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내가 죽던 날>의 어떤 점에 끌렸나.
시나리오 개발 단계부터 소식을 듣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힘을 실어주면 좋겠다면서 주인공이 김혜수 배우라고 하더라. 좋은 배우와 함께하는 것만큼 즐거운 작업은 없다.
순천댁은 식물인간이 된 조카를 떠안아 보살피는, 평범한 시선에서 보자면 삶이 무거운 인물이다. 어떻게 접근했는지.
그의 전사는 모두에게 물음표라 나라면 하고 가정을 해봤다.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조카가 있는데 오빠 혹은 남동생이 죽은 후 그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지 말이다. 불행할까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겠더라. 먼저 간 형제를 대신해 잘 보살필 것 같더라.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웃음) 만약 주변에 순천댁 같은 분이 있다면 말벗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사고로 말을 못 하게 된 캐릭터라 대사 없이 인물을 표현해야 했다. 연기 주안점은.
말로 소통할 수 없으니 일단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순천댁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입장이라 ‘현수’가 등장할 때마다 긴장한다. 그런 상태를 너무 티 나지 않으면서도 보이도록 조율하는 게 관건이었다. 전작 <기생충>이나 <동백꽃 필 무렵> 등에서 맡은 캐릭터가 반전을 지닌 인물들이라 이번에도 관객이 뭔가 있다고 느낄 수가 있어, 그런 선입견을 희석하고자 최대한 일상성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연기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순천댁은 선천적인 농아가 아니라 농약을 마신 후 성대 등 발음 기관이 타 버려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다. 극 중 한 번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촬영 때도 후시작업에서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감독님이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줘 지금 같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순천댁은 현수와 말 대신 글로 소통한다. 필체를 고심한 끝에 왼손으로 직접 썼다고.
오른손으로 쓰니 예전 시골 할머니가 쓴 듯한 느낌이 안 나오더라. 그래서 왼손으로 써보고 연습한 것을 보여주니 감독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그러면서 받침이 틀리는 것, 비뚤비뚤하나 꾹꾹 눌러쓰는 것 등의 예시를 보여줬고 그에 따랐다.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신예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음… 마른 분이라 체력이 약할 거로 예상했는데, (웃음) 확실히 글을 쓰는 사람이 지닌 강인함이 있더라. 침착하면서 집요하게 의도한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힘이 있는 분이다. 남들이 언급하지 않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분이라 좋은 창작자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고 싶다.
요 몇 년 여성 감독과 여성 서사가 많이 증가했다.
여성 감독의 진출이 활발해지니 여성 서사가 증가한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만큼 관심도 커지고 전형적으로 소모되던 여성 캐릭터의 활용도 훨씬 다면적으로 됐다. 나 같은 조연에게도 좋은 기회이고. (웃음) 이번 <내가 죽던 날>은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해 딱히 여성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보니 감독과 배우 등 여성 스탭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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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현수와 순천댁이 만나는 신이 극의 하이라이트 중 한 장면이 아닌가 한다. 김혜수 배우는 촬영도 리허설도 아닌데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그렇게 났다던데, 당신은 어땠나.
우리가 사실 현장에서 거의 말이 없는데 그런데도 표정에서 다 느낀다. 그렇게 교감이 오가는 현장이었다. 혜수 씨가 주변에 굉장히 잘한다. 좋은 배우가 있으면 추천하고, 권하고, 동료로서 연대하고 격려하는 면이 뛰어나다. 선배에게도 받기 힘든 격려와 지지를 이번에 혜수 씨에게서 받았다. 정말 마음 부자이고 멋있는 사람이고 참 큰 배우다. 나도 주변에 애정 표현을 많이 해야겠다고 느꼈다. 며칠 전 문자를 나눴는데 계속 서로를 지켜봐 주는 친구로 남자고 했다.
당신 또한 현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배우 중 한 명이다.
현장에서 내 주요 관심은 우리 팀이 행복하게 촬영하는 거다. 일하다 보면 짜증도 나고 힘든 순간이 당연히 있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한다. 따지고 보면 감독님도 현장에서 참 불쌍하거든. (웃음) 나만 그런 게 아닌데 만약 좋게 봐준다면, 선배나 동료가 하던 행동을 받아 나 역시 하는 것뿐이다. 아, 또 술을 잘 먹는 것도 있고!
기억에 남는 대사를 꼽는다면.
‘인생은 길다’라는 대사다. 몸이 아파 배우로서 위기를 느낀 적이 있었다. ‘배우를 접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는데 그때 치료하던 한의사 선생님이 ‘인생은 길다’라는 똑같은 말씀을 하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낑낑대면서 혼자만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면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더라. 시나리오에 써진 그 대사를 보며 ‘아, 사람들의 고민이 보통 비슷한가 보다’ 싶으면서, 힘들어도 그 시기를 넘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 대사는 꼭 가져가자고 했었다.
