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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남과 여> 이윤기 감독
2016년 3월 2일 수요일 | 최정인 기자 이메일

<남과 여>는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영화라고 소개했다.
전작들보다는 사랑을 조금 더 직접적이고 대중적으로 표현했다는 의미다. 전작에서는 군상을 통해 여러 사연들 속에 보이는 감정을 복합적으로 그렸다면 <남과 여>는 두 인물의 감정에 집중한 영화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해 영화를 연출해 보니 어떤가.
어렵다.

어떤 면이 어려웠나.
사랑이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지 않나. 물론 무언가를 정의하거나 결론 짓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야기란 특성상 인물이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방향성은 정해져 있어야 한다. 동시에 영화가 대중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하려면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했다. 예전부터 고민해 온 지점이지만 <남과 여>는 설정을 비롯한 여러가지 요소들이 사람들에게 익숙한 동시에 민감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전작보다도 더 고민을 많이 했다.

‘불륜’은 민감한 소재이니까.
받아들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거다. 어떠한 이야기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난 단지 최대한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려고 노력했다.

<남과 여>는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영화사가 15년 전부터 오랫동안 기획해 온 작품이다. 나는 6년 전부터 참여하게 됐다.

유독 멜로 성향의 영화를 많이 찍는데 이유가 있나.
우연의 일치다. 멜로만 하겠다고 한 적도, 멜로만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멜로만 하고 있더라(웃음). 나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연출해 보고 싶은 다른 장르가 있나.
스릴러. 그런데 내가 스릴러를 할 거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는다. 다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의외이긴 하다.
멜로를 보기도 하지만 즐겨 찾는 건 스릴러다.
어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나.
마이클 만 감독을 아주 좋아한다. 도회적인 남자들의 스릴러가 좋다. 우수에 젖은 남자들이 그림 같이 등장하는 액션 스릴러 말이다. 토니 스콧 감독도 좋다. 그가 만들어 낸 덴젤 워싱턴의 남성적인 이미지가 좋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마초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거다(웃음).

다른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전작의 성향이 연출의 폭을 좁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맞다. 전작을 바탕으로 일종의 선입견이 생긴다. 나도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 거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 믿더라. 대게는 <여자, 정혜> 같은 영화 좋은데 그런 영화를 계속 만들라고 한다.

그런 상황을 주체적으로 바꿔보려고 노력한 적은 없나.
영화는 엄연히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시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다만 연출가로서는 다양한 영화를 하고 싶기 때문에 환경이 조금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멜로 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 대한 갈증이 분명 있다.

취향과 달리 당신의 전작에는 여성의 관점이 많이 녹아 있는 느낌이 든다.
아니다. 나는 남자니까 내 영화도 남자의 시점에서 그려진 거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결국 남자의 시선일 수 밖에 없다. 남자의 편견도 영화에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신작의 제목이 <남과 여>다. 당신에게 여자란 어떤 의미를 가지나.
잘 모른다. 영원히 모른다. 그런데 영화는 실제 생활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할 때는 여성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영화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하는 거다. 영화를 만들다가 여성의 감성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때부터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럴 경우 해답은 어디서 얻나.
우선 내가 그 동안 여성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가 기준이 된다. 그리고는 어머니, 여동생, 누나, 혹은 예전에 가깝게 지낸 여성들과 같은 주변 사람을 참고한다.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여성의 모습을 활용할 때도 있다. 길에서 지나친 여성일 수도 있고, 그림에서 본 여성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때 그때 나에게 필요한 이미지를 모으는 거다. 예를 들어 <남과 여>의 상민이라는 인물은 지인 중 그녀를 대상화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 외모나 느낌, 성격이 내가 생각하는 상민과 비슷한 사람을 찾는 거다. 물론 내가 상민이라는 인물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을 놓고 다른 모습들을 추가해 가면서 조금씩 이미지를 다듬는다. 그렇게 이미지가 모이면 영화를 모니터링 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이야기를 징그럽도록 많이 한다.
상민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누구인가.
밝힐 수가 없다(웃음).

