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건 자유와 여자, 싫어하는 건 모든 종류의 규율이라고 온 몸으로 외쳐대는 팡팡이란 청년은 얼핏 배우 뱅상 페레와 참 잘 어울린다. <인도차이나>나 <여왕 마고> 같은 유명한 전작들에서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이 어딘가 로맨틱한 몽상가의 냄새를 풍겼던 탓일까?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보헤미안을 연기한 프랑스 배우. 사실 촌티 나는 기자가 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종의 선입견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수트 앞 포켓을 장식한 장미꽃, (인터뷰 도중 난데없이 등장하는) 와인글라스, 손목의 반동을 일일이 이용한 풍부한 제스추어 같은 것들. 그렇다. 만화를 너무 본 것이다.
농담이었고(정말?), 서울 모 호텔의 객실 안에서 은밀히―였으면 좋겠지만 통역분이 계셨다―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접한 뱅상 페레는 조금은 철딱서니 없는 주인공 팡팡과는 다른 40대 초반 남성으로서의 원숙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헐리우드에서 내게 맡겨진 역할은 여자나 후리는 종마가 대부분이었다”고 태연히 말해버리는 등 솔직한 면모들이며 다분히 로맨틱해 보이는 기질은 스크린 모습 그대로. 한편 한국 식당을 정기적으로(!) 찾을 정도로 비빔밥과 불고기를 사랑한다는 제라르 크라직 감독은 다소 무서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질문 하나 하나에 친절하고 성실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팡팡 튤립>에 대한 매체의 평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외려 내 의견을 묻는 통에 잠시 기자를 당황시키긴 했지만. 배우와 감독, 그리고 기자 사이에 오고간 질문과 답변들을 아래 간추려 소개한다.
인터뷰- 뱅상 페레
Q: 아니, 이렇게 가까이 붙어 앉다니 두근거리게시리(웃음)... 아시아에서는 한국 외에 또 어떤 어떤 나라들을 방문했나?
뱅상 페레: 타이완, 말레이시아, 일본...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데다 아시아 문화는 생소한 만큼 더 큰 즐거움을 준다. 영화광이라서 집에 DVD와 비디오 라이브러리를 마련해뒀는데 아시아 영화도 그 중 꽤 된다.
Q: 시시한 질문이지만 그 중 어느 나라 여성이 가장 예쁘던가?
뱅상 페레: (진심으로 난감하다는 듯) 대답하기 참으로 힘든 질문이다. 미인은 태도, 말씨, 성품 그 외 모든 요인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 한 가지 더. 한국 여성들도 아주 예쁘다고 느꼈다.
Q: 이전에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 걸로 안다.
페레: 한국 방문은 2번째다. 10년 전 <인도차이나>를 소개하기 위해 들렀는데 그 때 한국 두루 여행하고 아주 멋진 나라라고 느꼈다. (구체적으로 어디를 여행했냐는 질문에) 어, 화산이 있는 섬이었는데(지명은 기억나지 않는 모양). 바다가 아주 훌륭했고 프랑스와 너무 다른 식사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라틴 민족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도 인상적이었고. 아무래도 한국인은 향락주의자인 것 같다(웃음).
Q: 한국 영화 중 특별히 재미있었던 작품은?
뱅상 페레: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봤다. <취화선>은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 영화 중 하나고, 임권택 감독도 이미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본다. 참, 이번 서울프랑스영화제를 계기로 보게 된 전수일 감독의 <파괴>도 흥미로웠다.
Q: 헐리우드에도 진출했는데, 프랑스와 미국의 제작시스템 차이와 앞으로의 진출 계획이 궁금하다.
뱅상 페레: 당분간 프랑스 영화에 집중하고 싶다고 에이전트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한 3년 전부터는 자국 영화에만 출연하는 중. 아직은 프랑스 안에서 성장해나가야 할 부분이 많다고 느낀다. 시스템 자체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고, 오히려 정신적 문화적 차이가 더 크다. 사고 자체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 미국에서 내가 내 자리를 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건 사실이다. 10개, 20개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받았어도 그 역할이라는 게 천편일률적이기 그지없었고. 한 마디로 말해 ‘여자를 만족시키는 종마’ 뭐 그런 거다. 시나리오를 보기만 해도 아주 질려버려서 결국 다 접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원하는 감독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고, 또 마음에 드는 역할이 주어진다면 헐리우드에서 작업하는 것 자체에 어떤 거부감도 없다. 단지 미국 영화나 미국인들의 기질―지나치게 열렬해 보이는 애국심이라든지―같은 것이 나와는 너무 맞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맞는 역을 만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Q: 슬슬 이번에 소개하는 <팡팡 튤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함께 주연을 맡은 페넬로페 크루즈와의 호흡은 어땠는가?
뱅상 페레: 우린 10년 전에 이미 함께 공연한 적이 있다. 당시엔 둘 다 조연이었고, 페넬로페는 내 동생을 연기했다. 역할 그대로 우린 유쾌하고 친근한 친남매 같은 사이로 지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 때의 느낌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특히 키스씬에서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웃음). 서로의 프랑스인적 기질, 스페인인 특유의 기질을 조롱하기도 하면서 시종일관 재미있게 지냈다. (그 '10년 전 영화'의 제목이 궁금한데, 라는 질문에) 아, 결국 개봉은 안됐고 비디오로 바로 출시됐다.
Q: <팡팡튤립>의 액션씬은 모두 직접 했는가?
