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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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산에서 용산까지 두 시간을 달려온 홍진훤 감독은 자신을 “할 일 없어서 집회나 구경 다니던 덕후”라고 낮춰 소개했지만, 그가 20년이나 품어온 이야기는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다큐멘터리 <오, 발렌타인>은 2004년 현대중공업에서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박일수 열사의 투쟁과 그 이후를 기억하는 두 인물의 삶을 따라간다. 화천 산골의 시인 조성웅과 창녕 우포늪의 민중가수 우창수를 인터뷰이로 세워, 자본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는 그들의 독자적인 시선을 담아낸다. 홍 감독은 전작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풍경을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하나 된 노동자 계급을 꿈꿨던 이들의 ‘패배 이후’를 응시한다. “우리는 실패가 아닌 패배를 했을 뿐, 다시 싸워보자는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는 홍 감독. <오, 발렌타인>은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세계를 향해 멈추지 않는 처절한 ‘짝사랑’에 관한 기록이라 말한다.
◆ 구조적 모순의 뿌리를 찾아 20년 전 ‘박일수’를 소환하다
홍 감독에게 2004년은 '하나 된 노동자'라는 이념이 균열을 일으킨 기점이었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밀어내는 현장을 목격하며 그는 우리가 믿어온 연대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비정규직 차별이 일상이 되고 노동 혐오가 알고리즘처럼 번지는 현실에서 그는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가 우리가 겪는 극단적 경쟁의 출발지가 어디였는지 질문을 던진다.
제목 ‘오, 발렌타인’에 담긴 의미는.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아주 명쾌하고 이념적인 가제가 있었다. 박일수 열사가 공장 내에서 조직한 하청 노동자 모임의 이름인 '한마음'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다루는 이 영화가 결국 열사가 원했던 '하나 된 조직'이라는 지향점을 담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뷰이인 두 분(조성웅, 우창수)을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박일수 열사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행위는 단순한 혁명이나 이념만으로는 다 규정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것은 이 세계를 향한 세 분의 지독한 '짝사랑'에 가까웠다. 문득 열사가 분신한 2월 14일을 다시 생각해보니, 그날은 성자 발렌티오를 기리는 축일(발렌타인 데이)과 같은 '성자의 날'이기도 하더라. 그래서 이 영화를 딱딱한 운동의 기록이 아닌, 하나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서 전달해보고 싶었다. 제목을 전형적인 투쟁 영화가 아닌 사랑 영화에 가깝게 지은 이유다. 비극적인 죽음조차 이 세계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처절한 고백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시각 예술 전반에서 활동해왔다. 20년 전의 ‘박일수 열사’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하게 된 계기는.
노동 운동 내의 분열과 혐오가 심화되는 현실을 목격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번지는 극단적인 경쟁의 뿌리를 찾아보니 결국 '비정규직화'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2021년 영화 <멜팅 아이스크림>을 우연한 계기로 만들게 되었는데, 작업해보니 영화라는 형식이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꽤 적당한 매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성웅 시인(당시 하청노동조합 위원장)과 우창수 가수를 인터뷰이로 선택해 찾아가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박일수 열사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분이 조성웅 위원장이었다. 수소문 끝에 그가 산에 들어가 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현실이 너무나 흥미로워 꼭 만나야겠다 싶었다. 우창수 가수 역시 개인적으로는 몰라도 그의 노래를 참 좋아했다. 그의 앨범에는 열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했는데, 지금은 늪에서 아이들과 동요를 만든다고 하더라. 두 뜨거운 혁명가가 산과 늪에서 ‘예술’을 하며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 예술가로서 내게도 큰 질문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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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이 아닌 ‘패배자’로서의 솔직한 기록
홍 감독은 투쟁을 승리와 영웅담의 연대기로 박제하는 것에 반대한다.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 운동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종료되기 때문이다. 그는 두 주인공에게 "영웅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그들이 느낀 패배감과 현재의 소박한 일상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실패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를 냉정하게 파악하는 정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두 분의 반응은 어떠했나.
우창수 선생님은 과거 집회 현장에서 함께했던 사진 한 장 덕분에 환대해주셨다. 반면 조성웅 선생님은 처음엔 거절하셨다. 본인에게 박일수 열사 투쟁은 패배한 투쟁인 데다, 허명으로 살기 싫어 산속으로 들어온 본인이 갑자기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신 듯하다. 밤새 술을 마시며 설득했다. 당신들이 얼마나 잘 싸웠는지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 영화의 형식도 이상하고 혼란스러울 것이며 절대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허락받을 수 있었다.
당신은 왜 이토록 '패배'라는 단어를 강조하나.
어떤 운동이든 결국엔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운동이란 종료될 수 없고, 과거화될 수 없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옥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그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배와 실패는 다른 것 같다. 패배에는 다시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실패가 아닌 패배를 했을 뿐이니, 다시 싸워보자는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로부터 받은 인상적인 피드백이 있다면.
