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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촬영 중” <2차 송환> 김동원 감독
2022년 10월 6일 목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김동원 감독은 자칭 ‘팔자가 바뀐 사람’이다. 꽤 사는 집의 아들로 나름 촉망받던 청년은 상계동에 들어가면서 그간 보지 못했던 세상의 다른 면을 접했다. 정일우 신부의 ‘가난이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는 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도시 빈민의 삶으로 걸어 들어간 시기다.(<상계동 올림픽>(1991)) 김 감독에 따르면 다행스러운 팔자바뀜이다. 또 감독은 무계획적이고 게으른 사람임을 자처한다. 이러한 우연에 기댄 무계획성 덕분에 1992년에 만난 장기수를 30년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의든 타의든 ‘김동원의 화두’가 돼 버린 송환 문제, <송환>(2003)에 이어 18년 만에 <2차 송환>(2022)으로 관객 앞에 선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영화는 끝났을지라도 여전히 촬영 중이라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2004년 개봉한 <송환>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18년 만에 관객을 찾는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사회적 인식과 분위기의 간극이 상당할 것 같은데 체감하는지.
개봉을 앞두고 절감하는 중이다. 영화제 등에서 꽉 차지 않은 객석을 보면서 장기수도, <송환>도, 그리고 나도 잊혀지는구나 싶다. 통일에 대한 관심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개봉이나 흥행이 목적이 아니라 관객에게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인식을 환기할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예상보다 그 간극이 크다.

1992년에 촬영을 시작한 <송환>(2004)과 이후 <2차 송환>(2022)까지 30여 년에 걸쳐 두 작품을 작업한 소회는.
개인적으로 인정하든 하지 않았든 ‘송환’은 내 인생의 화두가 돼 버렸다. 김동원은 송환에 미친 사람이라는 시선도 있다. <송환>때도 그 이후에도 밝혔지만, 작정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운동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통일에 대한 관심으로 선생님들을 일부러 만난 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만나게 됐고, 마침 부모님이 실향민이라 더욱 관심이 생겼었다. 그렇게 92년부터 선생님들을 담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정치·사회적으로 송환이라는 게 실현 불가능한 이슈로 여겨졌고 이에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힘을 보태고자 했다. 그런데 2000년에 갑작스럽게 63분의 비전향 장기수가 전격 송환됐다. 이런 시간을 담아 <송환>을 완성했고, 이때 못 가신 분들의 2차 송환 운동이 시작되어 다시 그 움직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뤄질 듯, 안 될 듯 지켜본 세월이 어느덧 20여 년이 됐다.

주인공 김영식 선생을 비롯해 남은 송환 희망자 분 모두가 90여 세가 넘는 고령이라, 이후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인데 어떤가.
게임은 아직 안 끝났다고 생각한다. 송환 여부와 관계없이 선생님들을 계속 촬영하고 있다. 농담같이 ‘3차 송환’에 관해 물어보는 분도 간혹 있고,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매일 촬영하다 보면 그다지 늙는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데 가끔 약해지셨다고 확 느낄 때가 있다. 최근에 김영식 선생이 몹시 아프셨기도 해서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2차 송환>을 개봉하며 선생과 같이 GV와 무대인사를 하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하신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송환의 실현보다는 운동으로서의 송환이 남은 건 아닌가 한다. 자기 존재를 놓지 않는 일종의 몸짓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2차 송환 추진위원회’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고, 통일부와의 만남 등 움직임이 왕성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2차 송환>
<2차 송환>

1차 송환 직후, 즉 2001년부터 시작한 2차 송환의 성사를 지금까지 막고 있는 주요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보나.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전쟁으로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고 현재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대화를 가로막는 실정이다. 남북한은 서로 간첩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남한은 어떻게든 전향을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장기수가 희생당했고 강제 전향 당했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자국민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송환을 요구했던 1차 때와는 사뭇 다른 입장을 취했다. 우리측에서 적극적으로 송환을 추진하는 게 제일 빠른 길일 터이다. 하지만 당시 이인영 통일부장관은 적극적인 검토를 언급했지만, 실질적인 액션은 취하지 않았다. 지난 정부 때 서둘러 추진했다면 남북대화의 어떤 물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송환>과 <2차 송환>은 마치 자기 독백이랄지, 일기 같은 인상이다.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전하는 등 작품 속에 깊숙이 들어오기도 한다.
남북 관련 이야기를 다룰 때는 조심스럽다. 완전한 중립은 있을 수 없으니 화자를 드러내면 쓸데없는 오해를 줄일 수 있어서 직접 내레이션을 했다. 이번 <2차 송환>에서는 직접적으로 부모님의 사연을 언급했다. (말했듯이) 그분들이 실향민이라 관심이 더욱더 큰 게 사실이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1990년대 이후 주관성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형식이 국내에 도입된 면도 있다.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관찰과 참여가 동시에 이뤄줘서 약하게 주관을 드러내는 성향도 있다. 개인적으로 완전한 관찰도, 완전한 참여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영화는 70~80%의 관찰에 20~30%의 참여 정도인데 내 성격에 딱 적당한 배분이 아닌가 한다.