뱅상 페레: 스턴트 없이 모든 씬을 직접 연기했다. 원래 펜싱 등 운동을 즐겨왔던 터라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인 액션영화와는 다르게 전투장면에 코믹하고 재미있는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서커스, 쿵푸, 트럼플린, 공중곡예 줄타기 등의 기초수업을 이수했다. 영화에 직접적인 곡예장면은 없지만, 그 덕에 서커스의 긴장감만은 은연중 배어 나올 수 있게 된 것 같다. 팡팡이란 캐릭터는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규율이나 제한, 질서 같은 가치를 배격하는 인물이므로 그런 자유로운 기질을 제스추어를 통해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Q: 칸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는데 사실 평단의 반응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걸로 안다. 거기에 대한 느낌은?
뱅상 페레: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대해 무척 만족하고 있다. 뭐 지금 프랑스에서 잘 나가고 있고, 앞으로 50여 개국에 개봉될 예정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칸 영화제에 관련해서라면 솔직히 아쉬움이 있다.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팡팡 튤립>은 어쨌든 오락영화고, 그런 점에서 성격이 영화제의 다른 영화들과는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 연령대의 관객이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이 개막작으로 선정됨으로 해서 영화제에 축제적인 성격을 좀더 부여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참, 영화를 선정한 칸 측의 변에 따르면 칸 영화제의 진지한 성격 자체를 좀 놀려보자는 의도도 있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전쟁의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니 <팡팡 튤립>이 내재하고 있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가치가 좀더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도 꽤 적절했던 것 같고. 누가 그러는데 “전쟁은 권력층과 비권력층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라고 하더라.
Q: 또 뜬금 없는 질문 하나. 종류를 불문하고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뱅상 페레: 전쟁,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 독재자, 억압, 기아... 그런 종류의 비참함들. (여기서 기자, 너무 정답이라 다소 실망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Q: 그렇게 말하니 팡팡과 더 닮아 보인다.
뱅상 페레: 진짜 닮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보인다니 기쁘다. 민요와 전설, 소설, 영화를 통해 프랑스인의 정서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팡팡을 내가 연기한 게 행복하고 즐거웠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해외에 소개하면서 아쉬운 점 하나가 또 떠오른다.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가치 중 하나가 아름답고 치밀하게 상징화된 풍부한 언어인데, 이게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면 100퍼센트 전달되기 힘들 것 같다. 유머 자체도 다분히 프랑스식이고.
Q: 차기작 계획이 궁금하다.
10월에 소피 마르소와 호흡을 맞춘 로맨틱 코미디가 프랑스에서 개봉한다. 2002년에 처음으로 감독 데뷔했는데, 현재 감독으로서의 2번째 영화를 내놓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 중이기도 하다. 배우도 배우지만 연출가로서의 위치를 가지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
인터뷰- 제라르 크라직
Q: 한국에 온 소감은? 아시아를 자주 방문하는가?
제라르 크라직: 촬영을 위해 얼마 전 일본을 방문했고, 그 외에는 오래 전 동남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특별히 큰 관심을 갖고 있음에도 아직 그리 잘 알지는 못한다. 이번에도 방문하자마자 스케줄 투성이여서 관광도 못하고(애석한 표정)... 오늘 오전에 한 시간 반정도 시간을 내 급히 시내를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한 달에 한 번은 집 근처 한국 식당에서 주기적으로 식사를 한다. 비빔밥이랑 불고기를 제일 좋아한다.
Q: 감독한 <와사비>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히로스에 료코는 우리 나라에서도 인기가 높다. 료코와의 작업은 어땠나?
제라르 크라직: 히로스에 료코는 불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 우리로서도 큰 모험이었지만, 그녀의 경우 모든 대사 텍스트를 음성학적으로 외우는 고생을 감행해야 했다. 정말로 노력하는 배우다. 세트에서 보면 마치 실제로 불어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팡팡 튤립>의 페넬로페 크루즈도 프랑스인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연기로서 세계를 해석해낸다는 점에서 서로 꼭 닮아있는 두 여배우를 만나면서 영화란 각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강력한 도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Q: 칸 개막작으로 상영됐는데. 평단과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에 대한 소감은?
제라르 크라직: 칸 영화제란 굉장히 특별한 시공간이다. 평론의 경우도 대부분 영화계에 있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쓰게 된다. 그리고 영화제에서는, 특히 프랑스에서는 평론이 실제의 영화와 동떨어진 부분이 많다. 패싸움도 많고. 예를 들어 제작자 뤽 베송을 좋아하는 인물, 나를 싫어하는 인물, 혹은 좋아하는 인물... 그런 식이다. 평과 작품 사이에는 늘 갭이 있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거의 만장일치로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뭐 뭔가 가르치려드는 걸작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말 즐거웠다는 소감들을 들려주었고, 우리로서도 그게 의도한 바였기 때문에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영화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시각에는 어떤 ‘필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해두고 싶다. 그나저나 영화 봤나? 어떻던가? (갑자기 기자에게 기습질문. “즐거운 엔터테인먼트라고 느꼈다. 다만 영화의 대주제인 ‘사랑’―아델린과 팡팡의―에 있어서는 좀더 차근한 묘사가 필요했을 것 같다”는 답변을 들려주니 고개를 끄덕이며) 코미디 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오락영화라는 틀을 유지하려는 선택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취재: 임지은
촬영: 이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