그럼 기홍은?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남성 캐릭터의 경우는 내가 남자여서 그런지 조금 더 편하게 접근하는 면은 있다.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남자의 경우는 평상시 말투를 활용해 대사를 쓰기도 한다. 여자가 내 말투로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이 웃을 거다. 하지만 남자는 나와 성격이 다른 캐릭터라 할지라도 내 행동을 조금 더 쉽게 접목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가까이 지내는 남자들의 행동양식을 차용하는 데 있어서도 여자보다 남자 캐릭터가 상대적으로 편하다.

당신의 캐릭터가 모두 실제로 있을 법한 인물처럼 느껴지고 각자의 개성이 있는 게 장점이다.
내 주변에도 저런 놈 하나 있지, 싶은 인물인 거다. 사실 작업할 때는 원하는 대로 캐릭터가 만들어졌는지 100%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에 최대한 접근해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완성된 영화를 보여줬을 때 사람들이 그럴싸하다고 느끼기를 기대한다.

앞으로의 작품에 등장시킬 캐릭터의 모델로 생각해 둔 사람이 있나.
주변에도 굉장히 영화적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웃음). 이미지만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언젠가 영화에 써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 중 자신이 모델인 걸 발견하고 놀란 사람이 있나.
모델이라고 말해줘도 영화 속 인물이 자신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모양이더라.

스스로가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다를 수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본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웃음).

스스로가 캐릭터의 모델이 된 적도 있나.
없다. 나를 대상화하지는 않는다. 은연중에 내 성향이 인물에 녹아있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내 삶은 매력적이지도 영화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영화에서 다루고 싶지는 않다. 지인 중 하나가 내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한 적은 있다. 홍상수 감독님 영화의 포복절도 코미디 버전이 될 거라고 했는데 그건 생각 중이다(웃음).

당신 영화는 일상적인 대사에서 묻어 나는 감정의 변화가 돋보인다. 그런데 <남과 여> 같은 경우는 그런 대사가 전작들에 비해 비교적 적다는 느낌이 들더라.
사실 <남과 여>에도 상민과 기홍이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상적인 모습들이 조금 있었다. 그런데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아서 편집했다.
기홍의 친구 세나의 캐릭터가 이야기에 스며들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있다.
기홍의 성장 배경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세나는 현재 기홍이 하고 있는 일과 연관된 사람이고 어릴 적부터 기홍을 알아온 친구다. 또 와이프로부터 오해를 받을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세나는 그런 모든 역할을 한 인물에 모은 장치인 셈이다.

<남과 여>는 굵직한 사건이 일어나는 영화가 아니라 두 사람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의 몰입도가 떨어지기 쉬워 연출이 까다로웠을 것 같다. 보다 극적인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장치들은 마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배제한 건가.
그런 장치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길어져서 편집했다. 지금 러닝 타임이 1시간 55분인데 배우들도 영화가 20분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영화가 너무 길어지면 사람들이 화장실을 가고 싶어하니까 어쩔 수 없다(웃음). 나도 휴식시간 없이 2시간을 못 버틴다. 끝까지 편집여부를 고심한 분량이 30분 정도 있다.

<남과 여>는 내밀한 감정에 집중한 이야기인데 클로즈업보다 와이드로 촬영한 장면들이 오히려 더 임팩트있게 다가오더라.
취향의 차이겠지만 원경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두 인물의 뒷모습을 담은 원경이 두 사람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물론 멋지게 보이기 위해 촬영한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웃음). 멋진 배경과 구도도 의식해야 하니까. 배우들은 원경만으로도 감정이 모두 표현 됐는데 클로즈업을 찍을 필요가 뭐가 있냐고 하더라. <남과 여> 배우들이 모두 아티스틱한 면이 있다. 오히려 내가 아무리 그래도 클로즈업은 필요하다고 했다(웃음).

