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트랜스휴먼(과학기술의 발달로 어떤 개조에 의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획득한 인간)을 꿈꾸는 한 고등학생이 있다. 우울증, 거식증, 왕따인 ‘고민영’(황정인)이다.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같은 반 ‘피이태’(윤경호)가 추진하는 트랜스휴먼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다. <트랜스>는 뇌과학, 트랜스휴먼, 다중우주라는 세 개의 키워드와 플롯팅을 핵심 포인트로 한 SF 스릴러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장르와 소재로 실험적인 시도가 가득한 <트랜스>를 첫 장편으로 선보인 도내리 감독을 만났다.
<트랜스>의 시작은.
한 PD분이 내가 쓴 시나리오를 보고 너무 연극적이라면서 자신에게 영화는 ‘연극보다는 가요 같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이 표현이 재미있게 다가왔었다. 의미를 생각해 보니 약간 시간성의 문제 같더라. 당시 내가 쓴 시나리오는 공간성에 관한 글이었거든. 그즈음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시·공간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를 아주 몰입해 봤고, 관련 콘텐츠를 섭렵하다 인공지능, 뇌과학에까지 접근하게 됐다. 뇌과학에서 흥미롭다고 느낀 포인트는 결국 우리가 현실로 인식하는 것이 인풋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해석에서 나오는 아웃풋이라는 거였다. 이 아웃풋의 개념이 재밌더라. 그래서 영화로 이렇게 아웃풋 되는 얘기를 해보자고 했고, 다중우주에서 다중의식을, 진화와 관련해서는 트랜스휴먼과 연결하게 됐다. 여러 요소가 섞이고 연결이 안 될 것 같은 지점이 연결되며 만들어진 영화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컨셉셜한 부분에 관심이 많고 잘하는 편이다. 한마디로 이질적인 개념들을 융합했다고 보면 된다.
주인공 ‘민영’(황정인)은 학폭 피해자에 우울증, 거식증 등 여러 설정이 씌워진 인물이다.
<트랜스>는 뇌과학, 다중우주, 트랜스휴먼 이 세가지 코드로 구성된 이야기다. 뇌과학 측면에서 보자면, 뇌에 어떤 충격이 들어올 때 번개 이미지를 사용하고 싶었다. 번개 하면 피뢰침, 피뢰침하면 딱 연상되는 게 아주 마르고 뾰족한 느낌이라 캐릭터에 거식증이라는 설정을 더했다. 게다가 우울증이나 강박증에서 전기 자극이 하나의 치료 요법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또 왕따로 고통받는 것은 ‘민영’이 트랜스밍을 결심할 이유가 필요해서다. 민영, ‘피이태’(윤경호), ‘나노철’(김태영)까지 등장하는 세 캐릭터에 비인간적인 요소를 하나씩 부여한 면도 있다.
비인간적인 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영화를 만들면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보고자 했고, 그래서 비인간적인 요소를 넣었다. 민영은 거식증, 피이태는 강박증과 전자칩, 나노철은 의수다. 이렇게 세 인물 간에 ‘비인간적’이라는 연결점을 마련했다. 민영이 괴롭힘을 당하고, 나노철의 팔이 의수인 것은 어디까지나 연결을 위한 설정일뿐 자체로 학폭이나 장애인 이슈를 다루고자 한 것은 아니다.
거식증인 민영에게 먹을 것을 강요하며 괴롭히는 현장이 상당히 실감나게 묘사됐다는 생각이다. 소시지, 햄버거, 오줌 등 성적 코드도 읽힌다.