김영식 선생이 ‘놀이 같은 영화’라며 <2차 송환>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반발심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거로 본다. 당신은 이런 부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 중 한 선생은 수십 년을 알았지만, 당신의 성향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치적인 색채가 있는 다큐일수록 정치적 의견을 함부로 밝히면 안 되는 면이 있다. <송환>을 처음부터 휴먼다큐멘터리로 가져간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람에 초점을 맞춘 거지. 또 사실 정치적인 견해가 강하지도 않다. 말했듯 그 당시에 운동권도 아니었고, 실향민 부모를 둔 입장에서 통일을 염원하고 <송환>의 주인공인 조창손 선생이 송환됐으면 하는 염원이 무엇보다 컸다. 그런데도 정치적인 견해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도 있다. 송환 반대 투쟁을 비추며 ‘우익들이 들어와 막았다’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써버렸다. 실수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정치적인 냄새가 나지 않아야 정치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2차 송환>에는 강하게 오버한 부분이 있다. ‘통일은 올 것이다’라고 내레이션한 엔딩이 그렇다. 이건 너무 답답한 마음에, 김영식 선생을 비롯해 2차 송환 희망자를 어떻게든 위로하고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싶은 바람의 표현이었다. 송환은 안 돼도 통일은 오고 만다는 주장을 한 거다.

좌우에 상관없이 한번 뿌리내린 사상이나 생각은 참 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더라.
장기수들을 움직이는 동력 중 사상은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변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전향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던 힘은 내가 보기에 사상보다는 인간적인 오기였다. 나보다 못한 놈들에게 고문당하고 무릎 꿇려지니 인간적인 자존심이 발동하는 거지. 물리력에 의해 전향한 분이 더 많지만, 20~30%는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비전향의 삶을 택했다. ‘젊은 시절 맑시스트가 아닌 사람이 바보이듯, 늙어서도 맑시스트면 바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렇듯 사상은 세월이 흐르면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생활하고 공부하다 보면 어떤 사상이든 완전하지 않은 걸 알 수 있거든. 물론 그분들 중 사상적으로 철저한 분도 있지만, 대체로 약간의 관성과 사회관계망 속에서 유지되는 가치관이 아닌가 한다.
 <2차 송환>
<2차 송환>


영진위(영화진흥위원회)에 제작지원을 신청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 게 눈에 들어오더라. 제작 지원 신청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제까지 따로 지원을 신청해서 만든 적은 없었다. 제작비가 많이 안 들기도 했고,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10년간 재직하면서는 제자와 경쟁하게 되니 더욱 신청을 못하겠더라. 내가 타면 누군가는 타지 못하는 구조 아닌가. 요즘에는 제작비가 없어서 시작조차 못 한다는 풍조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건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다. 하다 보면 목돈이 필요하겠지만, 시작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도 북한 방문 경비 마련을 위한 게 아니었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거다. 북한 촬영은 결국 실패했지만, 당시 알아보니 약 1억 원이 넘게 들겠더라. 그리고 영화를 제작한 푸른영상 식구들의 요청이 컸다. 혼자 헐벗은 건 괜찮아도 그들도 그러면 미안하니 마지막에 지원금을 신청하게 됐다.