자연 속에 둘만 덩그러니 놓인 남과 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도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외롭지 않나. 도시에서 빌딩들에 둘러쌓여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게 아니다. 차가운 건물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외로울 수도 있다. 도심을 촬영하면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의 영화는 외로운 동시에 따뜻한 게 흥미롭다.
쓸쓸하지만 한 편으로는 따뜻한 느낌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다. 영화를 마냥 황량하게만 끝내고 싶지는 않다. <남과 여>의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상민과 동행하는 택시기사의 행동이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특별한 인연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난 뒤에 상민과 택시 기사는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눈 밭에 하염없이 서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결국에는 세상이 따뜻하다고 믿는 모양이다.
실제로는 비관적인 성격이다. 그런데 영화는 조금 작위적이라고 할지라도 차갑게 마무리되는 것보다 따뜻한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는 게 좋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거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떤 이는 극복하는 방법을 찾을 테고 어떤 이는 영원히 멍애로 짊어질 거다. 하지만 나는 내 캐릭터들이 가능하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버려진 사람들인데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건 결국 그들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래서 <여자, 정혜>를 비롯해 모든 영화들을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을거야, 라는 느낌으로 마무리하려 한 것 같다.
당신의 실제 삶은 어떤가.
지리멸렬이다. 비관 일변도다.

현재 삶의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든가.
타고난 성격이 비관적이다(웃음).

하지만 인물들의 긍정적인 면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창작자인 당신에게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면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내가 워낙 비관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낙관을 기대하는 것 같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바라는 걸 수도 있다.

당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와도 관계가 있는 건가.
그럴 수 있다.

영화를 전공한 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연출에 매력을 느꼈나.
영화가 너무 재밌었다. 영화 보는 것이 삶의 유일한 도피처처럼 느껴졌다. 좋은 영화, 내 취향의 영화를 보고 난 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도 영화에 그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나.
그렇지는 않다. 지금도 영화를 열심히 보려고는 하지만 옛날만큼 보지는 않는다. 물론 지금도 감상할 때의 마음은 예전과 같다. 영화를 만든다는 걸 잊어 버릴 만큼 너무 재밌게 본다. 하지만 연출을 할 때는 시간이 없기도 하지만 의식적으로 영화관람을 피하기도 한다. 지금은 연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데 다른 영화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을까봐 신경 쓰인다. 물론 일부러 자극을 받으려고 영화를 찾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최근 본 영화 중 인상에 남은 작품이 있다면.
요즘은 영화를 많이 안 봤다. 그런데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정말 좋더라. 굉장히 어둡고 우울하고 세상의 끝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종의 예술 영화인데 감독의 색깔과 배우들의 매력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었다. 영화를 잘 만들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한국에서는 잘 만들어지지 않을 영화다.

왜?
투자가 안 될 테니까.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상업성이 부족한 영화이긴 하다. 다양한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쉽다.
누구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성이 점점 사라지는 건 사실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겠지. 요즘 멜로가 많이 없어졌다며 남성 배우들의 영화만 판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발란스는 깨진 것 같다. 남성 배우들의 영화도 있어야겠지만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곤란하지 않나. 그런데 시장이 먼저 움직여야지 작품이 움직인다고 시장이 따라오지는 않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시장이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현재 구상하는 작품이 있나.
항상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소설을 보며 구상해 놓은 작품도 있다. 예술적인 성향이 강한 것도, 대중적인 성향이 강한 것도 있다. 제안 받은 작품을 고려하기도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영화는 혼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작업이니까.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좁은 게 답답하겠다.
시장이 지금보다 조금 더 유연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인이 합쳐진 문제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편인가.
아니다. 시나리오도 생각나는대로 쓰는 편이다. 생각나는 대로 살고. 생각나는 대로 눈 뜨고.

감독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후배들에게 평상시에도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학교에서 영화를 배운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만 배운 뒤에 영화를 만드는 건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영화를 배우면 그의 지식과 경험은 무기가 된다.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노력해서 철학, 사회학, 예술 등 각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점 이수하듯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순수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습득하면 좋을 거다. 영화까지 학교에서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런데 그렇게 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아 보이더라.