어느 정도 성적 코드가 반영된 표현은 맞다. 하지만, 말했듯이 왕따 이슈 자체가 아니고, 민영이 트랜스휴먼을 결심하기까지 필요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플롯이 중요한 영화라고 밝힌 바 있는데, 영화의 구조를 설명해주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형식적인 구분은 없으나 총 5부로 구성돼 있다. 타임루핑 되는 세 부분이 1~3부에 해당되는데 이는 민영이 트랜스 전격세례(고도의 전압으로 두뇌의 신경 패턴을 교란시킨 상태)에 빠져서 꾸는 꿈이라고 보면 된다. 민영이 교회에 가는 순간부터 4부이고, 이를 기점으로 현실로 넘어간다. 이후 또 한 번 타임루핑되는 부분이 5부라 할 수 있다. 보충하자면, 오줌 먹을 것을 강요당한 민영이 트랜스휴먼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전격세례에 돌입해 꾸는 꿈이 1~3부이다. 이 부분에서 다중의식 구조를 만들기 위해 고민영, 피이태, 나노철이라는 세 명의 캐릭터를 등장시켰고, 각각 인물 한 명 한 명을 테마로 해서 구성했다. 다만 1부와 2부가 트랜스 전의 민영이 겪은 과거의 상황이라면, 나노철이 트랜스 되는 3부는 민영의 불안한 심리가 반영된 미래 상황이라 하겠다. 현실인 줄 알았는데 꿈이고, 그 꿈 안에서도 과거와 미래가 쪼개져 있어 좀 더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사실 배우들에게 설명할 때 칠판에 쓰면서 다 층위를 나눠서 설명했었다.
형식적인 구분이 없어 더욱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데 가이드가 될 만한 장치가 있다면.
타임루핑 안에서도 시간을 쪼개 놓은 부분이 더 헷갈리게 만드는 지점인 것 같다. 하지만 처음 구상할 때부터 인물 안에서 벌어지고 전개되는 이야기가 랜덤하게 펼쳐지는, 그러니까 어떤 사건들이 계속 파편처럼 흩어져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편집하면서 좀 더 쉽게 풀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타협하지 않은 지점이다. 추상적으로 접근한 영화라 이러한 플롯팅(Plotting) 자체를 즐기지 않으면 아무래도 영화의 재미가 떨어질 거다. 지난해 해외 영화제를 돌면서 살펴보니 다양한 반응이 있었는데, 사이파이(Sci-Fi) 장르를 많이 접한 분들은 어렵지 않다고 하더라. 2부까지는 좀 헷갈리다가 3부부터 지켜보면 다 끝난 후에는 퍼즐링이 맞춰지는 영화라 마지막에 한 번 곱씹을 수 있지 않나 한다.
세 캐릭터는 결국 민영의 자아분열체라는 설정이다.
민영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인물이다. 인간을 만든 신이 왜 인간의 악한 부분을 시험에 들게 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신봉하는 피이태는 매우 급진적이고, 그 반대급부인 나노철은 보수적이고 겁이 많다. 민영은 두 친구 사이의 중간자적 입장으로 방황하고 갈등한다. 좀더 풀어 얘기해 볼까. 도식적이라 좋아하지는 않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심리적으로 이드, 에고, 슈퍼 에고가 있다. 피이태는 이드(본능), 나노철은 슈퍼 에고(초자아)라면,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민영은 에고(자아)라 하겠다. 처음부터 염두에 둔 건 아니고, 나중에 보니 이렇게 매칭하면 되겠더라. (웃음) 그런데 트랜스휴먼이 된 나노철은 자살을 선택하지만, 민영은 그렇지 않으니 캐릭터 간에 약간 차이가 있도록 포지셔닝했다. 한 리뷰에서는 세 캐릭터를 심리적인 융합체라고 썼더라. 세 캐릭터가 심리적으로 융합되고 병합되는 식의 스토리 구조를 이런 방법으로 표현해봤다. 여기서 그들이 주고받는 문자를 보면 좀 더 재미있을 거다. 아, 그리고 디스 한가지!
뭔가. (웃음)
사실 민영은 스스로 주도하기보다 계속 사건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능동적으로 막 뭘 하지는 않는 캐릭터다. 여성 캐릭터를 사이파이 장르 안에 데려와 이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확 끌고 가는 의지를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디스해 본다. (웃음)
타임루핑되면서 골목을 뛰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촬영 장소는.
