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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 <그날의 분위기> 조규장 감독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 최정인 기자 이메일

손에 든 책이 무엇인가.
스티븐 킹 단편집이다.

책을 많이 보는 모양이다. 영화도 자주 보는 편인가.
되도록이면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려고 하는데 작업할 때는 집에서 편하게 보기도 한다. 작업 중에는 바쁘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 다른 영화를 보는 게 부담스럽다.

인류학을 전공한 걸로 안다.
맞다. 입학은 컴퓨터 공학과로 했지만 인류학으로 전과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무엇을 했나.
동대학원을 다니다 그만 두고 매체비평 기자를 잠시 했다. 그러다 30세에 한예종에 입학했다.

갑자기 영화에 입문한 계기가 무엇인가.
예전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영화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어 섣불리 뛰어들 수가 없었다. 20대에는 공식적으로 등단은 못했지만 시, 소설 등 글을 10년 정도 썼다. 그러다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적성에 안 맞아서 학교를 나왔다. 회사 생활도 조금 해 봤는데 맞지 않더라. 그렇다고 평생 골방에 갇혀서 글만 쓰고 살 수도 없지 않나.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영화를 하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영화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미지 작업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영화를 한 번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런데 한예종에 들어가서 단편들을 찍으면서는 영화를 오래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영화는 할 게 많아서 좋다. 음악이나 미술,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일을 모두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출판업에 종사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날의 분위기> 후반 작업을 할 때쯤 나더러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해 봤으니 영화를 그만둬도 괜찮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때 아직 해 보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소설로도 풀 수 있지 않나.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혼자 작업할 수 있는 소설이 영화보다 쉽지 않나.
사실 시나리오를 쓰는 것보다 소설을 쓰는 게 더 재미 있기는 하다. 제약도 없고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거든. 그리고 소설은 내 속에 있는 관념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쓰면서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이 분명 있다. 그런데 시나리오는, 특히 상업 영화 시나리오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영화는 관념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시선이 소설보다 객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결과가 나왔을 때의 만족감은 영화가 소설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돌아다녀야 하는 체질이라 주변의 소설가들처럼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웃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영화 작업 과정 자체에도 흥미를 느낀다는 말인가.
맞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단편 영화 두 세 편 찍을 때 그걸 느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술도 마시고 욕도 먹고(웃음).

<그날의 분위기>는 <낙타는 말했다> 이후 7년 만에 연출한 영화인데 전작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5~6년 정도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 과도기였던 셈이다.

영화를 잠시 쉬었단 말인가.
영화는 계속 했는데 영화를 하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가졌다. <낙타는 말했다> 때문에 차기작을 투자 받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인 감독인데다가 작가주의적 감독이라 인식된 측면이 있어 제작사들이 투자를 꺼린 것 같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낙타를 말했다> 이전에 촬영했던 단편들을 보고 투자를 결정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몇몇 분들은 특이하게 <낙타는 말했다>를 좋아한다고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낙타는 말했다>를 개봉하고 나서 2년 정도 독립장편영화 시나리오를 계속 썼다. 그때는 독립영화를 조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

어떤 면이?
개인적인 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낙타는 말했다>는 지원도 받았고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아서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런데 <낙타는 말했다> 이후에 또 다른 독립장편 영화를 만드는 건 시스템적으로 상당히 어렵더라. 이제 나이도 들어서 열정만으로 친구들과 힘을 모아 무상으로 영화를 찍을 수도 없었다. 제작 지원 시스템을 이용해야 하는데 워낙 실력 있는 독립 영화 감독들이 많아 쉽지가 않더라. 펀딩을 받아 제작되는 독립영화의 수가 1년에 몇 편 안 되기도 하고 말이다. 독립영화를 조금 더 오래 하다가 대중 영화로 넘어오고 싶었는데 그러기가 힘들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대중영화 시나리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립영화와 상업장편영화의 시나리오 쓰는 게 생각보다 달랐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 했다. 상업적인 머리도 없어서 5~6년 동안은 계속 대중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만 했다. 대중영화의 구조를 시행착오를 통해 알아가는 데 5년 이상 걸린 셈이다. 그러던 중 이야기 하던 영화사에서 <그날의 분위기>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5~6년 동안 대중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썼는데 정작 연출하게 된 작품은 본인의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아직도 시나리오를 쓰는 게 힘들다니까(웃음).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했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가.
사실 대중영화라고 해서 캐릭터나 시선에서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대중적인 플롯과 소재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런데 사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차이를 지금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그날의 분위기>의 후반 작업이 잠시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시나리오를 써 보기도 했는데 독립영화와 대중영화가 그렇게 많이 다른가, 라는 생각도 들더라. 영화의 구조는 사실 조금만 변주하면 되는 건데 독립영화에서 대중영화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더 이야기를 과잉되게 표현한 것 같다.

