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2000년 걸그룹 ‘샤크라’로 데뷔, 연기자로 전향 후 2005년 레전드 시트콤과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와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대중에게 눈도장 크게 찍은 배우 정려원. 데뷔 24년 차에 많은 작품으로 대중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시크미와 러블리함을 놀랄 정도로 고스란히 간직한, 이미지 소모가 느껴지지 않는 그녀다. 기다려온 장르인 멜로 드라마 <졸업>에서 대치동 일타 강사 ‘서혜진’ 역을 맡아, 위하준과 함께 연상연하 호흡을 선보였다. 깊은 서사와 마음에 와닿는 대사, 현실 연인 케미로 호평받았다. 드라마 종영 후 아직 ‘졸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정려원을 만났다.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이너프’(Enough)라고 말하게 해준 ‘인생작’” 이라면서 “불안감에서 ‘졸업’하게 해준 작품” 이라고 소개한다. 까르르 웃고 통통 튀는 어조, 수다 떠는 듯한 친근함,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 여전히 소녀 같다.
어떻게, ‘혜진’을 잘 떠나보냈나. (웃음) 애정한 캐릭터였던 만큼 섭섭한 마음이 클 것 같다.
정말 그렇다. 마냥 예쁘게 사랑해 주신 작품이라 그런지 긴 여름 방학이 끝난 느낌이다. 극 중 강사를 연기한 배우들의 단톡방이 있는데, ‘이젠 뭐하나, 아쉽다’ (웃음) 이런 대화를 하곤 했다. 또 한 번은 ‘다들 모해?’ 하면서 번개 모임도 가지기도 했고. 지금도 혜진인 것 같은 기분이라, 아직 ‘졸업’하지 못 한 것 같다.
‘인생작’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느 부분에서 그럴까.
운명 같이 온 작품이라 ‘인생작’이 될 거로 호기롭게 생각했었다.(웃음) 지난해 3월에 일기장에 작업하고 싶은 감독님, 작가님 몇 분을 적어 봤었다. 주변의 동료와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안판석 감독님을 적었는데, 글쎄 3월 13일에 쓰고 5월 12일에 대본을 받은 거다. 처음엔 감독이 누구인지 몰랐고, ‘9월에 촬영 들어간다’고 해서 ‘선선하고 좋네, 멜로라 더 좋아’ 했었다. (웃음) 근데 연출이 안판석 감독님이라는 거다. 정말 운명 같았다. 간절히 바라고 원하면 이루어지는구나 싶었고, 대본을 읽기 전부터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첫 느낌은 어땠나.
읽다 보니 분명 멜로 장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멜로가 적고, 긴 대사가 많더라. 그래도 마치 첫사랑을 만난 듯 흥미로웠다. ‘혜진’이 행간 하나하나 놓치지 않는 국어강사라는 점이 좋았고, 마음에 와닿는 대사도 참 많았다. 사실 선생님이라고 해서 막연히 영어 선생님일 거로 생각했는데, 국어라 해서 좀 놀랐었다. 해외(호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지라 국어 선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살짝 들었지만, 그래도 평소에 책을 많이 있었으니까 되겠지 싶었다. 대본을 다 읽으니 마치 인스턴트 음식에 중독되어 있다가 슬로우 푸드를 먹는 느낌이었다. 전개 속도가 느려서 시청자에 따라 느슨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졸업> 같은 드라마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멜로 측면에서 설레거나 기대한 부분이 있다면.
우선 법정 혹은 메디컬 같은 특정 직업군에 포커싱한 드라마가 아닌, 멜로 장르라서 반가웠다. 그런데 처음에 대본을 4화까지만 받아서 보니 멜로가 생각보다 적고 오피스 드라마 같은 느낌도 들더라. 나중에 5화~9화까지 받아 보니 멜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와서 ‘우와’ 하면서 소리 질렀었다. (웃음) 5화까지가 가랑비였다면 6화부터는 소나기인 거다! 8화는 대본 앞표지를 캡처해서 작가님께 ‘<졸업>이 내게 와서 정말 고맙다’고 보낼 정도였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혜진과 준호가 말싸움을 하던 일상 대화를 하던 ‘역시 국어 선생이구나’ 싶은 대사였다. 준호가 혜진에게 ‘행간 다 읽었죠?’ 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때 너무 설레더라.
