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2010년 데뷔해 어언 12년 차 배우인 서현우, 영화만 무려 64편에 출연했다. 스쳐 지나가는 단역부터 씬스틸러 조역까지 대사 한마디 한마디의 소중함을 배운 귀한 시간이었다는 서현우.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부러지지 않는 기둥을 세우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카지노가 있는 정선을 배경으로 한 현실 누아르 <썬더버드>에서 그가 맡은 ‘태균’은 동생과 여타 고향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묘한 우월감과 뼛속 깊은 자격지심이 혼재된 인물이다. 찌질하고 비겁하지만, 아등바등 발버둥 치는 모습에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지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첫 주연작인 <썬더버드>로 그는 지난 8월에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배우상을 받는 영광을 차지했다. 또 동시기에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는 유창한 중국어로 거친 깡패를 소화해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중인 서현우를 만났다. 대기만성 배우라는 표현에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노력하게 하는 기분 좋은 말이라고 답한다.
<썬더버드>로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배우상을 받았다. 처음 주연을 맡아 수상까지! 먼저 축하드리고 소감 한 말씀.
얼떨떨했다. 함께한 배우와 스탭들 모두에게 준 상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장편 영화 주연을 하면서 앙상블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황정민 선배님의 ‘다 차려진 밥상’이라는 소감이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더라. 이전에는 내 연기에만 신경 썼다면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시야가 넓어졌다. 배우는 물론 스탭들의 피곤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희한한 체험이었다. 감히 감독님께 휴식을 제안하기도! 저절로 공동체 의식이 샘솟는 현장이었다.
스타일리시하고 몰입도가 높아 영화에 호평이 많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인 이재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데 영화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그렇지?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저예산 독립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용기 있는 스토리와 템포감 있는 구성에 놀랐다. 무엇보다 캐릭터가 살아있어 욕심났다. 어느 날 ‘꼭 같이해보고 싶었다고, 태균역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보내준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고 감독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해졌었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놀랐다. 도박과 사채 등에 몰린 인물들이 중심인 누아르를 쓴 분인데 여리여리한 모범생 같더라. 글과 외양의 괴리감이 흥미롭고, 대화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현장에서 경험한 감독님은 글과 외양 중 어느 쪽에 가깝든가. (웃음) 왠지 스타일이 확실할 것 같다.
현장에서 감독님은 게임의 룰을 만드는 마스터 같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규칙이 있으니, 그 안에서 자유롭게 놀아라’는 느낌이라고 할까. “연출자로서 저는 오케이에요, 태균은 어떠세요?” 이렇게 물어본다. (웃음) 아쉬운 부분을 말하며 다시 열어주되, 그럼에도 마지노선이 확실했다. 덕분에 배우들이 더욱 자유롭게 연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많이 찾지 않았나 싶다.
사북에서 촬영했다고. 입김이 나오는 걸 봐서는 상당히 추운 날씨로 보이는데 촬영 시기는.
2020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찍었다. 작업하다 보면 갑자기 눈이 내렸다가 또 갑자기 그치는 등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덕분에 로케이션 상황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런 날씨 자체가 사북의 특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지역이 뿜어내는 공기가 캐릭터의 빈 곳을 채워준다고 할지, 공간 자체로 극의 분위기와 정서를 크게 일궜다고 생각한다. 촬영하면서 때때로 식당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건이 무궁무진이더라. 학습과 영감의 장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딱 떠오른 표현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었다. 특히 당신이 연기한 ‘태균’이 그렇다. 동생 ‘태민’(이명로)이 아무 생각 없는 막가파라면 태균은 이리저리 살피고 재는 것 같은데 매번 헛발질한다고 할지, 짠한 게 인간적인 연민이 생긴다.
태균이라는 캐릭터의 본질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하고 구축해 나갔다. 찌질하고 동생에 자격지심도 있고, 유일하게 내세울 건 학벌과 인생 목표밖에 없다. 서울에서 자리잡으려는 그는 고향 사람과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돈이 필요한 것도 도박이 아닌 코인 때문이고 말이다. 이게 합리화보다는 코인이 훨씬 발전적인 방식이라고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거다. 태균이 시간과 상황에 따라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연기했다.
자기표현을 안 하는 혹은 못 하는 인물이라 답답했겠다.
