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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이놈~!” 하면 딸도 “네 이놈~!” <명당> 지성
2018년 9월 25일 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지성의 첫 사극 도전은 ‘광해’역을 맡았던 드라마 <왕의 여자>(2003~2004)다. <올인>(2003)에 출연하면서 “(이)병헌이 형의 연기에 큰 자극을 받은” 그는 사극이라는 큰 도전을 선뜻 받아들였다. 타고난 연기 재능도 없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잘하는 성격도 아닌 자신을 잘 알았기에 그저 공부하듯 도전하고 배우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시련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저언~하”를 외치는 대선배들의 웅장한 발성 앞에서 자신의 “뭣이라!”는 그저 앙칼지게 들렸을 뿐이란다. 감독의 호된 꾸지람을 들은 뒤, 모두가 밥을 먹으러 간 사이 “뭣이라!”라는 세 글자만 목이 찢어지도록 연습했던 그 날은 지성에게 여전히 잊지 못할 기억이다.

기쁘게도, 지금의 그는 그 시절을 웃으며 회상한다. <명당>의 ‘흥선대원군’이 외치는 “네 이놈~!”도 그때보다 훨씬 즐겁게 연습했단다. 15년 전 그저 앙칼지기만 했던 자신의 목소리에 힘과 깊이감이 배어나는 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자신의 곁을 지켜주게 된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 지금껏 연습과 노력만 하다가 시간이 다 가버린 것 같아 서글프다는 푸념을 펼쳐 놓았지만 자신이 “네 이놈~!” 하면 앙증맞은 목소리로 “네 이놈~!”하더라는 딸의 이야기 끝에 금세 환한 미소 짓는 그다. 무엇보다, 연기를 못 한다는 자괴감에 힘들어하던 때를 완전히 지나 이제는 연기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며 씨익- 웃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흐뭇하다.


<명당>에서 ‘흥선대원군’역을 맡아 연기했다.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떨어진 전을 주워 먹고, 다른 양반의 다리 사이를 기어가는 등 굴욕적인 장면이 많더라.
그게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다. 사실 한 겨울 촬영장에서 바닥을 핥는 연기를 하려니 솔직히 조금 싫은 생각이 들더라.(웃음) 그래도 상갓집 개처럼 땅을 기어 다니며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왕족의 굴욕을 보여줘야만 했다. 비참함과 울분이 쌓여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순간 극 중 ‘흥선대원군’은 광기를 표출한 게 아닐까.

워낙 선한 얼굴과 눈을 타고났다. 데뷔 이후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꽤 신경을 썼을 것이다. <명당>에 함께 출연한 유재명 배우는 당신을 두고 “사슴 같은 눈망울에 욕망을 고여 놓았다”고 하더라.
데뷔할 때부터 연기가 어려웠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서 남들에게는 차마 얘기하지 못하는 열등감이 컸다. 화를 잘 낸다거나 표현을 거칠게 하는 성격도 아니고, 일관되게 조용한 편이다. 스트레스를 꾹 눌러 안고 이겨내려고만 했다. 나에게는 목소리도, 연기도 모두 공부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는 없었다. 가끔 노력만 하다가 인생이 다 지나간 것 같아 좀 서글픈 생각이 들 때도 있다.(웃음)

예컨대 <명당>에서는 일상생활에서는 쓰지 않는 굵직한 발성을 보여준다.
연습 없이는 절대 낼 수 없는 소리다. 사극을 하는 많은 배우들이 숙제처럼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발성 이야기를 하니, 내 첫 사극이었던 드라마 <왕의 여자>(2003~2004)가 생각난다. 당대 최고의 사극 연출가였던 김재형 국장님이 나에게 ‘광해’라는 배역을 맡겨 주셨다. 드라마 <올인>(2003) 이후 이병헌 선배의 연기에 굉장히 큰 자극을 받았던 때라, 그처럼 연기 내공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사극이라는 너무나 큰 도전을 받아들였다. 역시나, 발성이 문제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린 ‘광해’를 연기할 때는 큰 탈이 없었다. 문제는 ‘광해’가 왕위에 오른 뒤 신하들과 대면하는 첫 장면을 찍을 때였다. 새까맣게 나이 많은 선배님들께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웅장하게) “전~하~”를 외치는 대목이었고, 이야기 흐름상 내가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사는 딱 세 글자였다. (앙칼지게) “뭣이라?”

(웃음)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감독님은 발성 연습 안 했냐며 크게 화를 내셨다. 연습한 게 그거였는데…?(웃음) 다른 선배님들이 식사하러 가신 동안 목이 찢어져라 “뭣이라!” “뭣이라!” “뭣이라!” 하고 연습을 한 기억이 여태 또렷하다. 물론 요즘은 퓨전 사극이 대세이다 보니 발성도 편안하게 하는 추세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명당>처럼 일부 고증을 바탕으로 한 사극에서는 지킬 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 속 대사인 “네 이놈~!”을 백 번 이상은 연습한 것 같다.(웃음) 딸 지우도 그 대사를 알 정도다. 내가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네 이놈~!” 하면 옆에서 (앙증맞은 목소리로) “네 이놈~!” 하고 따라 한다.(웃음)

