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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다 <귀향> 조정래 감독
2016년 2월 24일 수요일 | 이지혜 기자 이메일

영화 배급이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개봉예정인 영화상영관은 300여 개, 스크린 수는 600여 개라더라.
내가 이런 걸 잘 모른다. 연락이 오는 대로 정보를 얻고 있을 뿐이다. 배급사인 와우픽쳐스가 많이 도와주고 있다. 메가박스의 배려부터 시작해서 극장 측도 잘 해주고 계신 것 같다.

추가 성원자도 있는 것 같던데.
영화 후원을 마감했는데도 한국, 미국에서 헌금을 해주신다. 특히 미국에서 후원 시사회를 할 때는 후원금이 500만 원 가까이 모였다더라. 누구 한 사람이 큰 돈을 낸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주신 것들이 모인 돈이라서 더 의미 있는 것 같다.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상영을 갈망하고 계시다는 게 참 감사하다. 기적 같은 일이다. 이 영화의 주인은 후원자다. 그 분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귀향>의 매력 중 하나는 배경음악이다. 한국음악도 나오는데 직접 참여한 건가?
내가 고수로서 직접 참여한 건 아니다. <두레소리> 때부터 음악감독을 맡아 주셨던 함현상 감독이 맡았다. 함현상 음악감독은 <귀향>이 본격적인 촬영이 들어가기 한참 전인 2009년부터 준비를 해왔다. 영감을 얻기 위해 자비를 털어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에도 다녀오셨다더라. 차기작에서도 함께 할 예정이다.

차기작은 어떤 영화인가?
국악 뮤지컬이다. 조선시대 판소리를 소재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리화가>를 떠올리는데 <도리화가>가 진채선 명창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면 내 영화에서는 판소리가 주를 이룰 예정이다. 또한 가족이 중요한 테마다. 어떤 분들은 내 시나리오나 영화가 항상 가족으로 돌아온다고도 하시더라(웃음). <귀향>도 그렇잖나.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게 내 철학이라서 그런 것 같다.

왜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요즘 한국 사회가 살기 팍팍하잖나. 자살률도 상당히 높고. 가족 공동체가 파괴된 게 우리나라가 힘들어진 원인이라고 본다. 예전에 청소년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면서 느꼈던 게 바로 가족 간에 대화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부모 자식 간에, 아내와 남편 사이에 너무도 대화가 부족해서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가족 공동체를 회복시켜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항상 어떤 작품을 쓰든 이야기가 가족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전통 콘텐츠를 바탕으로 문화상품을 기획하는 JO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고수로도 활동하고 있고 <귀향>도, 차기작에서도 한국음악이 나온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전통 음악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뭔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때문이다. <서편제>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서편제>를 보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편제>를 본 이후부터 미친 듯이 소리와 북을 배우러 다녔다. 바다소리 음악원 활동을 하다가 나눔의 집 할머니들도 만나 뵙게 된 거니 <서편제>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는 게 맞지 않을까. 명작 중의 명작이다. 환장하겠다. 차기작을 판소리를 소재로 한 국악 뮤지컬로 정한 것도 임권택 감독에 대한 오마주적 성격이 크다.

전통문화, 특히 전통음악의 어떤 점이 좋은 건가?
모르겠다. 그냥 미치겠다. 들으면 가슴이 아프고 신도 나고 그렇다. 나중에 공연할 때 초대하겠다. 공연 끝나고 막걸리 한 잔 하면 그 맛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다(웃음).

영화 주제곡으로 ‘아리랑’과 ‘가시리’를 사용했다. 특히 한국전통음악 가운데 ‘가시리’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내가 ‘가시리’를 좋아한다(웃음). 청산별곡이 고려 가요잖나. 청산별곡의 ‘가시리’도 고려 시대의 유행가였을 거다. 당시의 유행가는 복원될 수 없다. 그런데 이용선 선생님의 ‘가시리’를 듣는 순간 그때 가요라면 이런 선율이 아니었을까, 우리 민족의 오래된 노래구나, 싶더라. 왠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을 것 같은 느낌. 또한 ‘가시리’가 소녀들의 아픔을 대변할 수 있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괴불 노리개가 참 독특한 소재다. 괴불 노리개의 의미가 뭔가?
괴불 노리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괴불 노리개는 서민들의 장신구다. 마나님의 한복을 만들고 난 자투리 천으로 만드는 게 괴불 노리개다. 옛날 사람들은 괴불 노리개의 뾰족한 모양이 삼재나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달아주곤 했다. 우리 영화의 주인공들도 사실 여자라기 보단 아이들이잖나. 초경하고 막 2차 성징으로 진입하는 아이들. 괴불 노리개가 주인공들의 나이 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서민의 대표적인 장신구라는 상징성도 있고 액운을 막아준다는 부적 역할도 하고 있기에 괴불 노리개를 사용했다.
감정적으로 눈물을 자아낼 수 있음에도 상당히 절제하는 게 느껴졌다. 영화의 감정을 절제한 이유가 뭔가?
위안부라는 소재는 많은 이슈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아픈 영화를 사람들이 볼 것이냐는 다른 문제였기에 투자가 잘 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겪었던 아픔을 오롯이 전달하면서도 관객이 볼 수 있는, 아픈 걸 보여주지만 치유로 나아갈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자 했다. 특히 제1 관객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시잖나. 할머니들이 보시다 쓰러지시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다. 장면 하나 하나에서 관객들을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작년 12월 7일, 영화가 만들어지자마자 할머니들께 보여드렸는데 참 마음이 고통스럽더라. 이런 얘기를 했더니 어떤 사람은 나한테 걱정을 달고 산다고 하더라(웃음).