과잉이라니?
상업적인 요소들에 대한 압박 때문에 이야기나 캐릭터를 조금 과장되고 호들갑스럽게 표현했다. <그날의 분위기>의 시나리오를 받고 연출해 개봉하기까지 2년 반이 걸렸다. 대중적인 플롯에 대한 고민이 많아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첫 6개월은 많이 헤맸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때는 상업영화는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날의 분위기>를 각색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유연석이 인터뷰 할 때 수정된 시나리오는 첫 시나리오의 날 것의 느낌이 많이 없어져 다시 손 봤다고 하더라.
나도 처음 시나리오의 느낌이 가장 좋았다. 사실 로맨틱 코미디는 나의 우선 순위에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래서 장르에 대해 잘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나 스릴러였다면 그렇게까지 헤매지는 않았을 것 같다. 로맨틱 코미디는 일반적으로 여성을 메인 타깃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시선이 많이 담겨야 한다. 그런데 나는 여성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더 힘들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연출을 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연출해 보니 어때나.
내가 쉽게 건들이지 못했던 지점을 연출해 봤다는 게 의미 있었다. 그리고 남녀의 시선차가 정말 크다는 것도 재확인했다. 정말 말 그대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였다(웃음). 로맨틱 코미디는 <어바웃 타임>에 나오는 할아버지처럼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남성들이 쉽게 건들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다. 정통 멜로와도 결이 매우 다르거든. 요즘 로맨틱 코미디가 <뷰티 인사이드>처럼 판타지 장르와 많이 결합하는 이유도 기승전결의 구조로 승부를 내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정통 멜로처럼 신파로 갈 수도 없지 않나. 잔잔하게 가기도 힘들고. 섬세한 디테일 속에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의 연애를 많이 반성했다(웃음).

사랑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본 ‘아는’ 이야기이지 않나. 그래서 로맨틱코미디나 멜로가 더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
맞다. 그런데 모두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동상이몽인 거지(웃음). 나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본인의 경험이 보편적인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경험에 비추어서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사실 깊숙이 들어가보면 정말 각양각색이다.

그럼 생각에도 없던 로맨틱 코미디를 연출하게 된 것은 대중영화를 시작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건가.
그건 아니다. 그 동안 해 온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어떻게든 끝을 보자는 생각이어서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안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들어온 <그날의 분위기> 시나리오의 첫 느낌이 너무 좋았다.

어떤 면이?
<비포 선라이즈>와 비교가 많이 되지만 사실 <그날의 분위기>는 톤이 다른 영화라서 <비포 선라이즈> 같은 낭만성은 없다. 어떻게 보면 <그날의 분위기>는 일탈을 소재로 삼은 영화다. 그 속에서 인물들이 성장하는 모습이 좋았다. 사실 판타지적인 부분이 있다. 인간이 어떻게 한 번의 일탈을 통해 성숙할 수 있겠나. 하지만 일탈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큰 맥락에서 보편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의 분위기>는 그 지점을 영화 속에서 어렵지 않고 예쁘게 그려냈더라. 지금은 캐릭터들이 거의 비슷한 비중이지만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두 인물의 비중이 수정 7, 재현 3 정도였다. 시나리오를 보는데 수정이 놀이터에서 우는 장면에서 나도 울컥 눈물이 나더라. 관객들이 보기에 지금 영화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스스로에게 너무 박한 거 아닌가.
이제는 너무 오랫동안 작업을 해와서 <그날의 분위기>가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일탈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나.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탈이 현실적으로 주는 데미지가 너무 크다. 외국여행을 나가 보면 장기 여행 하는 한국 사람 중에는 여자가 정말 많다.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거나 휴직할 때, 다음 인생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기로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더라. 그런데 남자는 거의 못 봤다. 행여 남성 여행객을 발견하더라도 대부분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의 여행이다. 남녀를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한 번 사회 시스템 밖으로 나오면 복귀하기 어렵다는 심리적인 압박을 남성들이 특히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지금은 여성도 비슷한 것 같지만 말이다. 누구나 꿈은 꾸지만 현실 속에서 일탈을 실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날의 분위기>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비록 일탈을 주체적으로 실현하지는 않을지언정 우연한 계기로 일탈하고 그 일탈이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좋았다. 그래서 비록 판타지적인 요소가 있지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날의 분위기>를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울타리를 벗어나는 수정의 일탈 이야기로 느꼈다.
어떤 면에서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실제로 처음 받아 본 시나리오는 이야기 구조가 그런 식으로 설계돼 있었다. 부산에서 수정과 재현이 헤어지고 난 뒤로는 재현이 나오는 장면은 마지막 두 사람이 재회하는 장면뿐이었으니까.

