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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야기, 귀감이 되고 희망을 전할 것” <조선인 여공의 노래> 이원식 감독
2024년 8월 14일 수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는 방적산업을 통해 대호황기를 맞았다. 이때 조선의 어린 소녀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낯선 일본 오사카의 방적공장으로 떠났다. 다큐멘터리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폭력과 시대의 피해자가 아닌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한 1세대 조선인 여공들의 삶과 그 증언을 담고 있다. 극영화 <누나>(2013) 이후 오랜만에 관객을 찾은 이원식 감독을 만났다. 차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삶을 마주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나간 그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정신력이, 힘들과 좌절하기 쉬운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거라고 말한다.

재일 1세대 여성 노동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나 이들의 삶을 담고자 한 까닭은.
2015년부터 일 때문에 일본을 왔다 갔다 하다가, 2017년쯤 (극 중에 나온) 하루키 중학교 근처를 가게 됐다. 붉은색 담벼락에 철로 된 십자가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어서, 중학교 담장에 왜 십자가가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중학교가 예전에는 방적 공장이었고, 당시 일하던 여공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담장 위에 철조망을 설치했다더라. 십자가라고 생각했던 막대가 사실은 철조망을 감기 위한 말뚝이었던 거지.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1910년대부터 조선인 여공이 일본에서 일했다는 걸 알게 됐다. 매스컴이나 학계가 주로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를 다루다 보니 이들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에 영화로 담아보고자 했다. 극적 드라마보다 사실을 전한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 다큐멘터리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영화적’으로 잘 만들고 싶은 마음에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4년 동안 기획서 작업을 했었다. (웃음) 마침내 2022년에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적으로 잘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급하다고 대충 찍고 대충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잘 정돈하고 정리해서 잘 보내 드리고 싶었다. 혼자 찍을 수도 있겠지만, 팀을 짜서 촬영하는 편이 더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있고, 또 증언자도 많이 찾아서 섭외할 수 있으니까. 영화라는 게 알다시피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제작비를 마련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팀을 꾸릴 수 있었다. 엽서를 제작해서 한 달 넘게 일본 각지에 뿌리며, 또 아는 사람의 사돈에 팔촌까지 연결해서 세 분의 증언자를 만나게 됐다.

잊힌 또 묻힌 역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연출적으로 중점을 둔 부분은.
특별히 연출적으로 무언가를 한 부분은 없다. 이번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이 이야기를 접하는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고 그들이 관심을 두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거였다. 증언과 기록을 내레이션으로 처리하거나, 관련 전문가가 나와서 설명한다면 관객이 거리감을 느낄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현장감이 있고 감정적으로 밀착하도록 재일교포 출신 배우들이 낭독하는 방식으로 갔다. 1세대 여공들의 후손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도 의미가 있겠더라.

극영화 <귀향>(2016), 다큐멘터리 <차별>(2023) 등에 출연한 강하나 배우를 비롯해 재일교포 배우들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은 건가.
‘달오름’이라고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극단이 있다. 일본인과 재일교포가 그 구성원으로 재일교포의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곤 하는 극단이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 출연한 분 중 극단의 단원인 분도 아닌 분도 있고, 강하나 씨는 객원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참여한 배우들은 자기들도 몰랐던 사실이라고, 할머니 세대의 증언을 읽고 울기도 했었다. 그래서 더욱더 마음을 담아서 낭독한 것 같다. 많은 분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로 고마움을 표했지만, 나는 재일교포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라는 생각했다.

주로 어느 자료를 기반으로 했는지.
기자이자 르포 작가인 김찬정 작가가 1980년대 쓴 ‘재일 한국인 백년사’를 주로 참고했다. 1세대 노동자의 기록과 증언이 담겨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내레이션 글을 썼다. 또 히구치 요이치 목사님이 쓴 안내 책자에 여공들이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어 수소문해서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원래 키시와다시에 부임한 목사님이었는데, 이 지역은 조선인 여공이 가장 많이 있던 곳이었다. 부임 후 조선인 여공이 핍박받고 열악한 환경에서 많이 죽은 것을 알고 그 역사를 홀로 정리해 왔다고 하더라. 수소문 끝에 그분이 남쪽 시마바라시로 부임한 걸 알았고, 전화를 드려 이런 영화를 찍고 있다고 전후 사정을 알렸다. 놀랍게도 나 같은 감독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라! 만났을 때 서로 너무 기뻐하며 좋아했었다. (웃음) 난 내가 모르는 부분을 해결해 주실 분을 찾았고, 그는 계속 고민하고 연구했던 부분을 알릴 기회를 얻은 거니 말이다. 함께 오사카부 주변 시들의 해안선을 따라 존재했던 수많은 공장의 남은 흔적을 밟아가며 필드워크 했다.

