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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감독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제작자는 단장 김인수 ② 前 시네마서비스 대표
2018년 9월 7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ㅅ트=박은영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학과 전공과 무관한 영화를 업으로 할 수 있을지 탐색 끝에 제작 쪽으로,
강우석 감독과의 만남과 독립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까지,
<정글 스토리> vs <넘버 3>,
감독이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면 제작자는 오케스트라 단장,
감독 중심 제작 환경이 공고해지면서 제작자의 롤이 모호해져,
성공 누렸던 사십 대를 지나 마음의 평화를 찾은 오십 대,
질곡이 있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왔다. 행복하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대표적인 영화제작자였던 당신의 인생 1막을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처음 정일성 촬영 감독 촬영부로 들어간 게 87년이다. 도제식으로 밑에 들어가서 배우는, 촬영 감독이 아닌 촬영 기사로 불렸던 시기다. 촬영을 직업으로 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오래 못했다. 방황하다 제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로 영화판에 들어 올수 없으니 드라마 외주 제작 현장 프로듀서로 시작했다. 이후 강우석 감독님을 만났고, 93년 강우석 프로덕션 창립 멤버가 됐다. <투갑스>(1993)로 소위 대박 났고, 정산 마치고 나와서 내 제작사 차린 후 <정글 스토리>(1996), <넘버 3>(1997), <닥터 K>(1999)를 제작했고, 실패와 성공을 모두 맛본 후 강우석 프로덕션으로 복귀했다.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시네마서비스 대표로 있으면서 자본 유치와 상장 등 여러 과정을 거쳤다. 어려움도 겪었지만 누릴 만큼 누리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강우석 감독님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지.
시네마서비스 OB 모임 등에서 가끔 뵙고 연락드린다. <투캅스>로 인연을 시작해 좋은 파트너였고 이후 웃으면서 마무리했다. 일하는 동안은 엄청나게 가까웠지만, 이제는 가는 길이 다르다 보니....최근작 <고산자, 대동여지도>(2017) 후반 편집할 때 부르시더니 의견을 물어보셨었다. 내가 처음부터 참여한 작품이 아니고 현장을 떠나 있는 입장이니 최대한 객관적으로 모니터링 하고 의견을 전달했었다.

향후 제작자 혹은 투자자로 돌아갈 의향은 없는지.
현재 PGK(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에 속한 후배들만 230명이 있는데 내가 더 보탤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제작 환경이 어려운 마당에 말이다.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별로 없고 또 돌아가고 싶다고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후배들이 잘하고 있는데.... 반겨줄까?(웃음) 필드에서 뛰었던 시간이 그립지만, 그리움이지 아쉬움은 없다.

오랜 기간 한국을 대표하는 제작.배급사와와 영진위에 몸담았던 만큼, 현재 한국영화산업의 문제점과 장점을 잘 알고 있을 거다. 2000년도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한국영화산업은 CJ와 롯데 등 대기업 위주로 재편됐는데, 자연스러운 흐름일까.
투자배급사가 CJ E&M, 롯데, 쇼박스, NEW 이렇게 빅4인데, 대자본이 투자 배급을 맡는 건 맞다. 문제는 극장을 운영하는 계열사를 둔 CJ E&M 과 롯데 두 곳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몰라도 점점 계열사라고 밀어주기 힘든 게 현실이다. 알다시피 얼마 전에 쇼박스의 유정훈 전 대표가 중국 영화사인 화이브라더스와 함께 ‘메리크리스마스’를 설립했다. 앞으로 투자배급 시장의 춘추전국시대가 예상된다.

극장은 극장대로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각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스크린 독점과 영화의 다양성 부족 등은 매번 지적되고 있는 문제인데, 당신이 바라보는 한국영화 산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내가 제작사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영화 시스템에서 제작사의 입지와 역할이 너무 약하다. (웃음) 할리우드가 제작자 중심이라면 우리나라는 감독 중심이고, 그 시스템이 더 공고해졌다. 그 과정에서 제작자의 롤이 많이 상실, 유실됐다고 본다. 투자와 배급에서 대기업의 자본이 투입되는 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건 미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제작자 롤의 상실이라 하면...
꼭 제작자 관점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는 고난도 작업이다. 좀 전에 잠깐 말했듯 현재는 감독과 배우 중심으로 영화판이 흘러가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영화 제작 환경에선 제작자의 롤이 모호하다. 영화를 업으로 하고 싶다고 희망하는 사람도 감독과 제작자를 확실히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막연하게 영화 하고 싶다는 거지.

