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자칭 노가다계의 엘리트 ‘목수’인 기홍(박기홍)은 어느 날 차 지붕이 잔뜩 찌그러져 있는 걸 발견한다. 누군가가 차 위로 떨어진 것은 확실한데, 그 범인을 알 수 없다. 집주인 남자는 뭐가 재미있는지, 한밤중에 사건이 발생했을 거로 추정되는 현장에 같이 가보자고 꼬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곳에서 누군가가 떨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만다! 분명 떨어졌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는 누구인가? 이정홍 감독이 첫 장편 영화 <괴인>으로 관객을 찾는다. 감독을 만나, 예측이 번번하게 빗나가는 흥미로운 전개와 리듬으로 관객의 허를 찌르는 영화의 탄생기를 들었다. 누가 괴인이냐는 질문에 누구도 괴인이 아니라는 고민 어린 답을 내놓는다.
‘괴인’ 이라는 제목과 포스터에서 무언가 살벌한 포스가 풍긴다. (웃음) 그래서인지 요소요소 어떤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게 되는데 의외로 일상적인 풍경으로 풀어내서, 예상이 빗나가는 맛이 있더라. 제목과 포스터에 담긴 의도는.
살벌함보다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길 바랐다. ’괴인’은 이미지가 전형화된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미지를 어떻게 메이킹 하는지에 따라 흥미로운 요소가 있을 것 같더라. 포스터는 제목의 기이한 면을 유지하되, 연두 등 밝은 색상과 팝 아트 같은 느낌으로 나름 경쾌하고 귀엽게 포인트를 줘 봤다.
‘괴인’은 누구를 지칭하는 건가, 문득 궁금하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극 중 미스터리한 금발 소녀(이기쁨)를 지칭한 가제였다. 글을 쓰면서 이 친구의 존재감을 (내게) 각인할 수단으로 사용했는데, 결국 끝까지 사용하게 됐다. 누가 괴인이냐가 아니라, 아무도 괴인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았다. 아무래도 요즘은 유난히 소통이 어려운 모습인데 여기에는 타인을 너무 쉽게 혐오하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기저에 깔린 것 같다. 주인공인 ‘기홍’(박기홍) 역시 꼭 이런 이유는 아니라도 타인과 어느 수준 이상의 관계 맺음을 꺼리는 동시에 어려워하는 인물이다. 이런 와중에 <괴인> 속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이 여럿 등장한다. 관객들이 이들을 지켜보다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영화가 타인을 이해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약하나마 제시하지 않을까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TV를 통해 본 한 소녀에서 출발됐다. 가출 청소년을 섭외해서 함께 숙식하는 등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취지의 TV 프로그램이었는데 출연자 중 한 명을 향한 열등감에서 비롯됐다. 당시 나는 (스스로) 솔직하지 못하고, 타인과 소통을 어려워했는데, 그 소녀는 여타 가출 청소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반항기가 있는 게 아니라 어딘가 굉장히 나른하고 무언가 벽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더라. 누구에게든 쉽게 다가가서 스스럼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그랬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 같아 매력적이었고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 소녀를 주인공으로 글을 쓰다가 젊은 여성은 너무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인물이라 접었고, 다시 집주인 ‘정환’(안주민)을 중심으로 썼는데 그 역시 아내를 짝사랑하는 우울한 중년 남자라 상상력 혹은 어딘가에서 빌려와야 하는 캐릭터라 흡족하지 않더라. 결국 ‘기홍’을 주인공으로 방향을 잡았다.
‘기홍’은 크게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나 보다. (웃음) 이를 연기한 박기홍 배우와는 오랜 친구로 알고 있다. 기홍은 어떤 인물인가.
나와 닮은 면도 있고, 아주 오랫동안 만났음에도 어떤 사람인지 갈피를 못 잡겠는 다채로운 성격의 매력적인 친구다. 어느 정도 알지만, 신비감이 있어서 내가 잘 그릴 수 있겠더라. 그래서 기홍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재배열하면서 지금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기홍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직장을 그만두고 목수가 되는 용기를 냈지만, 그럼에도 미숙한 친구다. 제멋대로인듯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한다. 또 자기 일을 하기 위해 독립했지만,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기도 한 모순적인 면이 있는 인물이다. 또 함께 일하는 인부에게는 큰소리치고 반말하며 일부러 센 척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소녀의 처지를 외면하지 못하는 등 여러 구석이 있는 친구다.
|
박기홍 배우를 비롯해, 출연진 대부분이 비전문 배우다. 박기홍 배우는 출연 제안을 받고 선뜻 응했는지, 말투에 독특한 리듬감이 있다.