조선인 여공에게 직업을 알선하고 월급을 관리한 ‘상애회’는 일종의 브로커 같은 집단이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앞장서서 착취했다는 점은 비극이자, 숨기고 싶은 역사일 수 있는데 가감 없이 드러냈더라.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민감한 부분일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대체로 (일본은 악, 한국은 선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분명히 조선인과 잘 지내고 또 도와준 일본인도 많았을 거거든. 반면 상애회처럼 브로커가 되어 일본회사와 네트워크를 결성해서 조선 여공을 핍박한 집단도 있었을 터이고, 이런 역사를 감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모두 드러내는 게 옳지 않겠나.

조선 여성이 일본 여성을 위해 파업을 벌였다는 데 놀라웠다. 국적을 초월한 연대랄지.
이 이야기를 준비하고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감동한 지점이다. 보통 일본인 여공은 파업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집단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데 반해 조선인 여공은 국권을 빼앗겨 나라도 없는 상황, 약자 중의 약자인 그들이 힘을 모아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여기에 일본인 여공도 함께했다는 데 더욱 놀랐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례는 조선인 여공한테 평소 잘해줬던 일본인 식당 아줌마를 잘해준다는 이유로 회사 측에서 해고하자, 그분의 복직을 위해 파업했다는 기록이었다. 정치나 사회적으로 이분하기보다 우리 영화는 무엇보다 여공의 삶 안으로 들어가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017년부터 시작해서 2024년 개봉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때론 지칠 법도 한데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하다. (웃음)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했으니, 그 이전에도 홀로 일본을 오가며 자료를 모으곤 했지만,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원동력은…. 한 번 무언가를 잡으면 포기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그렇게 낳아 주신 것 같다. (웃음) 내게 온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들기보다, 가끔 조급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차근차근 밟아간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번에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내가 알게 된 역사의 일부분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다는 바람은 더 커져만 갔다. 다만 이번에는 오히려 급한 마음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1세대 분들이 워낙 고령이라서, 지체되면 증언을 할 분들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그리고 꼭 그분들께 이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어서 절박한 마음이었다.

폭력의 피해자나 시대의 희생자가 아닌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한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이라는 시각으로 1세대 노동자를 조명했다. 현시대에 소구점은 무얼까.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100년 전 소녀들의 이야기가 현시점에 어떤 소구점이 있을지 스스로 고민했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해소되었다. 조선인 여공의 이야기는 재일교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간 소녀들은 돈을 벌어서 고향에 송금했고, 그 돈으로 조선에 있는 가족을 먹여 살렸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100년 전 우리 소녀들의 이야기이고, 현재 삶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세대 할머님들은 일본에 터전을 잡고 가족을 일구어 살면서 그 어떤 차별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동시에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내셨다. 이는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될 거로 생각한다. 힘들고 좌절하기 쉬운 한국 사회에서 이분들의 강인한 정신력과 삶을 대하는 자세가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현재에도 나라를 잃고 난민이 되어 타국을 떠도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간 우리가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이민자에 대해 열린 시선으로 바라봤으면 한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한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를 찍으면서 만난 분 중 학자도 교수도 목사도 아닌 평범한 분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과거 자기 마을에 있던 방적공장의 존재를 알았고, 그곳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의 삶과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된 분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었고, 3년 정도 메일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카메라에 담게 됐다. 학교에서 일본 침략의 역사를 배우지 않은 그가 역사의 진실을 찾아 점차 성장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현재 촬영은 끝냈고 후반작업을 마무리해서 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이다.



사진제공. 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

2024년 8월 14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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