우문이지만, (웃음) 감독과 제작자의 차이는.
쉽게 비유하자면 감독이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면 제작자는 오케스트라 단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연출자가 아티스트라면 제작자는 좀 더 여러 능력이 요구된다. 아티스트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고, 그러니까 능력 있는 감독을 발굴하고 현장을 꾸리고 필요한 자본과 사람을 모으고 그 책임을 올곧이 져야 하는 자리다. 물론 감독에게도 비즈니스 감각이 필요하지만, 강요할 순 없는 영역이다. 감독이 예술적인 측면과 비즈니스적인 측면의 비율이 90과 10이라면, 제작자는 30과 70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제작자는 비즈니스 전문가로 보면 된다. 모든 상황과 사람을 컨트롤하니 말이다. 심지어 그 까다롭다는 감독들과 조화를 이뤄 일하지 않나!

영화는 경제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매체다. 그렇기에 효율성에 따라 예산이 책정되는데, 그 모든 과정 자체가 프로듀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프로듀싱의 예술이 아닌가 한다. 안타까운 것은 프로듀싱을 가르치는 과정이 별로 없다. 영진위에서 일했던 기간 중 프로듀싱 과정을 만들었던 이유다.

최근 도입된 주 52시간 근무제의 적용을 영화계 역시 받게 됐다. 향후 어떤 영향을 미칠 거로 보는지.
스태프들은 정해진 시간만큼 일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위 단계까지 정확히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디지털화되면서 하루에 찍는 테이크 양이 많아졌다. 관건은 하루에 찍어내야 할 분량을 다 끝냈느냐이다. 하루에 찍을 분량을 못 끝냈을 경우 그 책임 소재가 모호해진다. 감독의 책임일지 스태프의 기술 부족일지의 문제가 생긴다. 할리우드의 경우 같은 촬영 스태프라도 다 급이 다르고 역할이 아주 세분돼있다.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이름이 왜 그렇게 많겠나. 그 명칭에 따라 소위 몸값이 달라지는 거지. 그들은 조합을 만들어 대처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파워가 강하지 않은 편이다. 우리도 점차 그렇게 되지 않을까.

제작자가 큰 힘을 발휘하는 할리우드 제작 관행을 따라가야 한다고 보는지.
영화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문화 예술로, 미국의 경우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유럽과 미국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산업적인 측면, 즉 제작 효율성 면에선 미국이 발달해 있다. 상업영화 현장은 각 분야의 프로가 모여서 일하는 현장이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세팅될 거로 본다.

제작자로서 느끼는 희열은 무엇일까.
영화의 매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데 있다. 책(시나리오)밖에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영상으로 만들어 낸 것 아닌가. 마치 산고와 같다. 완성된 작품이 원하는 대로 나왔을 때 느끼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프리프로덕션부터 포스트프로덕션까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적절히 배분된 점 또한 장점이다. 사무실에서 머리 싸매다가 현장에 나가면 정신이 맑아지거든.

그간 서른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좌절감을 안겨줬던 <정글 스토리>(연출 김홍준, 1996)와 이후 회생시킨 <넘버 3>(연출 송능한, 1997)다. <정글 스토리>의 경우 요즘 말로 폭망했지만, 가왕 故 신해철이 담당했던 음악은 대박 났었다. <넘버 3>의 경우 시나리오가 정말 엄청났고, 최민식, 한석규, 송강호 등 여덞 명의 배우를 한자리에 모은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투자, 제작, 촬영까지.... 연출만 안 했던 것 같다. 감독으로 직접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나.
젊었을 때는 많이 했었다. 영화 공부하며 단편 등을 많이 연출했었는데 대학 4학년 때 그 꿈을 접었다. (웃음)

지난시기를 돌이켜 볼 때,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라고 생각하는지.
마흔 살 무렵에 화양연화라고 할 정도로 여러 성취를 했지만 그럼에도 힘들었었다. 사는 게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옳은 삶인지에 대해 방황하고 마음속에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인생은 늘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허무한 것 같았다. 당시 오십 대가 되어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웬걸 평화가 오더라. 나이를 먹어서 마음이 편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순리에 따르려고 하니 편해졌다. 성공을 누렸던 사십 대와 마음이 편해진 요즘, 어떤 게 황금기인 걸까. (웃음)

요즘 영화를 좀 보는 편인지. 인상적인 작품이 있다면.
현장에서 벗어나 있다 보니 상업영화와는 좀 다른 결을 지닌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가 좋더라. <소공녀>(연출 전고운, 2017)를 흥미롭게 봤다. 상업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명확히 메시지를 던지는 연출과 연기가 좋았다. 독립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예전 동아리 활동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고, 독립영화가 한국 영화의 자양분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또 다른 의미로 좋았다.

마지막 질문! 요즘 행복한 순간은.
인생이란 게 매일이 행복이고 매일이 힘들고 하는 거지, 뭐. 이젠 일희일비하지 않을 나이가 됐다.(웃음) 공대 출신으로 학과 공부와 상관없는 영화를 업으로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포기하지 않았고 질곡이 있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지난 시간 감사하고 나름 행복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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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7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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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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