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토크 콘서트’에 반대하며 폭탄 테러까지 벌였던 인물을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그가 처음부터 인터뷰에 선뜻 응한 건 아니다. 섭외하는 데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세 시간 정도 인터뷰를 거쳐 쓸 만한 장면을 많이 얻었지만 영화 흐름과 균형 문제로 막바지 편집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덜어냈다. 다만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세상에 드러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점점 좋아질 거라는 낙관을 품고 있다. 하지만 한번쯤은, 이런 이들이 어디선가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할 필요는 있다.


2017년 마무리된 영화는 각종 영화제 상영을 거쳐 오는 8월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
그사이 많은 게 바뀌었다. 국민이 촛불로 정치 권력을 끌어내렸다. 최근에는 사법제도의 변화도 감지된다. 언론도 예전처럼 막 나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다 바뀌었나? 우리의 레드 콤플렉스는 언제든지 불씨만 생기면 그때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남, 북, 미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변화도 있었는데.
지도자, 그러니까 상층부끼리 만나서 협상으로 이루는 평화는 정치 권력이 바뀌면 10년 전으로 상황이 후퇴할 만큼 빈약하다. 내가 금강산에 갈 때만 해도 이렇게만 가면 통일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떤가. 정말 공고한 평화를 만들려면 평범한 남, 북 사람들이 만나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내면에 있는 의식을 바꿔야 하지 않겠나.

모든 관객이 이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핫독스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는 작품을 접한 관객이 화를 내는 상황도 있다고 들었다.
탈북한 20대 초반의 여성 관객이었다. 자기가 살아온 걸 바탕으로 봤을 때 신은미 씨의 강연은 평양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거라며 불쾌해했다. 영화 상영 후 그와 따로 만나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 영화가 북한 사회를 과장해서 잘 보여주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일상에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했다고 법이나 사회 여론을 통해 폭력적으로 억압당하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거라고 말이다. 그 관객과는 후로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지금은 오히려 나에게 여러 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 문제의식이 잘 전달된다면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관객과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으로서 관객과 자기 영화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더라. 영화 속 내용을 반박하는 분들도 간혹 계신다. 그것마저 좋다. 나도 최선을 다해서 내 이야기를 더 들려드릴 수 있으니까. 서로의 생각을 알아가는 건 즐거운 일이다. 탈북민들을 초대해서 영화를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이번 영화가 당신의 장편 데뷔작이다. 다음 작품도 계획 중인가.
항공사 갑질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현재 촬영 중이고, 관객이 내년 중에 만나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영화 한 편을 개봉하는 데 생각보다 신경 쓸 일이 많더라. 거기다가 현재 진행 중인 작품까지 있어서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도 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캔맥주를 한잔하면, 그날 하루를 잘 정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행복하다.

사진 제공_인디플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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