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개봉하기까지 순탄치 않았다고 들었다.
우선 다양성을 중시하는 내 입장에서 <내가 죽던 날>은 반가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배우 개인의 역량으로는 다양성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고 또 투자자의 생각은 분명 (나와는) 좀 다르다고 본다. 아무래도 투자자들은 관객을 많이 유치할 수 있을 만한 요소를 지닌 영화를 선호한다. 그런데 우리 영화는 등장 인물이 대부분 여성이고 과정이 어둡고 아프지 않나. 게다가 자극적인 소재나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어서 실제로 대본을 수정하면 투자를 하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거절했고, 과정이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도 영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SF나 히어로물처럼 유쾌하고 스펙터클한 영화가 주류인 요즘 분위기에선 투자자들도 용기가 필요한 일종의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영화들이 힘들지만 끝까지 버텨주기에 영화계의 다양성이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설명한 것처럼 자극적인 요소보단 감정과 드라마가 주가 되는 작품인데 첫인상은 어땠나.
글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위로가 있었다.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현수’의 시선과 상황, 감정을 자연스레 따라가게 되고, ‘세진’의 상처를 느끼고, ‘순천댁’에게 연대감을 갖게 되더라. 신기하게 시나리오보단 꼭 소설책 같았다.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고 그래서 더 온전히 마음이 갔다. 나보다 이 이야기가 더 필요할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니,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보통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감독의 전작을 단편까지 모두 다 본 뒤에 결정하는데 이번에는 다 건너뛰고 바로 하겠다고 했다. (웃음)
’현수’를 비롯한 등장인물뿐 아니라 제작진들도 거의 여성이더라. 거기서 오는 차이가 있었을까.
당시에는 딱히 그런 점을 신경 쓰지 않았는데 후에 들은 바로는 유난히 여성 비율이 높았다더라. (웃음) 성별을 떠나 작업하면서 정말 편안했고 그들의 남다른 간절함에 나도 감화됐다. 투자부터 순조롭지 않았지만, 우리는 항상 이 이야기를 어떠한 변화 없이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가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서로를 다독이며 차분하게 해결해갔다. 또 이정은, 김선영, 문정희 배우 같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 단순히 함께 작업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나누며 크고 작은 위안을 받았다. 편의상의 배려가 아닌 진심으로 서로를 위해준다는 게 눈에 보였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더라.
현장분위기가 편안했지만 부담이 없진 않았을 거다. ‘현수’의 시점에서 영화가 진행되다보니 대사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비중이 높다고 부담을 갖진 않았는데 그보단 너무나 좋은 이야기기에 영상으로 잘 전달할 수 있을지가 가장 두려웠다. 배우와 제작진은 이미 스토리에 충분히 공감한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처음 보는 관객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 않나.
수사가 진행될수록 세진의 비극적인 상황에 더욱 깊이 몰입하면서도 또 개인적인 사정으로 힘들어하는 ‘현수’를 연기하는 건 어땠나.
억지로 연기하지 않아도 정말로 자연스럽게 눈물이 수시 때때로 흘렀다. 나중엔 배우끼리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나더라. (웃음) 촬영할 땐 메시지 전달에 방해되는 부수적인 걸 최대한 배제하려 했다. ‘현수’의 고통을 최대한으로 전하기 위해 초췌한 민낯으로 출연했고 잠에 들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을 더 강조하려 했다. 보통 배우들이 촬영에 들어가면 잠을 잘 못 자는데 그래서 눈이 충혈된 ‘현수’의 모습도 꾸며낸 게 아니었다.
이뿐만 아니라 ‘현수’가 꾸는 악몽은 본인의 경험이 반영됐다고.
내 개인적인 경험을 캐릭터에게 반영하는 건 굉장히 조심스럽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기에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지도 의문이고. 그렇지만 이 경우는 나와 ‘현수’의 극중 상황이 묘하게 잘 맞아떨어져서 할 수 있었던 시도였다.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영화가 오롯이 ‘현수’의 시선으로 전개되니 어떻게 하면 관객이 잘 따라올 수 있을까 스텝들과 상의하다 자연스럽게 내 얘기가 나왔다. ‘현수’의 심정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것들이 필요했고, 제작진 중 하나가 내가 전에 한 꿈 이야기를 언급하며 현수의 상황과 들어맞는다고 하더라. 그 장면에서 나온 대사도 내가 쓴 거다. 일전에 굉장히 힘들었던 순간 실제로 꿨던 꿈이 그랬고, 내가 얼마나 지치고 불안정한지 꿈에서 깨고 나서야 알게 됐다. 현수도 마찬가지지 않나. 캐릭터도 그렇고 영화의 제목과도 맞는다고 생각해서 나도 시나리오에 추가하는 데 동의했다.