당신의 연기력은 피나는 연습의 결과물이군.(웃음)
못하면 연습이라도 해야 한다.(웃음) 과거에는 촬영장에 나가는 게 두렵고 무섭고 힘들었다.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걱정이었다. <올인> 때 특히 그랬다. 카메라 울렁증 때문에 촬영만 시작하면 대사를 까먹었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 거다. 꾸역꾸역 노력을 해서 어찌어찌 버텨내고 있는데, 거의 마지막 회쯤 되니 일명 쪽대본이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연기를 못하는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지. 처음에는 잘만 하면 (이)병헌이 형을 (연기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넘지 못할 산이었다.(웃음)

(웃음)
그러던 어느 날, 지금까지도 내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유철용 감독님이 촬영장에서 대본을 집어 던지며 버럭 화를 내셨다. 이렇게 긴 대사를 쪽대본으로 갑자기 써주면 배우가 어떻게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있겠느냐면서 말이다. 나는 그게 연기를 못하는 나에게 내는 화인 줄로 오해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차서 감독님께 달려갔다.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감독님이 저한테 그러시면 안 되죠!” 하고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잠이 다 깬 얼굴이더라.(웃음)

심각한 이야기인데… 좀 귀엽게 느껴진다.(웃음)
다행히 주변에서 달려와서 감독님이 나에게 화를 낸 게 아니라고 알려줘 나도 얼른 사과드릴 수 있었다.(웃음) 희한한 건 그러고 나니 카메라 울렁증이 확 사라졌다는 거다. 외웠던 대사가 술술 나왔다. 아마 그때를 계기로 두려움을 내려놓게 된 것 같다.

그 후로 15년이 지났다. 지금은 지성 보고 연기 못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다른 배우들이 즐기면서 연기할 때 나는 마치 학생처럼 공부하듯 연기했다. 연기를 ‘잘’ 하고 싶어서 그랬다. 다행히도 이제는 어느 정도 연기 폭을 넓히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연기를 잘 한다, 못 한다는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저 배우마다 가진 능력이 다르고, 각자의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종영한 <아는 와이프>의 반응도 꽤 좋았다.
평범한 남자의 일상을 연기하면서 연기에 대한 재미를 느낀 것 같다. 굉장히 일상적인 장면을 연기하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이 일을 즐기고 싶다. 앞으로 얼마만큼 무궁무진한 내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을지, 솔직히 기대가 된다.

카메라 울렁증에 벌벌 떨던 청년이 어느덧 촬영장에서도 완연한 선배 축에 드는 때가 됐다. <명당>에서는 아마 ‘헌종’역의 이원근이 가장 어린 후배였을 텐데, 특별히 조언해준 바가 있나. 물론 노골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건넬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웃음)
선배라고 특별히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저 후배들과 재미있게 일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힘든 만큼 그쪽도 힘들 것이다. 다만 (이)원근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나… 니 맘 알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웃음) 어후, 어릴 때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마 지금 원근이는 곧 죽을 것 같은 마음이겠지.(후후후) 이런 말을 해줬다. 근데, 있지. 지금은 아무리 잘하려고 해 봤자 잘 안 된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연기해도 돼. 그래도 다들 좋아해 줄 거야. 물론 몇몇은 연기가 그게 뭐냐고 질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다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야. 괜찮아, 받아들여.(웃음)

그쪽에서는 어쩜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잘 아나… 싶었겠다.(웃음)
종종 현장에서 원근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먼저 다가가 한 번 더 찍어볼까? 두 번 더? 세 번 더? 하며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웃음) 신인 때는 감독님의 ‘오케이’ 소리가 영 개운치 않아도 한 번 더 촬영하겠다는 이야기를 잘 못 꺼낸다. 그러면 선배 배우들까지 다 같이 다시 연기를 해야 하니까. 사실 나는 그가 표현한 유약한 ‘헌종’이 좋다. 어딘지 조금은 부족한 듯하면서도 신선하고 설레는 연기를 보여줬다.

당신에게도 그런 역할을 해준 선배가 있었나.
아쉽게도, 그런 분이 별로 없었다. 과거에는 촬영장 분위기가 너무 엄했다. 차마 얘기를 꺼낼 수 없는 뒷이야기도 많다. 발과 주먹이 날아다니던 때니까.(웃음) 그래도 시대가 변했고, 현장도 많이 변했다. 배우나 스태프에게 험한 말을 하던 분들 대부분은 지금은 그 자리에 없다. 세상은 변화를 금방 알아채는 것 같다.

요즘 당신의 연기 고민은 무엇인지.
작품마다 똑같다. 뻔한 연기는 하기 싫다. 근데 얼굴이 뻔한 걸 어떡해…(웃음) 그래도 작품과 역할마다 내 외모가 거슬리는 부분은 없는지, 표정이나 버릇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점검한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대중이 내 연기를 보고 최대한 공감해주는 거다. 배우는 대중에게 희로애락을 드리는 직업이니,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여드리고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아침에 아내, 딸과 함께 눈뜰 때. 어제도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 시쯤 집에 들어갔다. 아침에 딸이 자고 있는 내 곁으로 와서 “아빠 지금 해 떴어! 일어나야지~” 하는 거다. 그러면 아무리 졸리고 힘들어도 당연히 일어난.(웃음)

행복해 보인다.
정말 행복하다. (이)보영이를 만나기 전에는 연기에 대한 꿈이 가장 컸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사랑이 내 인생의 중요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결혼 후에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제일 커졌다. 아마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이 연기에 묻어나 시너지를 일으키지 않을까? 분명 그럴 것이다.(웃음)

2018년 9월 25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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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메가박스(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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