평소 말투와 비슷하다. 처음 연기하는 데다 평소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던 친구라 2년여에 걸쳐 설득했었다. (웃음) 내가 단편 영화 만들 때 스탭으로 종종 참여했고, 그때 비전문 배우와 촬영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자기가 출연할 경우를 상상해 봤던 것 같더라. 전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도 고려해 봤는데, <괴인>은 스토리 위주의 영화가 아니라 인물 고유의 분위기와 정서, 에너지의 온·오프 스위치가 큰 열쇠인 영화라 꼭 ‘그’ 여야 했었다. 기홍은 극 중 캐릭터처럼 뒤늦게 건축 노동자(목수)가 된 경우이고, 처음에는 일을 배우기 위해 일명 시다로 현장을 쫓아 다녔어서, 이때 느낀 점 등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초반 기홍은 옥탑방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점프해서 전원주택 세입자로 살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단절시킨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고, 우리 어머니 외에 처음 받는 질문이라 기분이 좋다. (웃음) 원래는 그가 이사 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는데, 생략과 점핑을 통해 관객을 도발함과 동시에 영화로 끌어들일 지점으로 삼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자세를 바로잡는 그러니까 ‘곧추앉는’ 포인트라고 하겠다. 감독으로서 객기 아닌 객기를 부린 걸 수도 있다. (웃음) 엘리베이터 상행선을 비춰서 기홍이 자기 딴에는 신분 상승했다는 걸 암시했다. 그가 캠핑용품을 사고 마당에 펼쳐 놓은 것 역시 이 시대의 풍경을 담았다고 하겠다. 현재 자기 위치에서는 절대 살 수 없는 집에 전세로 들어가서, 집은 없어도 캠핑을 즐기는 기홍을 통해 절망 속에서 주체적으로 기쁨을 찾는 요즘 젊은 세대를 그려봤다.
기홍이 전세 들어간 전원주택의 구조가 독특하다. 집주인과 전세인의 출입구는 따로 있지만, 2층 다락방은 통하는 분리와 연결의 구조로 인물 간의 관계성을 잘 드러낸 것 같다. 처음부터 이 집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건가.
두 세대가 살게끔 분리되면서도 연결된 집을 롤모델로 해서 썼었다. 원래 목표했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섭외에 실패했다. 고생 끝에 로케이션 장소를 구했고, 집의 구조에 맞춰서 집주인 부부(안주민, 전길) 성격부터 작은 상황 설정까지 시나리오를 많이 수정했다. 덕분에 좀 더 ‘괴인’ 같은, 영화적으로 긴장감을 이끄는 알 수 없는 분위기의 캐릭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
마지막에 집주인 ‘현정’(전길)과 기홍은 하룻밤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내고 온 걸까.
그 두 사람이 어디를 갔고, 무슨 일을 했는지 특별하게 정한 건 없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촬영하고 편집해서 완성본을 낸 지금까지도 바뀌고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일이 있었든 이후에 그들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불륜 같은)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집주인 부부의 거리감이 더 심화됐을 것 같지 않고, 무슨 일이 없었다 해도 남편이 받은 충격이 줄어들 것 같지도 않거든. 핵심은 기홍과 현정이 집을 나간 순간, 카메라는 정환을 향한다는 것이다. 한밤중 잠에서 깬 그가 빈집을 누비면서 느끼는 충격과 텅 빈 마음을 긴장감 있고, 쓸쓸함과 공헌한 이미지로 담고 싶었다. 기홍과 현정의 뒤를 쫓아가며 담지 않은 이유는 정환이 일반적인 피해자처럼 비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파국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평화로운(?) 결말이라 예상이 빗나가는 묘미를 다시 느꼈다.
그런가. (웃음) 기홍과 집주인 부부, 여기에 금발소녀 ‘하나’까지 그 집에 동시에 있게 된 네 사람은 어떻게 될지, 인물들이 각자 어떤 관계를 맺을지 뭐든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다는 생각으로 엔딩을 가져갔다.
첫 장편을 완성하면서 배운 부분이 많을 것 같다. 어떤가. ’
장편을 찍기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는 영화를 만들 때는 계획과 예산에 있어서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거다. (웃음) 자칫하면 외부적인 요소가 영화의 본질을 흔들 수 있겠더라. 시나리오를 쓰면서 롤모델로 삼았던 집을 섭외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 오랫동안 준비해 온 시나리오임에도 불구하고 변경할 부분이 많아지면서 충분히 고민하지 못해서 찍었다는 데 아쉬움이 남는다. 한마디로 뜨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려면, 차가울 부분은 차가워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큰 고통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었다! 또 다음 작품에서는 전문 배우와의 접점을 좀 더 넓혀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마지막으로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작은 사건이 있다. 이번 차 지붕에 사람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좀더 큰 범주의 사건이고, 이를 중심으로 뒤따라올 요소가 많은 사건이다. 여기에 어떤 이야기와 고민 그리고 질문을 담을지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가는 중이다. 기존의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주인공의 고민이 담길 것 같다.
사진제공. 영화사 진진
2023년 11월 15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