서울로 복귀한 뒤로는 수정에 더 집중하는 이야기였나 보다.
원래는 그랬다. 그래서 부산과 서울의 이야기 결이 달라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는 게 수정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일반적인 대중영화에는 적합한 방식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로맨틱 코미디가 멜로로 바뀌는 구조이기도 하니까. 사실 그 지점은 아직도 조금 의구심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영화의 결이 조금 달라지는 게 <그날의 분위기>가 차별화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평들을 살펴 보면 <그날의 분위기>가 로맨틱 코미디 치고는 칙칙하다는 평도 있더라. 연출가의 입장에서 그런 부분을 조율하는 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로 100% 가기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수정과 재현의 관계의 역사가 너무 짧아 도와줄 주변 인물이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부산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을 누군가 서울에서 전화로 도와줄 수도 없지 않나. 조력자도 없는데다가 인물들의 역사가 하루다 보니 정말 수많은 클리셰를 갖다 붙여도 인물들의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기가 쉽지가 않았다(웃음). 그리고 로드 무비 형식이다 보니 이야기 중간 부분이 두 사람의 감정이 가까워지는 장면으로 주를 이뤘다. 그래서 그 속에서 갈등과 사랑의 기폭이 크게 변하는 걸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전작 <낙타는 말했다>는 핸드헬드로 촬영했다. <그날의 분위기>를 장르적인 프레임 안에서 촬영한 건 어땠나. 처음 해 보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맞다.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모두 짜 놓고 그 안에 인물을 넣어 만든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틀에 맞춰 촬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촬영감독과 나는 인물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고 인물에 맞춰 프레임을 잡았다. 전작들에서 핸드헬드를 많이 쓴 이유는 인물을 보다 자유롭게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날의 분위기>는 굳이 핸드핸드로 촬영하지 않아도 인물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연출하는 입장에서 조금 더 좁아진 프레임이 답답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나.
그런 느낌은 있다. 사실 프레임을 조금 더 넓게 잡고 촬영하고 싶었다. 요즘 할리우드나 영국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 프레임을 조금 넓게 풀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식으로도 정서를 닮을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의 분위기>는 가을을 배경으로 전국의 공간들을 섭외해 놓았는데 예기치 않게 촬영을 한 달 정도 미루게 되면서 겨울이 됐다.

안 그래도 유연석이 가을 옷 입고 겨울에 촬영해 힘들었다고 하더라(웃음).
그래서 프레임을 넓게 가져가기엔 화면이 건조하고 앙상해지는 부분이 많았다(웃음). 사실 촬영에 대한 판단은 촬영 감독님에게 맡겼다. 연출적으로 보자면 컨티뉴이티를 설계할 때 공간이 많긴 하지만 자연 풍광과 실내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민이 있었다. 아무리 예쁠지라도 자연 풍광이 계속 이어지면 지겨워진다. 자연 풍광만 계속 찍어봐야 어차피 인물 중심으로 편집될 거였다. 그런데 인물이 둘 뿐이라 영화의 답답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을 많이 했다. 영화의 외연이 확장된 느낌을 주려 해서 영화의 리듬을 인위적으로 조절했다. 예를 들면, 인물이 정적이기 때문에 기차 달리는 인서트나 자동차 달리는 인서트처럼 동적인 장면들을 넣었다. 그리고 음악과 믹싱을 통해 자칫 답답해지거나 규모가 작은 영화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을 줄이려 했다. 그래서 음악을 찾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부터 대사도 재밌고 이야기도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는데 영화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적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영화의 스케일을 키울 수도 없지 않나.
<그날의 분위기>는 두 사람간의 일로 사건이 한정돼 만들기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연출하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도 그 부분인가.
영화의 전반적인 톤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날의 분위기>는 지배적인 사건이나 이미지, 지배적인 감정이 없다. 잠자리를 결심하는 부분도 보는 이에 따라 이해여부가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톤을 결정하기엔 부족한 부분이다. 결정적인 게 아무것도 없는 거다. 후반부에 수정이 재현에게 달려가는 건 결론일 뿐이지 않나. 게다가 <그날의 분위기>는 로맨틱코미디이긴 하지만 재현이 수정의 발을 만져주거나, 두 사람이 호텔에 가는 장면처럼 영화 중간 중간 멜로의 결이 많다. 그래서 톤을 일관되게 가져가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 그리고 톤의 균일성은 두 배우의 연기 톤과도 매칭이 되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크게 힘든 건 없었지만 두 배우가 연기에 대한 태도와 성격이 매우 달랐다. 문채원은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다. 디테일한 표정까지 집에서 정말 모든 것을 준비해 온다. 반면, 유연석은 현장에서 움직이면서 연기를 만드는 스타일이다. 현장에서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기 때문에 주위를 유심히 살핀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디렉팅을 해야 했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연기자를 조율하는 게 또 연출가의 몫이지 않나.
감독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다. 사실 두 사람의 연기 스타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유연석 같은 경우는 아침에 분장할 때부터 대기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촬영 전부터 현장의 느낌을 많이 전달하려 한 거다. 문채원은 준비를 워낙 많이 해 오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을 주려 했다. 현장에서는 문채원이 무엇을 준비해 왔는지를 알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만일 내가 생각한 모습과 차이가 있다면 그 부분을 어떻게 절충할지만 결정하면 됐다. 문채원의 생각을 흐트릴까봐 최대한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대화를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촬영도 2~3 테이크 안에 빠르게 끝났다.