영화를 볼 때는 김혜수의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끝나고 나니 이정은의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웃음)
김혜수의 영화가 맞다! (웃음) 시나리오를 보면서 순천댁에 귀착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우리 영화는 현수의 이야기다. 그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관객이 현수를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포인트가 맞춰졌다. 그 과정에 일조했다는 것에 충분히 보람을 느꼈다.
관람 포인트를 꼽는다면.
어두운 영화가 절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위로를 받아 갈 수 있을 거다. 또 김혜수 배우의 색다른 모습과 이정은의 말없는 연기 그리고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의 깜찍한 꼬마였던 노정의 배우의 성장을 볼 수 있다는 것 정도다.
#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명품 조연으로 톡톡히 활약해 온 이정은이지만, 그를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한 것은 <기생충>의 가정부 ‘문광’이다. <기생충>이 칸과 아카데미를 휩쓸 때, 이정은은 ‘자만하게 될까 봐 두렵다’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유례없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조차도 분위기에 취하거나 휩쓸리지 않았던 그는, 공언한 대로 이후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 그리고 얼마전 종영한 <한번 다녀왔습니다>까지 묵묵히 연기를 이어왔다.
<기생충> 때 자만하게 될지 두렵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어땠나.
다행히 안 했더라. 들뜨지 않고 일상으로 복귀했고 이전보다 작품이 많이 들어오는 편이라 열심히 참여했다. 이후에도 좋은 작품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낙담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그간 격려와 베풂을 많이 받았으니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국내 캐스팅 제안이 많아진 것도 그렇지만, 심지어(?) 할리우드에서도 콜이 왔다던데.
예전보다 많이 찾아 주시는 것은 맞다. 드라마를 연속으로 해서 앞으론 작품에 텀을 좀 두려고 한다. 체력 안배가 필요하겠더라. 할리우드 콜은 규모가 큰 시나리오는 아니었고 동양 배우가 2~3일 정도 촬영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기생충> 캠페인 때 나를 눈여겨보신 감독님이 제안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무산됐다.
인생의 예기치 못한 난관에 맞닥뜨린 현수나 세진(노정의)처럼 또는 순천댁처럼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을 거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때였다. 대사 한 구절을 그렇게 못 풀어내겠더라. 심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할 수가 없는데 그게 또 너무 속상했던 거지. 마침 촬영이 미뤄지면서 며칠 여유가 생겨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준비 하나도 없이 영국 런던에 갔었다. 마침 영국 행 티켓이 싸게 나와 두 시간 만에 짐 싸서 나갔었다. 거기서 자연사 박물관을 갔었다. 생명의 잉태가 자연스러운 것 같아도 얼마나 많은 보살핌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는지를 보면서 우울감이 내려갔었다. 서울에 돌아와 새순이 돋아나는 것을 보는데 그렇게 예쁘더라. 엄마한테 물어보니 생물학적으로 늙어가는 거라고 하시더라.(웃음) 어쨌든 이후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를 잘 끝냈다. 늙음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한 계기였던 것 같다. 그 후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 엄마역도 잘 할 수 있었다. 당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너 부자냐!’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데뷔 29년 차다. 그간의 연기 원동력은 뭘까.
연극을 오래 해 드라마와 영화 쪽으로 넘어온 지는 그리 길지 않다. 무대에 섰을 때나 지금이나 노출이 많이 될수록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을 많이 할수록 기대감은 커지고 신선함은 떨어지고 또 책임감은 무거워진다. 하지만 그것도 연기를 계속하기에 느끼는 감정 아닌가. 기쁘게 받아들이려 한다. 원동력은… 대본 연구를 많이 하고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 한다. 가능한 한 산책을 많이 하면서 머리를 비우기도 하고 일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기도 한다.
30주년을 맞으며 앞으로 목표나 포부가 있다면.
지금 바로 생각나는 건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신수원 감독님의 <오마주>가 내년에 개봉하는 거다. 시나리오가 아주 좋은 작품이라 함께 나누고 싶다. 아직 후반작업과 후시가 남았지만, 감독님과 스태프가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물이니 꼭 개봉하고 싶다. 이번 <내가 죽던 날>처럼 관객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 질문!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이 있다면.
드라마 <로스쿨> 촬영 중인데 뒤늦게 불이 붙는지 아주 흥미롭게 작업하고 있다. 배역 자체가 크지는 않으나 함께하는 김명민 배우가 아주 좋은 기운을 가진 배우라는 걸 느끼는 중이다. 어제 준비 차 한 판사님을 만났다. 기꺼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눠주는 그분을 보며 연기적으로 생활적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받았다. 이런 경험이 참 소중하다.
사진제공_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2020년 11월 26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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