할머니들의 반응은 어떠셨나?
내가 할머니들께 ‘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나는 살아 있으니까 이런 영화라도 보지”라고 하시더라. 마음이 아팠다. 내가 제일 처음 나눔의 집에 갔을 때가 2002년이다. 그때 뵀던 분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다. 지금 45분의 할머니께서 살아계시지만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는 연세들이다. 저번에는 힘든 몸을 이끌고 극장까지 오셔서 영화를 봐 주셨다. 많이 우시기도 했고. 너무 죄스럽고 감사했다.

기자간담회 때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고 영화에 대해 착안했다고 들었다.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쳐녀들’이란 그림을 보자마자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처음엔 그림 속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한 쪽은 불타고 있었고 숲 속에서는 소녀들 둘이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알고 봤더니 이게 구사일생의 극적인 현장이더라. 그 그림을 보기 전까진 위안부 피해 소녀들이 어딘가에 살아있거나 돌아가셔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소녀들이 고장 나면 버렸다.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해서 더 이상 위안부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죽여 버렸다. 평균 나이 16세, 초경도 안 했던 소녀들이 그 일을 겪었던 거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집에 다 나와 있다. 산 자들의 기록 안에 죽은 자가 들어 있다.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죄송함에 내 몸이 다 아프더라.

기묘한 꿈도 꿨다던데.
어느 날 불에 타던 소녀들이 다 일어나서 하늘을 나는 꿈을 꿨다. 방금 전까지 온몸이 그을리고 타들어가던 소녀들의 옷과 몸이 새하얗게 변하더라. 그을림과 핏자국이 없어지는 모습이 마치 백워드 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하늘로 승천해서 고향땅으로 날아갔다. 타지의 소녀들이 고향에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장면을 재빨리 메모해 뒀다. 처음엔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가진 재주가 영화랑 고수 노릇밖에 없으니까.

영화 속에서는 나비 떼가 날아가는 모습으로 형상화 됐다.
모시나비다. 모시나비는 아기영혼을 뜻한다. 초본에는 소녀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누가 읽어보더니 소녀들이 날아가는 게 무서울 것 같다더라. 하지만 난 꿈 속 장면을 구현하고 싶어서 꽤 오랫동안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2007년을 거치면서 위안부 문제가 전 세계적인 이슈로 확대되고 한국에서도 평화나비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나비로 결정됐다. ‘정민’이가 고향에 있을 때는 노란 나비가 날아다니지만 고향에 돌아올 때는 흰 나비로 형상화했다.
‘은경’의 캐릭터가 흥미롭다. 심지어 강도에게 성폭행 당하고 아빠는 그 강도와 싸우다 죽었다는 트라우마도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한 명 뽑으라면 ‘은경’을 뽑고 싶다. 난 10년 동안 ‘은경’만 찾아 다녔다. 처음엔 ‘은경’의 직업을 두고 고심했다. 의사, 간호사, 샐러리맨 등 여러 직업을 고려해봤지만 결국 초기 설정이었던 무녀로 되돌아 왔다. 영화 결말은 ‘은경’이가 굿을 하는 장면을 넣었다. 이 굿은 진도 씻김굿 중에서 혼맞이라는 대목에서 영감을 얻었다. 혼맞이를 하고 씻김한다는 것은 영혼의 한과 아픔을 씻어주고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려 맞이한다는 의미가 있다. ‘은경’의 굿이 돌아가신 위안부들의 아픔을 씻겨 드리고 천방지축이었던 소녀의 모습으로 되돌려 한국으로 모셔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삽입했다. ‘은경’과 ‘정민이’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나이 어린 여성이란 점, 아픈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점, 착한 심성을 가져서 세상을 치유하려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왜 나이 어린 여성이란 점이 왜 중요한가?
<귀향>은 타향에서 돌아가신 위안부들의 넋을 모셔오는 영화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모셔 와야 하느냐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나는 단연코 또래 여성이 모셔 와야 한다고 봤다.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건 결국 또래 아이 아니겠나. 입장 바꿔 생각해 봤을 때도, 고향땅에서 시커먼 남자가 날 부르고 있으면 싫을 것 같았다(웃음). 사실 할머니들은 남자 손에 닿는 것도 싫어하신다. 내가 할머니들과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안마를 해드리려고 어깨를 주무르니 나를 딱 때리곤 도망가시더라. 그때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맞은 건 난데 오히려 할머니께서 더 당황하셨다. ‘쟤는 그런 애가 아닌데 내가 왜 그랬지’ 하는 표정. 그 모습이 진짜 가슴 아팠다. 물론 끌려가신 분들 중에는 24, 25살 혹은 30살이신 분들도 있었다. 영화 속 ‘분숙’ 같은 캐릭터다. 그런가 하면 11살짜리도 있었다. 영화 속 ‘정민’과 ‘은경’이의 나이 대가 딱 그 분들의 동생, 언니 또래다. 사실 생각해 보면 24, 25살, 심지어 30살도 애기다. 요즘 30살은 더 공부하려 하고 시집도 안 가지 않나. 평균 수명에 비춰보면 설사 30살이라도 애기거든.

