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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다, 정말 신난다 <밀정> 엄태구
2016년 9월 20일 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숫기가 없는 편이다. 말수도 적고 끼가 넘치는 것도 아니다. 10년간 배우로 활동했으면서도 영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밀정>을 만났다. 김지운 감독, 배우 송강호라는 걸출한 선배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연기가 즐겁다는 걸 알았다. 느낌이 왔다. ‘여기가 내 길이구나’


토론토국제영화제도 참석하고, <밀정> 활동으로 많이 바빠졌을 것 같다.
평소 쉬던 거에 비하면(웃음) 그런 편이다.

<잉투기>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이 친형이다. 동생의 바쁜 활동을 누구보다 좋아할 것 같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사실 통화를 안 해봐서. 원래 그렇게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다.(웃음) 겉으로는 좀 데면데면하다. 음. 아무래도 가족이다보니 원치 않아도 피가 섞여있어서 끈끈하긴 하지만.(웃음) 형 하고는 세 살 차이인데, 어릴 때 싸우면 동생이 딱 맞기 좋은 나이 차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면 형은 6학년이고, 내가 중1이 되면 형은 고1이 돼서 신체가 월등하게 차이가 났다. 그 때 내 키가 형 어깨정도밖에 안 됐으니까. 나이 들고 (몸이 크면서) 선택권이 생겼지만 잘 참았다.(하하) 농담이다.

형과 함께 다양한 작품을 해왔다. 오히려 남보다 더 불편하고 어려운 때도 있었을 것 같다.
형이 <기담>(2007) 연출부에 있을 때 내가 ‘일본군1’로 단역을 맡았는데 그땐 정말 민망했다. 가족이 보는데 연기를 해야 된다는 게, 진짜 싫었다.(웃음) 그러다가 형이 연출한 <숲>(2012)을 하면서부터는 태도가 바뀌었는데, 형이니까 이렇게 편하게 이것 저것 시도해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돼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때 이미 형과 대여섯 편 정도 단편영화를 하면서 호흡을 맞춰온 상황이었다. 물론 누구라도 그만큼 많은 작품을 했으면 호흡은 맞겠지만 가족이기에 각별한 마음이 있다.
특히 엄태화 감독의 <유숙자>(2010)에서는 삭발까지 하지 않았나.
노숙자 ‘만식’ 역할을 맡아서 삭발을 했었다. 원래 다른 배우가 하기로 돼있었던 건데 삭발을 해야 된다고 하니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안 하겠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갑자기 형이 ‘니가 해라’ 하면서 되게 건방지게 말했다.(웃음) 농담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했다. 그 때가 형에게는 큰 기회였다. 우리들끼리는 영화 연출 준비생으로 쳐줬지만 밖에서 보면 그냥 백수였으니.(웃음) 혼자 커피숍 가 있고. 아무튼 불쌍했다. <유숙자>도 오랜만에 찍는 영화라 설레는 것도, 긴장하는 것도 눈에 보였다. 좀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신 노출까지 하고 별의 별 짓을 다 했다. 아, 진짜. 그걸 생각하니 갑자기 확 짜증나네!(웃음) 친척들 다 불러서 같이 봤는데 정말… 그 영화는 아무도 안 봤으면 좋겠다.(웃음) 다행히도 그 영화가 독립영화제나 단편영화제에 초청됐고 그 경험이 쌓여 <잉투기>(2013)가 만들어졌으니, 어쨌든 나에겐 너무 고마운 작품이라고 해야겠다.(웃음)

형에게는 상당히 고마운 동생이겠다.
나도 고마운 게 많다. 형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에게 그런 역할들을 안 시켜줬을 거다. 형 덕분에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게 자양분이 돼서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하다. 무엇보다 형과 일할 때 가장 큰 장점은 편하다는 거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한 번만 다시 가볼게’하고 말 하는데 사실 난 이런 얘길 어디 가서도 잘 못하는 편이라서. 그게 제일 좋은 점이다.

그렇게 배우로 10년가량 활동하다가 만난 게 <밀정>의 일본 경찰 ‘하시모토’역이다.
<밀정>은 여러모로 내게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이 전까지는 연기를 하면서도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런 감정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김지운 감독님을 만나고, 송강호 선배를 만나서 영화를 찍으면서 ‘어 이것도 재밌는 일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이 ‘하시모토’라는 역할을 소화한 내 연기의 겉면을 보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물론 좋고 행복하지만, 앞으로 계속 연기를 해 나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이 일의 재미를 알게 해준 과정이었다는 의미도 상당히 크다.
연기가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나보다.
한 3~4년 전쯤에 그랬다. 그때는 매일 아침마다 ‘다른 거 없을까?’하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랬다. 연기가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현장에서 긴장도 많이 하는 편이고, 끼가 특별히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술자리에서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편이고.(웃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 잘할 수 있는 게 없더라. 계속 연기만 해왔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생계를 위해 영화든 드라마든 가리지 않고 참여하면서 지냈다.