자신감이 결여된 친구라 돌려서 말하는 게 익숙해서 그렇다. 좋아한다, 가고 싶다, 배고프다 등등 뭐 하나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흥미로운 점이 태균의 돌려서 하는 말이 잘 보면 그를 제외한 모든 인물에게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이번에 연기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다. 돌려서 얘기하는 사람은 모든 관계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처음으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인 막판 ‘태민’에게 내지르는 부분에서는 묘한 희열이 올라오더라. 평소 안으로 응축된 감정을 뾰족하고 폭발적으로 터뜨려야 했고, 대사가 전달되는 한에서 짐승 같은 포효로 표현해 봤다.
<썬더버드>를 통해 연기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간 노력해 온 부분이 힘을 빼는 작업이었다. 지금까지 선배님들의 공통적인 조언이기도 하다. <썬더버드>를 하며 힘을 뺀다는 게 뭘지 생각해 보니 관객이 느끼고 생각할 분량을 남겨두는 거더라. 배우와 관객이 서로 호흡하는 거지. 지금은 힘을 줄 때는 주고 뺄 때는 빼자고 생각한다. 요즘 트렌드는 마냥 힘을 뺄 게 아니라 효과적으로 힘을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콘텐츠가 범람하는 데다 (빨리 보기, 건너뛰기 등) 선택적 관람의 시대라 어떤 임팩트와 특별함을 제시해야 하는 것 같다. 이때 배우 개개인의 특별함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앙상블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미국 에미상을 수상한 <오징어 게임>의 경우, 들어보면 정말 팀웍이 좋았다고 하더라. 현장에서 주연 배우와 조·단역까지 조화를 이뤄서 만들었고 이런 에너지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앙상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은 현장이었다.
‘태민’과 그의 여자친구 ‘미영’(이설) 그리고 미영에게 호감을 지닌 ‘태균’, 말했듯이 생생한 캐릭터로 호흡이 좋더라. 이명로, 이설 배우와 함께 작업하며 느낀 점은.
이설 배우는 정말 살아 숨쉬는 것 같이 연기하는 배우다. 느껴지는 대로 감각으로 연기한다고 할지, 내심 부럽기도 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 하다못해 작은 소품 하나도 놓치지 않고 현장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한다. 극 중 태균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과 행동으로 터치한다. 귤을 까먹는 장면은 애드립이었는데 보면서 굉장히 ‘미영스럽’더라. 후배지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명로 배우는 긴 호흡으로 연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조바심도 보였지만, 스폰지 같이 흡수하더라. 야생마 같은 면도 있어서 태민에 너무 잘 어울린다. 참고로 실제로는 굉장히 도덕적이고 착하다. 인사도 90도로 할 정도인데 태민으로 분해 연기하면, 이런 동생 있으면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신한다.(웃음)
2010년 데뷔해 출연한 영화만 64편이다. 데뷔가 좀 늦은 감이 있기도 하다. (서현우 배우는 83년생)
출연료를 받고 활동한 걸 기준으로 하면 그렇지만, 이전에도 공연이나 단편 영화 작업을 했었다. 군대 다녀오고 좀 늦게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들어가서 졸업 후 정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는 ‘대기만성’ 배우라고 표현하기도.
그간 여러 단역을 거치면서 대사 한마디의 소중함을 배웠고, 공동 작업에 대한 개념도 생겼다.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그러면서 유연하여 부러지지 않는 기둥을 세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만성은 죽는 순간까지 될지 모르겠지만, 나를 움직이게 하고 노력하게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기분 좋은 표현이다. (웃음)
한예종 출신 배우가 다수인데 특히 친한 동료나 후배가 있다면.
잘된 동기도 후배도 많다. 최근 넷플릭스 <블랙의 신부>의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이현욱과는 특히 친하다. 힘든 시절 많이 의지한 동생이자 동기다. 꽤 오랫동안 동거까지 한 사이다.