할머니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마음 아프다.
아직 치유가 되지 않으신 거다. 그래서 할머니들께서는 우린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할머니들은 돈에 대해 확고하시다. 정말로 아베 총리에게서 진정 어린 사과를 받고 싶어 하신다. 아직도 일본 정부는 뒤에서 딴말을 하고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없다고 한다. 기가 막힌 거다. 심지어 증언집에 따르면 당시에 끌려갔던 많은 아이들이 성행위 자체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조선의 유교적인 가부장제 사상, 순결주의에 따라 성행위에 대해 배운 바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일본군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하고는 있는데 그것이 뭔지는 몰랐다는 증언들도 있다. 제일 화가 나는 대목은 모 교수의 발언이다. 그 교수는 본인도 여자이면서 할머니들께 그래도 즐기지 않았냐고, 심지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던 건 아니냐고 물었다. 위안부들의 평균 나이가 16세였다. 오늘 날로 치면 집단 청소년 성폭행, 강간이다. 과거의 기준에서도 이건 잘못된 행위였던 게, 당시에도 전쟁에는 룰이 있었다. 육아법에 따라 미성년자를 고용해선 안 됐다. 그래서 일본군들이 한국인 위안부 소녀들의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나이도 위조해 죄를 숨기려 한 거다. 그것부터 이미 잘못을 자인한 게 아닌가.
위안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소녀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말을 해서 참 송구스럽지만.
그런 비판들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당시에 할머니들은 대부분 소녀였다. 이 영화가 소녀 프레임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한국인 위안부들이 소녀였던 거다. 아빠한테 까꿍거리던 소녀들이 끌려 간 거다. 20대도 있었다고? 그들도 애기다.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들께서는 끌려갔을 때의, 아팠던 시절의 나이에 고정돼 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들께서는 샘도 많고 질투도 많으시다. 할머니라기보단 오히려 소녀처럼 보일 때가 많다. 돌아가신 분들은 오죽하겠나.

위안부와 관련해 최근에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중간관리자로서 조선인도 많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자발적 위안부들도 많았다고 기술돼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엔에 가서 물어봐라. 혹은 미 하원 청문회의 리포트를 봐도 된다. 최초로 증거를 모았던 사람은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교수다.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교수와 여러 리포트에서도 볼 수 있듯 위안부는 대부분 인신매매, 납치, 취업사기의 희생자였다. 우리 영화에서도 신발공장에 간다고 하잖나. 이런 얘기를 하기에는 민감하지만 사실 조선의 위안부 대부분이 피해자였다. 특히 일본군들이 조선인 위안부를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어렸을 뿐만 아니라 순결을 지키는 문화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 일본군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위안부와는 마치 연애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강간해놓고 연애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위안소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개념이다. 1941년에 군인들이 대규모로 성병에 걸려 전력이 상실되니까 이를 막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했다. 매번 성병 검사를 할 수 없으니까 아예 위안부를 관리했던 거지. 위안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노동자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가스실로 보내듯 죽여 버린 거다. 설사 이들이 자발적으로 갔다고 해도 문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갔으면 하루에 2, 30명의 남자를 감당하게 하며 성착취 한 게 용서가 되나?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아 확대 해석하는 것마냥 일본군 위안부 전범을 합리화하고, 이를 가리켜 동지적 관계라 하는데 천벌 받는다. 더불어 중간관리자로서 조선인이 개입돼 있었단 건 나도 안다. ‘정민’이가 끌려와서 만났던 군속도 조선인 아닌가. 그러나 이들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 독일은 지금도 나치 정권에서 부역하던 사람들을 철저히 잡아낸다. 당시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잖나, 그렇게라도 했어야지, 라고 말하는 건 정말 옳지 않다.

