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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가 발로 뛰는 형사 VS 문서 신봉형 형사의 대립과 융화―정말이지 으르렁대던 그들이 서로를 닮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최고의 서글픈 블랙코미디 중 하나가 아닌가―를 보여주었다면 후자는 느물느물 능숙하면서 마음씀 깊은 선배와 차돌 같은 패기 덩어리 후배의 피보다 진해 보이는 우정으로 훈훈한 웃음을 이끌어낸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뒤쫓는 스릴과 형사들의 일상을 능숙하게 배합해 낸 <와일드카드>를 먼저 관람하는 특권을 누린 기자들은 너도나도 “영화 잘빠졌다(?)”는 칭찬들을 내놓았다. 언론의 호평과 시사회를 관람한 사람들의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이 주 개봉을 앞둔 <와일드카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치는 점차 높아지는 분위기.
그래서 만났다. 누굴? <와일드카드>의 김유진 감독과 이만희 작가를. 누가? 무비스트를 비롯한 몇몇 매체의 기자들이. 어디서? 서울 인사동의 한 밥(겸 술)집에서. 실은 좌담회를 빙자한 단출한 술자리다. (따라서 ‘인터뷰’와는 다르게 루즈할 수밖에 없다는 점 이해를 바란다. 사실 이것은 의도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질문들과 개인적인 궁금증들, 허허실실 농담을 통한 친목다지기 등 풍성한 안주들이 맛난 술과 함께 한 그 자리를 잠시 공개한다.
1. <와일드 카드> 개봉을 앞두고
김유진 감독이 밥(겸 술)집으로 들어선 것은 7시 반을 좀 넘긴 시간. 곧 이어 이만희 작가도 모습을 드러냈다. 오징어 불고기에 파전에 알탕, 안주에 곁들여 일단 한 잔씩 쭈욱. 궁금증은 기자의 지병. 술잔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질문이 쏟아진다.
Q: <와일드 카드> 재밌었다. 감독님은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감독인데, 그러고보니 학창시절에 <단지 그대가...>와 <금홍아 금홍아>를 감명 깊게 봤던 기억이 난다.
김유진 감독: 재미없는 거만 골라서 봤구만.
Q: <살인의 추억>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아무래도 형사 버디물이라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도 하고. 게다가 곧 <매트릭스>도 개봉 아닌가. 걱정은 안되나?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김유진 감독: 매트릭스도 걱정되고.. 사스도 걱정되고.... (일동 웃음) 뭐 스스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만족스럽다.
이만희 작가: 시나리오를 쓴 입장에서 현재의 결과물에 만족한다. 의도한 대로 잘 연출된 것 같다.
2. 감독과 작가, 와일드한 우정
올해 54세의 김유진 감독과 50세의 이만희 작가는 절친해 보인다. 아니, 정말 막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허물이 없어보인다기보다는 ‘퍽 잘 어울린다’는 느낌. 김감독과 이 작가가 처음 호흡을 맞춘 것은 전도연과 박신양이 주연을 맡은 <약속>이었다. <약속>은 전국적으로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 하기사 첫만남부터 대박이니 두 사람의 인연, 좋은 것일 수밖에 없을 듯도 하다. 온화하면서도 강단이 있어 보이는 성품으로도 그렇지만. 그러고 보면 이것은 또 하나의 ‘최강 짝패’인가?
Q: 두 분이 절친해 보인다. 일 관계 아니라도 자주 만나고 그러시는 편?
김유진 감독: 한참 붙어다닐 땐 아주 자주 보는 편이지만, 아닐 땐 잊고 산다(웃음).
이만희 작가: 내가 술을 못해서...
김유진 감독: 나랑 있으면 괴로워하지.
Q: 기획은 누가 먼저 한 건가? 감독인가, 작가인가?
김유진 감독: 옆구리 쿡쿡 찌르는 거야 내 담당이지.
Q: <약속>에서 처음 만난 걸로 알고 있다. 약속이 시쳇말로 ‘터졌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 같긴 하지만.
김유진 감독: 뭐.... 그 이전에 워낙 죽을 쒀놔서. 10년 이상 만든 작품들 다 합쳐도 한 10만 되나?