혜진은 성장하는 캐릭터인데, 당신과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인가.
혜진은 일에 있어서는 완벽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미숙한 인물이다.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데 이런 면은 나와 비슷한 것 같다.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응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졸업>을 통해 나를 응원하는 법을 배웠다.
혜진은 그간 쌓아온 강사 경력을 내려놓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선택을 하는데, 이런 결말에 아쉬움이나 이견은 없었나. 가령 커리어가 아깝다는 생각이라든지…
감독님께서 시즌2를 고려하다가 한 시즌으로 마무리했다고 하셨다. 16부작으로 끝내다 보니 축약된 부분도 있는데, 처음엔 ‘어떻게 결말내지?’ 하는 마음이었다가 나중에는 ‘이게 정답이야’ 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생각했던 정답 중에 혜진이 ‘졸업’하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교육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이 들어있는 이야기라, 준호가 좋은 스승으로 성장하는 것이 혜진에게 있어 졸업이라고 생각했다. 혜진이 준호의 동료로 계속 옆에 있다면 그(준호)의 성장에 한계가 있을 터이다. 준호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자기 꿈을 찾아가는 것이 혜진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했다. 힘들게 쌓아온 커리어를 내려놓는 과정이 생략되긴 했지만, 지금이 깔끔한 마무리인 것 같다.
대치동 학원가의 스타 국어 강사인 만큼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준비는 어떻게 했나.
학창 시절에 호주에서 보내 한국에서 중고등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놓친 부분을 충당하고자 노력했었다. 당시 아빠가 한국에 계셨던 때라 함께 돌아다니며 국어 강의를 듣고, 현직에 계신 분께 자문을 받기도 하고, 또 그분들의 영상을 보면서 싱크로율을 높이려 했었다. 여러 강의를 보다 보니 각기 강의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약간 밀당 같은 스타일을 따랐던 것 같다. 지난해 여름은 거의 판서 연습하며 보냈는데, 생각보다 해당 장면을 많이 안 찍으시더라. 강의 씬도 좀 더 많았지만, 편집되기도. 살짝 아쉬웠는데 다행히 tvN이 미방송분 영상으로 공개해줘서 좋았다.
버킷리스트였던 안판석 감독과 작업해 보니 어떻든가.
음, 감독님은 정말 특별하고 귀신(?) 같은 분이더라. 무슨 얘기냐면 배우가 어느 정도 보여주고 싶은 연기가 있는데 이걸 상대역이 하게끔 하시더라.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아, 저건 내 씬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만족감이 느껴지는 거다. ‘안판석 매직’이라고 할지, 정말 독특한 분이다. 안판석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프랑스 영화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러면서도 일상을 너무 잘 표현해서 좋았는데 <졸업>도 몇몇 장면에서 이런 느낌이 잘 표현됐더라.
어느 면이 독특한지,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감독님은 절대 정답을 말씀해 주는 분이 아니다. 내가 A라는 장면에 대해 B로 하면 식상할 것 같으니 C로 하면 어떨지 물으면 ‘려원 씨, 알파벳의 어원은 말이죠’ 라고 상관없는 듯한 이야기를 하신다. (웃음) 이런 방식의 소통이 쌓이다 보니, 감독님이 따로 얘기하지 않으면 ‘오케이’ 라는 걸 알게 됐다. 이전까지는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움과 약간의 불안감이 공존했고 그래서 감독님의 확인이나 연기 칭찬을 받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확신하고 오케이 하면 됐었다. 내 불안감을 ‘졸업’ 시킨 작품이라, 진정한 ‘인생작’인 것 같다.
일기장에 쓴 또 다른 소원이 있다면.
처음 리딩하러 갔을 때 순간 ‘이건 반칙 아닌가’ 할 정도 정말 학교 선생님 같은 분들이 앉아 계신 거다. 알고 보니 연극을 주무대로 하는 분들이고, 그런 분들과 호흡을 맞추는 경험이 새롭게 다가왔다. 기회가 되면 연극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일기장에 적어 놨다.
위하준 배우와 함께 한 연상연하 커플의 매력이 잘 살았다는 평인데, 평소 위하준 배우와 친분이 좀 있었는지, 자연스러워 보여서.