영화에서 일본군의 전범 뿐만 아니라 위안부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 역시 꼬집고 있었다. “위안부였다는 과거를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밝히냐"는 대사가 특히 그랬다. 한국 사회의 냉대 역시 큰 문제라고 느꼈나 보다.
<귀향>을 만들면서 전쟁 나면 어쩔 수 없이 위안부도 생기고 어린 애들 팔아먹는 사람도 생기는 거 아니냐는 둥,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는 둥, 심지어 위안부가 가짜라며 시나리오 던지는 사람들도 봤다. 우리나라에 그런 분들이 정말 많았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일본의 우익보다도 더 우익 같은 발언을 하더라.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측면에서 전쟁범죄 문제를 짚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일본군이 탈출하려는 위안부 소녀를 도와주려다 죽기도 했다. 그 장면이 감독의 의도를 잘 집약한 것 같았다.
처음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일본은 나쁜놈! 우리 나라 사람만 좋은 사람!’으로 끌고 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편적인 인권에 기대어 반전사상을 담아내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일본군 때려야지, 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건 선전, 선동 영화나 다름없다. 잘못된 영화는 전쟁의 도구가 된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영화, 힘들지만 볼 수 있는 영화, 일본 관객도 봤을 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해외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본 한 일본관객은 일본이 이렇게 심한 짓을 한 줄 몰랐다,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더 미안하다면서 사과하고 갔다.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고 느꼈다고도 했고.
영화를 제작하는 14년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한국 쪽에서는 투자가 들어오지 않고, 중국 쪽에서는 중국인으로 주인공을 하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겠다고 해서 투자가 무산되기도 했고. 앞서는 누군가가 시나리오를 던졌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귀향>을 만든 원동력은 뭔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내가 대단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 영화를 시작한 건 아니다. 할머니들 곁엔 가슴, 마음으로 할머니들을 만나 평생을 바쳐 봉사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 분들 중 내가 영원히 막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마음을 이제까지 지킬 수 있었던 건 가족 덕분이다. 아내가 항상 옆에서 든든하게 지지해줬다. 또 한 명을 꼽자면 임성철 PD다. 모든 사람이 떠나갈 때도 그는 내 곁을 지켜줬다.

임성철 PD는 어떤 역할을 했나?
임성철 씨는 김구의 외종손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일본군 악역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도 두 시간 동안이나. 그 친구 얘기에 따르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다더라. 임성철PD는 처음엔 배우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우리 영화의 아트워크 감독으로 스토리 보드도 하고 PD도 맡았다. 모든 일을 다 한 거다. 그러다 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쿠싱병에 걸리고 말았다.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도 목숨 바쳐 일하고 있는 거다. 그 친구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배우들은 어떻게 섭외했나?
‘은경’을 맡은 최리는 그녀가 고등학생일 때 발탁해서 시나리오를 건넸었다. 그 외의 나머지 배우들은 오디션으로 뽑았고 거의 다 신인이다. 그럼에도 99% 재능기부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셨다. 안 뽑아도 되니까 스텝으로 써 달라는 배우도 있었다. 순수 일본인임에도 자비로 비행기 타고 한국에 와 영화를 찍은 분들도 있다. 그렇지만 배우를 구하는 데 정말 지난한 세월을 보냈었다. <귀향>에서 가장 중점을 둔 건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원어민 배우를 구하는 것이었다. 일본 관객들도 이 영화에 영화적으로 공감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특히 ‘정민’ 역을 맡은 강하나 양은 재일교포 4세로 제주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손숙 선생님을 비롯해 오지혜 씨 등 많은 배우들이 도와주셨다.

개봉을 하루 앞둔 소감은 어떤가?
감격스럽고 눈물 난다. 상영할 수 있게 된 건 전적으로 국민의 힘 덕택이다. 그 분들이 아니고서야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귀향>을 만든 주인분에게 돌려드릴 것을 생각하니까 감격스럽고 가슴이 벅차 오른다. 늘 영화 한 번 상영할 때마다 한 분의 영혼이 돌아오시는 거라고 말씀 드렸는데 내일 하루에만 몇 백 번 상영이 예정돼 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그 분들을 맞이해야겠다(웃음).

2016년 2월 24일 수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imovist.com)
사진_김재윤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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