‘영화가 너무 이상해서 누구라도 붙잡고 밤새도록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반응이다. 파편처럼 들어온 감각과 정보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누군가와 끊임없이 논의하고 싶은 상태를 만드는 것이 <오, 발렌타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가치를 완결 짓고 종료하는 것보다, 종료되지 않은 채 계속 말을 거는 상태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 흔들바위와 고래, 이미지로 쓴 이데올로기 투쟁기
흔들바위는 홍 감독이 진단하는 현대 예술과 운동의 자화상이다.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 위에서 안전하게 바위를 흔드는 행위는, 실질적인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위험해 보이는 이미지'만 전시하는 행태와 같다. 고래와 산천어 축제 이미지 역시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가공된 풍경이다. 그는 관객이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어 눈물 흘리기보다, 이질적인 이미지들과 충돌하며 자신의 인식 체계를 의심하고 각성하길 원한다.
설악산 흔들바위나 울산의 고래 영상 등 이질적인 오브제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든 오브제는 명확한 설계 하에 삽입되었지만, 관객이 정답을 맞히듯 이해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설악산 흔들바위다. 사람들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 안에서만 안심하고 바위를 흔든다. 이는 실질적인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안전함 위에서 '위험해 보이는 이미지'만을 전시하는 이 시대의 운동과 예술의 상태를 상징한다. 울산에서 쇼를 하는 돌고래나 화천의 산천어 축제 이미지도 같은 맥락이다.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기록할 때 그 사람 자체를 찍는 것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두 주인공이 화천과 창녕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이미지들을 삽입하는 동시에, '혁명'이나 '사랑'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 얻은 스톡 이미지를 섞어 극강의 이질감을 주었다. 사진이 지닌 고유한 영속성과 영상이 가진 또 다른 결의 시간성이 타임라인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왜곡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오브제들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바깥' 혹은 '노동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나.
조성웅 씨는 "모든 곳이 전장이고 투쟁이다"라고 말한다. 타임라인 안에서 세 인물이 꿈꾼 혁명과 이미지들이 지들끼리 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복잡다단하게 구성했다. 특히 영속성이 거세된 파편 같은 스톡 이미지들은 관객의 시간 감각을 의도적으로 교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들이 타임라인 안에서 '지들끼리' 격렬하게 싸우는 과정을 통해, 관객이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관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현재 상태를 발견하고 각성하기를 바랐다. 결국 예술과 운동의 역할은 자본주의가 규정한 사회적 틀 자체를 계속해서 흔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인간의 접촉을 줄이고 세상을 가상화하는 지금의 방식이 정말 괜찮은지, 이미지의 부닥침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깥'을 향한 사유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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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의 경계 허물기, 그리고 3부작의 완성
홍 감독은 노동의 가치가 시장의 논리에 의해 등급 매겨지는 현실을 이데올로기 투쟁의 결과로 규정한다. 의사와 버스 기사, 혹은 육체 노동자와 예술 노동자의 가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변화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이 당연한 격차에 의문을 품는 것이 투쟁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엔딩 크레딧의 '위대한 노동의 역사'라는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나.
그 문구는 박일수 열사가 공장 내 하청 노동자 조직인 ‘한마음’ 활동을 하며 남긴 기록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는 노동의 카테고리를 나누고 그 가치의 등급을 매기는 행위 자체가 고정된 진리가 아닌, 치열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에서는 버스 기사의 월급이 의사보다 높기도 하듯, 노동의 가치는 사회적 합의와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매우 유동적인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노동의 격차는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패배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 있는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투쟁을 발견하는 일이다. 조성웅 씨의 말처럼 불평등한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냥 넘어갈 게 아니라,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나에게는 미술이나 영화 작업 역시 이미지 소비와 알고리즘에 익숙해진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거는 나의 ‘노동’인 셈이다. 자본주의가 규정한 사회적 틀을 흔들고, 인간의 접촉을 줄이는 가상화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이어가고자 하는 ‘위대한 노동’의 한 형태라고 믿는다.
<멜팅 아이스크림>, <오, 발렌타인>에 이어 ‘패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에는 어떤 내용을 담을 예정인가.
3부는 '집회의 마지막 풍경'을 다룰 예정이다. 투쟁이 활발한 시기에는 민중가요가 정말 중요했기에 처음엔 그 마지막을 담으려 했으나, 이제는 집회 자체로 생각이 확장되었다. 최근의 집회들을 보면 목적이나 형식이 달라지고 있다. 이른바 ‘K-민주주의’ 속에서 집회가 통제 가능한 장치가 되고 이미지화되는 시공간이 되는 것은, 기존과는 본질적으로 (집회의) 에너지가 달라지는 시기가 왔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집회 덕후로서 슬픈 마음도 들지만, 잘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기록해보려 한다.
현재 당신의 최근 최대 관심사는 무엇인가.
최대 관심사는 ‘이미지’ 그 자체다. 나는 이 세계가 가상과 실제가 중첩된 이미지라고 믿는 사람이며, 우리는 어쩌면 가상과 실제를 구분해서 사고하는 마지막 인류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를 해석하려면 이미지가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지 그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창작자로서 나의 과업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 작업은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세계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과 닮아 있다. 박일수 열사와 두 인터뷰이의 삶을 보며, 이념으로 규정되지 않는 이 세계에 대한 순수한 헌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은 동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기에, 설령 이 사랑이 당장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이 세계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사진제공. 시네마달
2026년 3월 10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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