두 사람의 극중 호흡이 좋아 보였다. 두 배우의 서로 다른 연기 스타일을 들으니 재밌다.
유연석은 성격 자체가 야생마 같은 기질이 있다. 현장에 나와서도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뭔가를 헤집고 직접 찾아 다니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것 같다. <건축학개론>과 <늑대소년>을 봤는데 유연석이 연기한 인물이 유연석인지 몰랐다. <올드보이>도 마찬가지다. 그처럼 이미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그날의 분위기>가 잘 돼서 유연석이 로코나 멜로의 간판 얼굴이 됐으면 한다(웃음). 그런데 주변에서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같은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하더라. 어쨌든 <그날의 분위기>는 유연석에게 비중도 크고 새로운 도전이었을 거다.
문채원은?
촬영할 때는 몰랐는데 편집하면서 보니 시퀀스 마다 문채원의 표정이 다르더라. 기차 탈 때의 얼굴과 무지개 식당에서의 얼굴, 그리고 회사 사무실에 있을 때의 얼굴이 정말 다른 사람 같아 신기했다. 로맨틱 코미디는 흔히 여배우의 표정이 르네 젤위거나 맥 라이언처럼 다양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문채원이 정말 괜히 로맨틱 코미디의 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게 문채원이 철두철미하게 준비해 온 게 아닐까 싶다. 머리를 신에 맞게 묶었다 풀었다 하는 것도 문채원이 계산해 온 거였다. 어쨌든 편집하면서 조금 놀랐다. 나뿐 아니라 촬영감독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 하더라.

코트 색깔도 문채원이 정한 건가?
코트 색깔에 대한 말이 정말 많았다. 영화의 80분이 부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수정의 의상이 단벌이라 선택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의상팀의 일이 적었겠다(웃음).
아니다. 한 벌로 승부를 내야 해서 오히려 더 어려웠다. 문채원과 의상실장이 함께 결정했다. 문채원이 편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성과 관련된 원나잇을 소재로 한 영화다 보니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이야기의 톤 자체가 원나잇을 부각시켜 찍을 수 없는 영화다. 그랬다면 아주 다른 영화가 됐을 거다. 수정이의 캐릭터에 맞지도 않고. 그래서 호텔 장면도 사실 코믹함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엽고 통통 튀는 캐릭터의 매력으로 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원나잇이라는 발칙한 소재를 사용했는데도 일반적인 로맨틱코미디에 그쳤다는 의견도 있더라.
<그날의 분위기>에서 ‘원나잇’은 일탈이라는 하나의 상징성만 가지고 있을 뿐 담론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루지는 않았다. 원나잇을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리얼리티가 있어야 할 거다. 감동이 크지는 않아도 마치 내 이야기 같고 내 주변 사람의 이야기 같은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사실성에 기반해야 한다. 그런데 <그날의 분위기>는 기본적으로 판타지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에 원나잇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성격의 영화가 아니다. 그랬다면 영화가 이상해졌을 거다.

