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무비스트 박은영 기자]
필리핀 출신 영국 불법체류자 ‘조이’(제이든 페이지 보아디야)는 우연한 기회에 어느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간다.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집의 깊숙이 자리한 방에 누워있는 의식 불명의 남성 노인과 그의 침상을 지키는 조카 캐서린, 조이는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캐서린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하지만 조이 역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바로 커다란 캐리어 안에 숨겨 함께 입주한 딸 ‘그레이스’다.
영화 <레이징 그레이스>는 필리핀계 영국 감독 패리스 자실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올해 북미 최대 콘텐츠 축제인 SXSW에 첫선을 보여 극장편 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작품성과 오락성을 겸비한 호러, 사이언스 픽션, 컬트영화를 신작 위주로 소개하는 미드나잇 패션(Midnight Passion) 섹션에 초청되어 아시아 프리미어로 상영됐다. 식민주의의 민낯을 공포 장르로 풀어낸 동시에 적폐와 모순을 향해 우아하게 분노하라는 바람을 담아, 타이틀을 정했다는 패리스 자실라 감독을 만났다.
저택의 주인을 필두로 캐릭터와 서사 곳곳에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녹아 있다.
저택에 사는 병든 노인 ‘개럿’과 그의 조카 ‘캐서린’은 늙고 젊은(올드 앤 뉴) 화이트칼라를 상징한다. 그들은 내면에 어두운 부분(악)이 있는 인물인데, 개럿은 언뜻 매력적으로 보이나 사람을 유리관 안에 박제하는 인물이다. 캐서린 역시 젠틀해 보이나 가정부이자 유색인종인 ‘조이’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다. 백인의 방식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렇다고 <레이징 그레이스>가 복수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국 제국주의 자체가 매우 복잡한 역사가 있고, 나 역시 이에 분노하면서도 영국 이민자로 성장하며 수혜를 입은 부분도 있는 까닭이다. 어떤 답이 아닌,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한 부분이 크다.
누군가 집에 숨어든다는 설정은 현실적인 공포를 높이고 동시에 신분이 불안정한 가정부가 주인의 목숨을 살리는 상황은 강자와 약자의 전복 같은 역설을 보인다. 장르적 쾌감과 주제의식의 조화가 잘 어우러졌다는 생각이다.
불법이민자의 삶은 괴롭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 공포 드라마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의 자연스러운 방향성이 될 수밖에 없었고, 주제의식과 공포, 둘 사이의 균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상 깊게 본 김기영 감독의 <하녀>도 공포 드라마 스릴러 여러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평소 좋아하는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멀티 장르를 잘 변주하는 분들이고, 나 역시 이런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엄마 조이와 어린 딸 ‘그레이스’는 사뭇 다른 성향을 보인다. 조이가 순응적이고 어느 정도 주눅들어 있다면, 그레이스는 한층 대범하고 전향적인 모습이다.
부모님 세대, 그러니까 모든 이민 1세대는 생존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 ‘서바이벌’을 우선순위로 두고 모든 걸 결정하셨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백인의 인정을 받으려다 보니 전통을 거부하거나 지키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고, 나 역시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렇게 30년 넘게 살다 보니, 내 문화를 부인하며 살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분노가 일기도 하더라. 이제는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사회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그 일원으로서 오히려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이런 시류를 그레이스에 투영해 전하고자 했다. 분노하되 우아하게, 그러니까 우아하게 분노하자는 바람을 제목에 담았다.
리드미컬한 음악이 귀에 쏙 들어오더라. 중간쯤 삽입된 필리핀 토속 음악을 비롯해 음악의 활용이 돋보인다.
사운드 뮤직은 시나리오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처럼 예산이 크지 않은 영화에서는, 음악이 비주얼적으로 커버하지 못한 부분을 상당 부분 보완해 준다. 존 클라크(John Clarke) 사운드 디자이너 겸 작곡가에게 필리핀 특유의 정서가 담긴 독특하면서도 보편성을 담보한, 모두에게 몰입감이 높은 음악을 만들어 주십사 했었다. 불가능한 미션을 부탁한 거지. (웃음) 비트와 박자를 메트로놈 98 BPM에 맞춰 진행하다가, 놀라게 하거나 공포가 필요한 순간에는 이를 변화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또 티니클링(Tinikling)과 쿨리탕(Kulintang)이라는 특별한 2개의 악기를 활용했다. 티니클링은 대나무 막대 두개를 사람들이 교차해 움직이며 춤을 추고 연주하는 동남아 특유의 악기다. 심장 박동 같은 사운드를 통해 조이와 그레이스의 충돌과 미묘한 관계를 상징하려 했다. 또 쿨리탕은 서양 음조에는 없는 소리를 내는 악기다. 그래서 바이올린과 첼로 등 서양 악기와 함께 곡을 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화음을 이루듯이 조이와 그레이스도 마찬가지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 서구에 속하지 않은 그들이 결국 그 사회의 일원으로 더불어 살아간다는 걸 말이다.
후반부, 조이가 합창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비하인드가 있다고.
‘ilay gandingan’ 라는 곡으로 굉장히 오래된 부족의 전통곡이다. 필리핀에서도 매우 특색있는 방언으로 구성된 노래다. 필리핀의 여러 문화 중에서도 식민·제국주의의 힘이 미치지 못한 지역의 노래로 필리핀만의 순수함을 담고자 했다. 그런데 미국인이 이 전통곡의 저작권을 신청해 놔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 상흔의 일면인 것 같아 몹시 화가 났었다. 이때 참여한 배우는 전문 합창단원이 아니고 영국에서 일하는 의료진 모임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영국에서는 일선의 많은 의료인이 사망했고, 이중 필리핀 출신이 많았다. 정부의 상대적인 무관심으로 사망률이 올라간 부분이 있어서, 이 시퀀스를 통해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동시에 저항정신을 표현하려 했다.
마지막 질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방문 소감과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한국도 부산도 처음인데 날씨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아주 멋진 곳이다. 그간 경험한 영화제 중 가장 규모가 큰 행사인데, 어제 진행한 GV에서 관객과 아이컨텍하며 값진 경험을 얻었다. 필리핀 고유의 이야기인데 국가를 넘어 공감해 주고, 음악의 테크닉이나 쓰임새를 묻는 등 수준 높은 관객들이었다. 또 사회자가 <기생충>과 비교해 영화를 소개해 주셔서 감격스러웠다. <기생충>과 한 문장 안에 담긴 것 자체로 큰 영광이다.
한 여성 관객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려웠던 점을 물었는데, 이때 인종 차별하는 걸 찍으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생각나더라. 촬영 당시, (인종) 차별받았던 과거의 트라우마가 도지기도 했고, 또 이런 연기를 배우들에게 몇 번이나 하게 하면서 가슴이 아팠었다. 진정성 있는 연기를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사진제공. ㈜이놀미디어
2023년 10월 16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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