영화 <유체이탈자>(2021)에서 액션을 처음 선보였는데 새롭더라. 혹시 준비된 액션 배우일까? (웃음)
자랑 같지만, 복싱 유도 태권도를 합쳐 도합 4단 유단자다. <유체이탈자> 당시 3~4개월 동안 액션스쿨을 다니며 열심히 트레이닝했다. 고무밴딩을 이용해 엎어치기를 연습하는 등 기본기를 많이 배웠는데 그게 이번 <썬더버드>를 찍으면서도 도움됐다. 무술 감독이 안 계실 때 (내가 다른 배우에게) 간단한 코칭을 할 수 있더라.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또 하고 싶고, 이제 액션이 동반되지 않는 장르는 없다는 생각이라 계속 염두에 두고 준비하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는 일명 ‘철썩’인 ‘철성’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박찬욱 감독의 월드에 합류하는 건 배우로서 큰 영광 아닌가. 박 감독은 당신을 캐스팅할 당시 (연기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애매한 여하튼)묘한 느낌을 주는 배우였다고 밝힌 바 있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전두혁’ 장군의 연기가 묘했다고 하셨다. 확실한 악역인데 그런 포스를 풍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성격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라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고. 이 부분이 딱 영화를 연출한 우민호 감독님과 내가 노렸던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선명하고 누구나 아는 인물인 데다 대중은 그에 대해 이미 어떤 감정을 확고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색을 입혀 제시하기는 망설여졌다. 그래서 무채색이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가져갔다고 설명드렸더니 박 감독님 본인도 그렇게 봤다고 하시더라.
<헤어질 결심> 당시 박 감독이 한 별도의 디렉팅은 없었나. 또 작업한 소감은.
감독님은 ‘철성’이 위압감이 들도록 덩치가 컸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때가 드라마 <악의 꽃>이 막 끝난 직후로 28킬로를 감량한 상태였다. 다시 몸을 키워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 거지. 증량과 감량을 세 번 정도 해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반전문가가 됐는데, 빼는 것보다 찌우는 게 훨씬 힘들다. 운동으로 일단 찌울 공간을 만들고 살을 채워 나가야 한다. 감량할 때 중요한 팁은 한 번 찌운 살을 뺄 때는 최장 6개월을 넘기면 안 된다. <썬더버드>는 <악의 꽃>과 <헤어질 결심> 사이에 찍었는데 이재원 감독께 ‘태균’이 점점 살이 붙을 수도 있다고 미리 얘기하고 들어갔었다. 다행히 20회차 찍는 동안 몸무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박찬욱 감독님은 손짓 하나 행동 하나까지 정말 디테일하시다. 놀라운 건 그렇게 미장센과 동선, 대사 하나까지 정교하게 설계했음에도 현장에서 배우가 어떤 제안을 하고, 좋다고 생각하면 바로 수용하신다. 또 이야기도 원체 많이 나누신다.
‘서래’(탕웨이)에게 중국어로 욕하고 때리기까지! 중국어가 정말 유창하던데 탕웨이 배우의 엄격한 레슨 덕분이라고.
우리끼리는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웃음) 중국어 선생님이 따로 두 분 있었지만, 탕 선배는 배우 입장에서 효과적으로 촬영하도록 발음을 잡아줬다. 부산에서 촬영할 때는 숙소에서 따로 개인레슨도 해주고 감격이었다. 현장에서 중국어 선생님이 발음 부분을 OK하고, 감독님이 연기를 OK해도 탕 선배가 오케이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못했다. ‘컷’ 소리가 나면 벌벌 떨며 선배를 쳐다보기도. 한 번은 선배가 마지막 한 단어만 고치면 좋겠다고 했고, 이에 감독님이 후시녹음으로 하면 안 되겠냐고 제안하니 현장에서 해야 자연스럽다고 하더라. 덕분에 중국인이 정말 자연스럽다고 말할 정도로 나와서 뿌듯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아다마스>에, 개봉 임박한 <정직한 후보2>까지 쉴 틈없이 일하고 있다. 장르와 역할도 제각각이라 보는 맛이 있다.
솔직히 감개무량하다. 무엇보다 중복된 역할 없이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는 건 배우로서 큰 행복이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캐릭터를 보일 수 있다는 데 감사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서현우는 어떤 사람인가.
MBTI 유형 중 ENFJ이다. ‘정의로운 사회운동가’라고 하는데 얼추 맞는 것 같다. 사람을 좋아하고, 관찰하는 걸 좋아하고, 소통하는 걸 좋아한다. 지금처럼 인터뷰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좋다.
사진제공. 목요일의 아침
2022년 9월 27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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