당신이 일탈한 경험 중 한 가지를 말해 달라.
늘 일탈을 꿈꾼다. 못해서 문제다(웃음). 일탈의 기준이 뭘까? 일상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결정들? 영화처럼 하룻밤의 로맨스가 일탈이 될 수 있을 거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속해 있는 관계들로부터 과감하게 떠나는 것도 일탈이겠지. 영화 만드는 걸 너무 좋아하지만 영화를 그만 두면 어떨까, 2~3년 동안 어딘가로 떠나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은 늘 한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있는 거다. 그런데 아마 실행 못 할 거다(웃음). 그런데 원나잇이라고 말하면 거부반응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꿈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90세에 가까운 악단 할아버지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하룻밤 로맨스라고 말한 게 인상 깊었다. 원나잇이라는 게 꼭 잠자리를 의미하는 건 아니지 않나. 잊을 수 없는 하룻밤의 로맨스 같은 게 있을 거다. 그런데 공간이 주는 매력이 큰 것 같다. 이런 도심에서의 하룻밤 로맨스와 일상에서 벗어난 공간에서의 로맨스는 또 다르지 않나.

수정 친구들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본인이 쓴 건가.
아니다. 처음 받은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였다. 사실 각색하면서 친구들의 대화를 더 많이 추가했는데 편집에서 2/3만 남기고 모두 날렸다.

여자들끼리 충분히 나눌 법한 대화라서 재밌었다.
작가가 여성분이다. 내가 어떻게 그런 대사를 쓸 수 있었겠나(웃음).

그리고 친구들이 수정에게 계속해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마치 수정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더라.
너무 멋있게 해석한다(웃음).

그런 의도의 대사가 아니었나(웃음).
물론 우리의 의도는 그런 거지만 대사가 대부분 편집이 됐는데도 그런 부분이 전달이 됐다니 신기하다(웃음).
‘흔들릴 땐 첫 마음이 끌리는 대로’ 라는 대사는 본인이 쓴 건가?
각색 작가가 쓴 대사다.

영화에 대한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나.
영화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매번 고민한다. <그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나서 영화에 대한 태도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그게 아마 내가 영화를 하는 이유와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출판사 친구분이 영화를 그만둬도 괜찮지 않겠냐고 말할 정도면 혹시 영화 하면서 고민을 많이 한 건 아닌가.
그런 것 보다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는 걸 아니까 친구가 그런 말을 한 걸 거다. 돈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한 적은 없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영화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심히 하게 되더라. 무엇이 됐든 영화만큼 열심히 할 것 같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 한 편을 만드는 데도 이렇게 고생할 정도로 영화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거다. 그래서 좋다. 어렵기 때문에 더 노력하고 배우고 경험하고 시도해 봐야 하는 게 많다. 할 게 많아서 지루하지 않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요즘 정말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사실 <그날의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는 다음 작품은 남성적이거나 드라마가 센 영화가 하고 싶었다. 섬세한 결을 가진 이야기를 한 번 해 봤으니 굵직굵직하게 뻗어 나가는 영화가 하고 싶었다. 그런데 최근 <인턴>을 보고 나니 또 다른 생각이 들더라. <인턴>은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이야기 구조다. 로버트 드 니로가 뭔가 크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할 것 같은데도 옆에서 주인공을 쓰다듬어 주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도 굉장히 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았다. 그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왜 사람들이 그토록 <인턴>을 좋아했는지를 살펴보니 요즘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답하라 1988’도 비슷한 맥락에서 인기를 얻은 것 같다.
자신들을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나. 정부가 해 주는 것도, 지인들이 해 주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인턴>과 같은 영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낙타는 말했다>를 봤다면 알겠지만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냉소적이다. <낙타는 말했다> 이후 쓴 작품들도 모두 조금 차가운 성격의 이야기다. 그런데 <인턴>을 보고 나서는 이야기가 따뜻하고 차갑고의 문제를 떠나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케일이 거대해서 예술적으로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감독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인턴>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로맨스도 다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토대로 한 드라마나 로맨스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최근 가장 행복했던 일이 무엇인가.
후반작업을 마치고 부모님을 만나 뵈러 잠시 시골에 갔다. 부모님이 연세가 많다. 이제 90세를 바라보고 계신데 영화가 하나 나온다고 하니 안심하시더라. 내가 그나마 밥은 굶지 않겠구나, 싶으신 거지(웃음). 막내 아들이거든. 부모님이 조금 안심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좋았다.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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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김재윤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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