Q: 서로의 강점과 단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귀띔 좀 부탁한다. 여기 아부조로 술 한 잔 더 받으시고.
이만희 작가: 드라마를 깊이 아는 감독이다. 김유진 감독은. 시나리오 과정에서 진짜 이건 너무 오버다 싶을 정도로 꼬치꼬치 시시콜콜 주문을 해대는데, 그럴 땐 짜증도 나지만. 그렇지만 한 화두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 많고, 함께 더 나아갈 수 있는 여지도 많고. 그야 어떨 땐 오바되기도 하지만. (쉽게 진의를 알 수 없는 고단수적 진술. 화술은 필력과 비례한단 말인가?)
김유진 감독: 난 시나리오 작업 끝나면 영화 끝난 것 같다. 찍는 건 기능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쓰는 게 어렵지.
Q: 그 말을 듣고 보니 이만희 작가의 고충이 짐작이 간다. 얼마나 볶으셨을라나(웃음).
이만희 작가: (어깨 으쓱) 촬영 중 있게 마련인 시행착오나 오차, 그런 것들을 시나리오 과정에서 마무리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유진 감독: 사실 원작 시나리오에서 잘린 부분도 많지. 그러나 쫙 읽고 영화를 보면, 어쨌든 다 들어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그러니까 누락이나 왜곡은 그저 환경적인 변수 때문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시나리오 읽고 영화 보면 아마 무척 재밌을 거다.
이만희 작가: 예를 들어 한 상황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올 수 있다면, 두 경우를 다 써본다. 그러고 나서 한 가지를 선택해서 스토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완전히 알고 풀어놓는, 이를테면 '수월하게 갖고 노는' 느낌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3. 검문 있겠습니다, <와일드카드>
Q: 솔직히, 한채영은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예고편이나 광고 봤을 때는 주인공급이고 정진영이 조연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일드카드> 세 번 본 기자가 재어본 바에 따르면 한채영의 대사는 영화 전체를 합쳐 토탈 5분이라고 하더라. 원래 분량이 많았다가 줄어든 건가? 진상을 알고 싶다.
김유진 감독: 원래 그 정도 비중이었고, 사실은 지명도 없는 신인이 할 몫이었다. 왜냐하면 대스타가 하건, 막 영화 시작한 신인이 하건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는 역이기 때문에. 한채영은 스타고, 그래서 홍보 과정에서 그 몫이 실제보다 부풀려진 건 있다. 뭐, 왜곡이 좀 있긴 하지만 양동근과 한채영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상황 자체는 참 예쁘지 않은가.
이만희 작가: 원래 생각에는 양동근과 한채영이 결혼해 또 극중 정진영 부부처럼 살아가는, 모종의 후일담 같은 것. 그런 부분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결국은 뺐지만.
Q: 왜 하필 퍽치기인가?
김유진 감독: 옛날엔 강도도 순진했다. 복면 쓰고 “손들어! 안 들면 찌른다” 뭐 이런 식이었지. 그런데 요즘은 틀리다. 사람 죽여놓고 그 때서야 지갑 뒤지는 세상이다. 당하는 사람이 당하는지 모르고 죽음을 맞게 되는 퍽치기라는 형태의 범죄에 분노를 느꼈다. <와일드카드>의 4인조 강도에게 성격적인 측면들을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나쁜 놈’으로 그린 것도 그런 측면이 있다. 자기가 가한 행위에 대한 가책도 없고, 그 결과가 많은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에 대해 무감한 인간.
Q: 양동근이 총을 들고 강도에게 경고를 하면서 “칼버려! 제발 버리지 말아라” 하는 식으로 이중적인 심경을 표출하는 부분 인상적이었다. 실제 형사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같이 밤새 술도 많이 드시고.
김유진 감독: 칼을 버리라고 경고하면서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분노. 일반인도 가지고 있는 심경 아닐까. 형사를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 형사들이랑 같이 술을 마시고 영화 소재가 될 만한 ‘꺼리’를 듣다 보면 유독 폴폴 냄새가 나는 게 있더라.