실제로 한 번도 못 본 사이였다. 작품에서도 대부분 거친 모습이나 악역인 걸 봤어서, 상대역이 하준 씨라 하길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봤었다. 살짝 웃는 사진이 많았고, ‘웃음이 예쁜 친구구나’ 싶었다. 애교도 많을 것 같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 짧은 헤어스타일에 태닝도 한 강한 모습이라 인스타그램의 인상과 너무 다른 거다. 알고 보니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시즌2 촬영은 끝났지만, 프로모션 때문에 그 모습을 유지하던 때였다고 하더라. 하준 씨는 좀 과묵하고 상남자 스타일이고, 준호는 좀 더 가볍고 능글맞은데 어떻게 위하준이 이준호가 되지 싶었는데 점차 ‘준쪽이’가 되어가는 거다. (웃음)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부분도 있었는데 안 감독님은 어장에 풀어 놓고 마음껏 놀라고 하는 스타일이라 점차 케미가 맞으면서 편하게 찍었다. 멜로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이 밉상이면 안 된다고 평소 생각했는데, 하준 씨가 이런 우려를 싹 거둬주었다. 상대역이라 너무 고마웠다.
배드 씬 촬영 에피소드가 있다면.
감독님이 지나가시면서 ‘혜진은 모솔(모태솔로)이야’ 이러시는 거다. 그래서 ‘감독님, (나이가 있으니까) 모솔은 좀 말이 안 되는데…’ 했는데, 생각해 보니 대치동 학원가 같은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진짜 모솔 혹은 연애했어도 깊이 들어가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준호가 다가왔을 때 어색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둘 다 뚝딱이며 촬영하기도 했고. (웃음) 어색하게 자세 잡고 하는데 감독님이 촬영 끝났다고, 나중에 방송으로 보라고 하시더라. 나중에 보니 정말 너무 야하게 나왔더라! 하준 씨와 내가 같이 콘티 짜고 할 때, 감독님이 됐다고 했는데 아마도 머릿속에서 다 그림을 그려 놔서 그런 듯.
위하준 배우도 또 당신도 멜로 비중이 생각보다 적다고 했는데, 평소 하고 싶던 장르인 만큼 무언가 아쉬움은 없는지.
9화 이후부터는 멜로가 나오지 않아서, 그래도 멜로 장르로 소개되는 만큼, 하준 씨랑 나랑 ‘그럼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이라도 찍자’고 했었다. 그때 찍은 사진 중에 하나를 나중에 포스터로 사용하게 됐다. 보통 스틸 중 셀렉해 포스터로 활용하는데, 이번 <졸업> 포스터는 극 중에 있는 장면이 아니다. 이걸로 무언가 (갈증 혹은 아쉬움이) 해소되면서 서로 ‘이제 됐다’ 싶더라.
JTBC <검사내전>(2020) 이후 TV 드라마는 상당히 오랜만이다. 그간 디즈니+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2022)로 시청자를 찾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사이 JTBC 단막극 <하얀 차를 탄 여자>를 했지만, 이렇게 16부작 드라마는 오랜만이긴 하다. 항상 작품을 많이 하길 원한다. 오래 쉬면 연기에 대한 감을 잃을 수 있어 걱정되는 부분도 있고. 그런데 (알다시피) 모든 배우에게 엄청나게 많은 기회가 오는 건 아니지 않나. 요즘 편성 받기도 어렵고 업계 사정이 썩 좋지는 않지만, 다행히도 검토 중인 차기작이 있어서 감사할 뿐이다.
극 중 ‘내 인생의 명장면’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당신의 명장면을 꼽는다면.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라, 잠시만… 지금 순간 떠오르는 건 청룡영화제에 신인상 후보로 처음 초대됐을 때다.(2007년 제28회 청룡영화제, <두 얼굴의 여친>) 너무 떨려서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괜찮아, 네가 떠는 거! 너 말고 아무도 몰라’ 이러면서 한 5분 정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맑은 정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너무 떨린 와중에 ‘나 상받는 것 아니야’ 하고 생각하기도, (웃음) 지금도 불안하거나 하면 그 거울 앞의 모습이 항상 떠오른다. 그때는 프로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게 불안했었다. 20대 때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면 40대인 지금은 ‘좀 실수하면 어때’ 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이너프(Enough) 한 적이 없는데 이번 혜진을 보내면서 한 멘트가 ‘이너프’였다. 이게 두 번째 명장면이 아닌가 한다.
사진제공. 블리츠웨이스튜디오
2024년 7월 24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