<상계동 올림픽>(1991), <송환>(2003), <내친구 정일우>(2017), <2차 송환>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업했지만, 그 수가 손에 꼽힐 정도다. 게다가 모두 수익과는 거리가 먼 독립 다큐멘터리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한예종 교수로 재직한 것 외에 다른 경제활동은 없지 않았나…
하하, 그동안 어떻게 먹고 살았느냐는 질문 아닌가. 그렇잖아도 그런 질문을 몇 번 받았다. 필요한 비용을 따져 보면 제작사인 푸른영상 운영비, 제작비, 그리고 개인적인 생활비로 크게 나뉜다. 제작비는 가급적이면 돈을 들이지 않고 만들고, 때때로 관계 단체의 소액 지원이나 공동제작 등을 통해 조달한다. 푸른영상의 운영은 ‘푸른회원’이 내는 연회비 10만원으로 충당한다. 개인 비용은 (예전에는) 노가다를 하기도 하고 촬영 알바도 하다가 결혼 후에는 다행히 아내가 교사라서… (웃음) 풍족하지는 않아도 버텨나갈 만큼 유지되더라.

<상계동 올림픽>과 <내 친구 정일우>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정일우의 철학 그러니까 가난이 오히려 복이라는 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삶이었다. 이후 가난한 삶, 다시 말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삶이 두렵지 않더라. 젊었을 때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하루 이틀 살다 보니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 시절에 만난 아내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철거민이든 노동자든 소외계층을 만났게 됐는데 그들에게 떳떳하게 카메라를 들이대려면 동등한 위치여야 할 것 같았다. 넥타이를 매고 번듯하게 차려입고는 못 하겠더라.
 <2차 송환>
<2차 송환>

당신에게 다큐멘터리 작업의 의미와 철학은, 그러니까 작업하면서 놓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철거민이든 장애인이든 그 누구를 찍든 돕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한다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뭔데?’ 이런 의문이 들거든. 정일우 신부가 머문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간 건 같이 있고 싶을 뿐 뭔가 도움을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월권이고 오만한 것이고 자신을 타자화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카메라에 담기는) 그들과 나와의 구분이 없어지는 게 최선이라고 본다. 상계동에 머물 때 ‘내가 여기 왜 있지? 용역 깡패와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같이 있을 거야’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렇게 그 안에 들어간 덕분에 <상계동 올림픽>은 그들이라는 3인칭에서 우리라는 1인칭으로 담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계속 살고 싶었지만, 내게 땅(다섯 평)이 조금 할당되면서 내부에서 다툼이 생겨 상계동을 떠났다. 떠나면서 도시 빈민의 삶은 끝까지 가져가겠다는 생각에 봉천동으로 이사하고 1990년에 결혼했다. 이후 1992년에 장기수분들을 만났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됐을까. (웃음)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궁금한 분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 같다.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 이슈는 있는데 솔직히 새로운 인연을 맺는 데 주저되는 면이 있다. 한 번 맺으면 끊기가 힘들어서 그렇다. 이 나이에 자신 없다. (웃음) 또 지금까지 이어온 인연, 봉천동이나 행당동의 철거민, 천도빈(천주교 도시빈민회) 회원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도 시간이 부족한 이유도 있다. 예전 천도빈 회원을 한 명 한 명 만나 벌써 60여 명의 인터뷰를 땄다. 가치있고 재미있는 작업이라 작품으로 내놓고 싶은 생각이 있다. 2025년 천도빈 40주년을 데드라인으로 생각 중이다. 1차 목표는 천도빈 회원이 이제는 늙고 이미 해산했지만, 잊지 말고 그 정신을 갖고 살자는 의미로 천도빈 회원끼리 영상을 공유하는 거다. 이왕 완성된 거! 개봉하게 되면 더 좋겠지.

마지막 질문이다. 김동원은 어떤 사람인가.
팔자가 바뀐 사람. 예전에는 집안도 꽤 살았고 촉망받았지만, 지금은 이 모양이라…팔자가 바뀐 게 맞다. (웃음) 근데 바뀐 게 좋다. 상계동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세상모르고 살았을 거다. 또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고 하니 똑똑하고 부지런할 거로 기대하는데 그 반대다. 게으르고 무계획하고 머리도 별로 안 좋다. 무계획적으로 우연에 기대어 20년에 걸쳐 <2차 송환>을 만들었다. 나 같은 무계획적인 사람이라 가능했지, 아마 다른 사람은 못 만들었을지도. 결론은 나 같은 사람도 쓸모가 있다는 거다! (웃음)


사진제공. 시네마달/ <2차 송환> 스틸

2022년 10월 6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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