Q: 처음에 방제수 역에 양동근이 물망에 올랐을 때 못생겼다고 싫어했다는 말이 있던데. 그리고 나서 나중에 <네 멋대로... >보고는 스탭들한테 “쟤는 왜 안 소개했냐”고 호통을 쳤다는 비하인드를 들었다. 스탭들이 퍽 억울했겠다.
김유진 감독: 못생겼다기보다는... 캐스팅 당시에 <수취인 불명>과 시트콤을 봤었는데 그 때만 해도 애가 어렸다. 저 어린애가 이 역을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게 사실이다. 연기는 잘 하는데 말이지. 후에 성장한 모습을 보고 안심했던 거고.
4. 걸출한 작가, 감독. 그들에게도 일상은 있다.
이만희 작가: 난 컴맹이다. 학교에 강의 나가는데(동덕여대 문예창작과) e-mail 주소 없는 선생은 나뿐이더라. 원고도 펜으로 직접 쓴다. (그러니까 그.. 시나리오를 손으로 다? 좌중 경악을 금치 못하는)
Q: 대체 무슨 낙으로 글을 쓰시는 건가? 술도 잘 안드시고...
김유진 감독: (폭로하듯) 이만희 작가는 고스톱을 좋아한다. (“그럼 감독님은 여가 시간에 뭘 하면서 보내시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면서 보낸다. 멍하게. 일할 땐 일하는 둥 마는 둥. 놀땐 노는 둥 마는 둥....
5. 나는 대한민국의 중견감독
Q: 김유진 감독은 1986년 <영웅연가>로 입봉해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이다. 헐리우드의 경우와 달리 중견감독이 거의 설자리가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인데. 사실 젊은 신예들이 스케일이 큰 영화의 연출을 맡아 실패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김유진 감독: 내 경우에 직접 대입해 보면 이해가 쉽다. 스스로 “내가 그 나이 때 그 큰 스케일의 영화를 맡았다면 할 수 있었을까?” 질문을 던져본다. 답은 못한다는 거다. 영화를 감독한다는 것은 곧 컨트롤이다. 각종 환경을 제어하고 사람을 만나고, 컨트롤하는. 사람 대하는 거 하나만 갖고도 힘들다. 세 편쯤 찍어보니까 그 때 여유가 좀 생기더라. 농도 하고. 사람도 챙기고.
Q: 작업 스타일은 어떤가?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온화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웃음).
김유진 감독: 나는 원래가 온화한 스타일이다. 게다가 나이 먹을수록 소리지를 일이 점점 없어진다. 경험적으로 ‘해봤자 안된다’는 것이 이미 학습되어 있으니까. 포기 잘한다는 거, 그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아, 영화 감독. 이거 사람이 할 짓이 못돼. 연출부 애들한테 “마누라는 꼭 국민학교 교사 기타 등등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칠 때도 있다. 그렇지만 회사 다니는 양반들처럼 짤릴까 싶어 떨 필요는 없다는 게 장점이겠지. 우린 늘 IMF니까.
Q: 차기작은? 이미 구상해 둔 게 있는가?
김유진 감독: 인제 하나 완성해놨으니 또 둘이 가서 한 6개월 궁상을 떨면 “형사 얘기 한 번 할까?” 이 한 마디 나오는 거지. (일동 폭소)
Q: 참 궁금한 점 하나. <약속> 이후 러브콜이 많았을 텐데 차기작까지 공백이 길었다. 쉬어가는 기분으로 한 작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김유진 감독: 그거 성격이다. 잘못됐을 때의 후유증을 무척 고려하는 편이다. 사실 감독이 영화 한 편 잘못 만들면 그야말로 여러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무서워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Q: 전작들부터 <와일드카드>까지 늘 사회에 대한 관심에 토대를 둔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차기작 역시 사회성을 가미한 작품이 될 예정인가?
김유진 감독: 허공에 붕 떠 있는 얘기는 나부터가 재미없다. 할 것도 없고. 그러니 뭐, 또 바닥으로 내려가야지.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혹은 more alcohol을 부르짖는 몸) 때문에 좌담 멤버는 모두 인근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곳에서도 일행은 제일 좋은 안주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 아쉽게 자리를 파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여 와일드한 영화의 와일드한 취중진담(또는 한담, 혹은 만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는 이야기.
취재: 임지은, 서대원
촬영: 이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