영화만 공부한 뒤 영화를 만드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거다. 본인의 영화적 성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거나 자기 반성이 없을 수 있다.

영화적 성향에 의지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영화 이외의 세상을 보는 눈이 없는 걸 말한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거다. 사회를 완전히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 확률이 커진다는 거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예전에 만난 어느 영화 감독이 영화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영화로 경험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럴 경우 영화를 만들 때도 실제 삶이 아닌 영화 속 세상을 영화에 환원시킬 위험이 있다면서. 그게 영화가 비슷해져 가는 이유 중 하나라고도 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과정이 본인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사회에 대해 자꾸 생각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본인의 취향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그 사람만의 영화도 나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만 매번 따라가게 된다. 특정 영화를 뛰어 넘겠다는 목표를 세우거나 기존 영화의 성향만 좆아가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 봐야 기존의 작품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아집이 생길 수도 있다.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책이나 사건, 현상이 있다면?
멍 때리며 보낸 세월이 긴데 그 시간이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때 의지와 상관없이 다양한 인문학적 경험을 쌓았다. 대학을 다닐 때도, 졸업하고 나서도 허송 세월을 많이 보냈다(웃음). 그때 인생의 많은 사건에 부딪히면서 세상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그러다 선택한 게 영화다. 예전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만들어 볼 생각은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내가 그런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때는 그런 시간이 정말 싫었는데 지나고 나니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 같다는 거다. 다양한 경험에 시간을 할애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어릴 적부터 목표를 빨리 정해 매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시간을 마음 놓고 보내기가 힘들다.
요즘 그런 경향이 강해진 것 같기는 하다. 어릴 때부터 한 길만 바라봐서 모든 걸 갖출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가 어렵다. 어린 나이에 박사라도 되면 굉장한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도 있는 것 같다. 최연소, 최대가 중요한 거다.

기록이 중요한 사회니까.
맞다. 기록을 깨는 것을 굉장한 업적처럼 여겨는 것 같다. 업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면 사회는 단순해 질 수밖에 없다.

본인만의 시간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게 갈수록 힘들어 진다.
맞다. 군중에 휩쓸려 살아야 하니까. 그렇지 않고 살 수 없는 게 또 도시의 삶이지 않나. 어렵지.

본인처럼 비전공자지만 영화연출을 꿈꾸는 이에게 해 주고 싶은 실질적인 조언이 있다면.
잘 모르겠다. 주변에서도 진로 상담을 해 오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은 학교에 가라고 말해준다.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마땅히 없다. 단지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고를 넓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는 거다. 몇 년 낭비하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다. 급하게 하는 게 꼭 좋은 걸까?

멈춰있다는 것보다 도태에 대한 두려움이 힘든 것 같다.
도태도 무섭고, 당장의 생활도 어려우니 힘들겠지.
불안한 시간을 이겨낸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없다. 이겨냈다기보다 달리 할 게 없어서 이겨진 거다.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행복한 일은 무엇인가.
없다. 기억이 안 난다. 감정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편이 아니다. 좋다, 나쁘다도 애매한 경우가 많다.

혹시 기홍이 당신을 모티브로 한 인물인가.
나도 애매한 편이긴 하다. 크게 좋고 나쁜 게 없다.

영화 속에서 세나가 기홍에게 넌 원래부터 애매했다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실제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나.
똑같은 대사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나이를 먹어도 변한 게 없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스스로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철 없고, 멍 때리고, 갈팡질팡하고, 애매하다. 시간이 지나도 바뀌는 게 없다.

현재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가장 큰 부분은?
현재로서는 차기작 생각이 가장 크다.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만 생각하며 지내는 것 같다.
하는 일이 영화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일은 끼어들 게 없다. 기홍처럼 고민해야 될 와이프나 딸도 없지 않나(웃음).

2016년 3월 2일 수요일 | 글_최정인 기자(jeongin@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_박광희 실장( 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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