연기를 그만두고자 할 때 떠올린 대안들은 뭔가.(웃음)
가게?(웃음) 그것도 돈이 있어야 되니까 일단 아르바이트를 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빵집, 술집 같은 곳에서도 일했고. 전단지도 나눠주고. 대학 강의 영상을 찍은 적도 있고. 막노동은 당연히 했다. 그렇지만 나보다 더 힘들게 생활하는 배우들도 많다는 걸 잘 안다. 나는 단역 생활도 병행해 나가면서 상대적으로는 덜 힘들게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밀정>에서 상당히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연기를 선보였다.
내가 겪어온 시간들이 분명 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간 쌓인 울분이나, 어떻게든 해 내야겠다는 마음이 배제 됐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연기 색깔이 그렇게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
‘하시모토’는 공개되지 않은 전사(前史)가 있는 인물일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런 부분을 촬영 했었는데 영화에선 삭제됐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부장 ‘히가시’가 ‘하시모토’에게 ‘이정출’에 대해서 묻다가 “아 자네도 조선인이었지”하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 때 ‘하시모토’의 반응이 인상적이다. 워낙 어렸을 때 일본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기억이 없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지운 지 오래라고 대답한다. 아마 이 씬이 그의 과거를 알 수 있는 부분일 거다. 연기를 하는 나조차도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지더라. 심지어 고향은 의주다. 거기는 의열단에서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많은 지역으로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짐작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는 인물일거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히가시’는 자상한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든다. 상처를 다독여주고, 내가 너를 믿는다고 말해준다.
‘히가시’역을 맡은 배우 ‘츠루미 신고’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짚어주면서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참 크다’고 말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날 바라보는 눈빛이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날 안아주는 듯한 기분도 들고. ‘하시모토’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열단을 잡아오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거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자기 인생이 걸린 문제라는 마음으로 ‘김우진’(공유)을 잡기 위해 상해를 간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당신에게도 ‘히가시’같은 선배가 필요했을 것 같다.
그런 존재가 갈급한 상황이었다. 연기라는 게 딱히 어떻게 연습해야 된다는 방식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거라는 규칙도 없다. 그러다 보니 연기를 잘 하는 선배 옆에 그냥 앉아있고 싶고, 그 분의 연기를 보고싶고, 어떻게 준비해서 현장을 가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날 믿고 캐스팅해준 김지운 감독님이 ‘히가시’고, 그에게 고무 받는 ‘하시모토’는 나랑 비슷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리허설을 할 때 감독님이 직접 ‘히가시’의 대사를 읽어 준 적이 있는데, 진짜 배우와 합을 맞출 때보다도 더 진심으로 ‘하이!’(네!)하고 대답하게 되더라.(웃음)
‘하시모토’ 연기가 전반적으로 붕 뜬다는 지적도 있다.
오바스럽다는 뜻인 것 같다. 뭐라고 말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부족해서 나오는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대선배들과 이렇게 대사를 많이 주고받았던 것도 처음이고, 김지운 감독님과 작업 한다는 것도 긴장되는 일이다 보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는 조금씩 실력이 늘지 않을까. 다음 번에는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아직은 보여줄 게 많다. 왜냐하면 그동안 한 게 많지 않으니까.(웃음)

김지운 감독은 당신이 선배들과 연기 앙상블을 잘 이뤄냈다고 칭찬했다.
(지긋이 엄지를 치켜 올리며) 감독님께는 절대복종이다.(웃음) 감독님께는 정말 감사하다. 같은 장면에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자유로운 연기 방식은 지금까지 형이랑 작업할 때만 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김지운 감독님은 내 그런 방식을 개입없이 그저 내버려둬주더라. 나와 내 방식을 끌어 안아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업영화 현장에서 형이랑 작업할 때처럼 해볼 수 있었던 건 처음이다. 그래서 더 즐거울 수 있었다.

<밀정>을 촬영하는게 상당히 재미있었나보다.
긴장은 됐지만 그래도 이전작들에 비해서는 부담을 내려놓고 즐겁게 현장에 갈 수 있었다. 특히 송강호 선배와 같이 연기하는 게 너무 재밌다보니 마음 한편에 ‘이게 내 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에서도 참 잘 챙겨줬다. ‘이리와 이리와’하면서 손짓을 하면, 그쪽으로 가서 앉아 이야기 듣고 하는 게 너무 좋았다.
목소리가 상당히 허스키한 편인데 원래부터 그랬던 건가.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조금씩 조금씩 상한 것 같다. 왜 그랬나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작품을 할 때나 연습하는 과정에서 소리를 내다가 그랬을 것 같다. 한동안 책을 보고 혼자 발성 연습을 많이 하던 때가 있었다. 2년정도 그렇게 했는데, 목소리를 바꾸면 새로워보이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 낮고 묵직한 톤, 가볍고 다소 양아치 같은(웃음)톤을 번갈아 시도해보면서 목소리가 상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다가 좀 더 상태가 좋아질 때도 있고, 작품을 할 때는 더 민감해져서 거친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당신을 생각하면 이제 그 목소리가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목소리가 좋다. 생긴 것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어중간한 느낌보다는 약간 극단적인 쪽인데(웃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아직은 이미지가 굳어질까봐 걱정할 단계도 아니고, 가진 조건을 바탕으로 다음 작품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중이 아는 내 모습은 ‘하시모토’ 딱 한 개니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면.
<밀정> 무대인사를 다니기 위해 배우들이 다같이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그러면 저 앞에 김지운 감독이 앉아있고 그 옆에 송강호 선배를 비롯 여러 선배들이 다같이 앉아있다. 근데 나도 거기에 같이 앉아있는 거다. 버스는 달리고, 나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척 하지만 사실 내가 그 안에 타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신난다.(웃음) 정말 신난다.

2016년 9월 20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pgot@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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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김재윤 실장(Z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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