강화도에서 촬영했다. 사이파이 장르지만, 배경은 시골 느낌이 났으면 했다. 그래서 주변이 논과 밭 같은 풍경의 외떨어진 곳에 있는 학교에서 촬영했고, 교실의 책상 같은 소품도 일부러 예전의 것을 찾아서 사용했다. 예산의 문제도 있었지만,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하려는 의도였다. 피이태와 민영이 실험하는 장소는 넓은 공터가 필요해, 화성의 한 벌판을 어렵게 섭외해서 촬영했다. 사실 로케이션만이 아니라 PD 섭외부터 후반 VFX 작업까지 완성하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말 쉽지 않았다. (웃음)
대부분을 도맡아 작업했으니 고생이 많았겠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 초청된 것을 비롯해 해외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트랜스> 작업 경험이 다음 작품의 든든한 초석이 되겠다.
영화를 끝낸 후 약간의 번아웃이 와서 영화제 시즌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다음에는 인공지능(AI)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CG와 VFX 등 특수효과 분량은 줄이되 퀄리티를 높일 예정이다. <트랜스>는 전기가 주요 매개다 보니 아무래도 VFX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해 보니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고, 조명과 미술 그리고 소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낫겠더라.
영화 포스터의 ‘TRANS’ 글자가 나비 형상이다. 장자의 나비에서 착안했다는데, 영화의 내용과 상통하는 면이 있는 건가.
스튜디오 ‘빛나는’ 박시영 대표님이 영화를 보고 딱 장자의 나비가 떠올랐다고 하셨다. 플라스마를 활용해 TRANS 라는 글자를 만들었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보다 꿈과 현실을 반영한 정도로 보면 적당하겠다.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인간이 지닌 어떤 감정선을 다 무너뜨리고 구조만 남은 건조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라는 연출의도가 인상적이었다. <트랜스>가 건조한 이야기인가.
건조한 이야기란 그런 심리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트랜스휴먼이나 인간중심주의에 관심이 크다. 단편을 찍던 20대 때 윤리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내게 윤리는 복잡하고 심플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런데 독립영화는 정치, 사회적인 이슈를 많이 다뤄서 스스로 100% 흡수되지 못한다고 느꼈고,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형철 평론가의 ‘선의 윤리가 아니라 진실의 윤리를 추구한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이해하는 윤리라는 것은 선이라는 어떤 규정성을 가지고 행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답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모호한 경계를 살피는 자세나 태도를 취하는 게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보니 인간중심주의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인간성을 규정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인간적인 무언가나 따뜻한 영화를 만드는 게 내게는 어색한 일이다. 이런 고민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감, 비인간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으로 인간적인 감정까지 싹 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신들은 계속 이러한 감정을 넣고 있지만, 나는 한 번 이런 감정 없는 영화를 만들어 볼 거야’ 라는 느낌이랄지. (제작) 지원에서 떨어지고, 장편을 시작하지 못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과학적인 테마를 만났는데, 잘 맞더라. 정치·사회적인 이슈보다는 존재적이고 인식적인 차원의 층위에 관심이 많거든. 말이 길어졌는데, 건조하다는 건 트랜스휴먼이라는 비인간적인 요소를 한 번 펼쳐보겠다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철학을 전공했는데 영화는 어떻게 하게 됐나.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영화와 연극을 많이 봤고, 고2 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7)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불안한 형식과 주제의식에 놀랐고, 나의 깊숙한 부분의 간지러운 지점을 긁어주는 듯했다. 나도 이러한 해방의 서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침 아버지도 철학을 전공했고, 연출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철학과에 진학했다. 공부해 보니 나와 잘 맞더라. 추상적인 측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개념을 세우는 일을 잘하는 것 같다. (웃음) 반면 감정선만으로 드라마를 끌고가는 건 내게 어려운 작업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도내리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약간 직설적이고 마음에 많이 담아 두는 편은 아니다. 최근 영화를 배급한 마노 엔터테인먼트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한번은 ‘사람들은 본질을 보지 않고 영향력이나 권력 등을 보는 것 같다’고 영화를 찍고 개봉을 준비하는 여러 과정에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니, 깜짝 놀라시며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하시더라. 마흔 살도 넘었지만, 진짜 이번에 알았거든. 내가 어떤 캐릭터인지 좀 이해가 될까!
사진제공. 마노엔터테인먼트/ <트랜스> 스틸, 포스터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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