제목이 어떤 뜻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영화가 ‘세정’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니 표면적으론 거기에 맞춘 제목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감정적으로 사망선고를 내려버린, 그래서 마음이 죽어버린 날이라고 받아들였다.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을 연기한 이정은 배우와 처음 작업했는데 평소 그에 대한 칭찬을자주 하더라.(웃음)
이정은씨의 캐스팅 소식 듣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웃음) ‘순천댁’이야말로 우리 영화의 메시지가 함축된 중요한 인물인데 그 역할을 정은씨가 맡는다니 굉장히 설렜다. 좋은 배우가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데, 정은씨에게선 그 이상의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경이로운 정은씨’라고 부른다. (웃음) 좋은 배우가 꼭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정은씨는 그게 되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사람이나 배역이나 마음이 따뜻하고,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위로해주는 그런 분이다.
과분한 환호 속에 사는 만큼 과한 상처를 받을 때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가끔가다 뜻밖의 위로를 만나게 되면 그 감정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서 자꾸 얘기하게 되는 거 같다. (웃음)
어떨 때,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받나.
얼마전 ‘마음챙김의 시’라는 시집을 선물 받았는데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루이스 글릭 작가의 ‘눈풀꽃’이란 시는 꼭 나를 위해 쓰인 것만 같았다. 시가 주는 따뜻한 위로와 응원이 우리 영화와 닮았더라. <내가 죽던 날>도 시나리오가 마치 세상에 나 혼자만 쓸쓸하게 남겨진 거 같은 외로운 순간, 다시 한 번 힘을 내보라고 북돋아준다는 거 같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좋은 책이나 영화, 음악을 만날 때도 위안을 받지만 그래도 결국 남는 건 좋은 사람들인 거 같다.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건 내 곁에 항상 있어준 사람들이다. 그 순간엔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지만, 머지않아 그들의 덕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소중해지고 의미가 깊어진다.
좋은 사람이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일까.
선의를 베푼다고 다치거나 손해보는 건 아닌 데 요즘 세상에 마냥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좋고 따뜻한 것들은 혼자만 갖고 있지 않고 모두가 나누는 사람이 좋은 사람 같다. 우선 나부터가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스스로와 주변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라고 믿는다. 최종 목표는 좋은 배우이자 동시에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웃음)
당신 또한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꼽히지 않나.
고맙고 또 놀랍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뿐 세상엔 나보다 실력 있는 배우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그 때문에 더 치열하게 노력하기도 한다. 어린 후배들이 나를 좋게 봐주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아닐까 싶다. 사실 이번 작품에서 노정의양 만큼 어렸을 때의 나는 철이 없었다. 삶의 경험이 적었던 어린 시절에 갑자기 데뷔하며 삶은 점점 더 편협해졌고, 진짜를 받아들이기엔 나는 너무 어리고 약했다. 당시엔 학교도 가지 않고 어딜 가든 막내 취급받는 게 그저 좋았는데, 어느 순간 그런 시절은 다 지나고 내가 내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할 때가 오더라. 그제서야 배우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를 체감했던 거 같다. 30대 들어 뒤늦게 배우생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전도연이나 염정아 배우 매니저에게 무턱대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평소에 뭘 하며 지내냐고 묻기도 하고. (웃음)
결과가 어땠나. (웃음)
사실 그 과정에서 발전보단 오히려 내게 결핍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어른들을 흉내 내봐도 가짜는 금방 들통 나기 마련이더라. 결국 스스로 갖춘 게 별로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속이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많이 불안했다. 그런데 고민만 하다가는 결국 고민에서 끝나게 되는 거 같다. 요즘엔 그냥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게 살고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알고 느끼려고 한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다보면 그게 결국 좋은 베이스로 남고, 내면이 더 알차지는 만큼 연기적으로도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연기경력이 30년이 넘었는데도 더 나은 연기에 대한 욕심은 끊이지 않는 거 같다.
여전히 연기는 어렵다. 예전엔 상상력을 동원해 내가 경험한 적 없는 걸 느끼고 알게 되는 것 자체로도 좋았는데, 끝내는 실력의 한계에 부딪히더라. 그 다음엔 최대한 많은 걸 경험하려 했다. 다양한 경험이 있으면 구태여 무언가를 더하지 않아도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경험과 표현은 전혀 다른 영역이고 지금까지도 배우로서 풀어야 할 숙제다. 하지만 연기적으로 미흡해서일까, 나는 나를 좋아하고 괜찮게 여기는 편인데 연기할 때의 내가 싫다. 모니터링을 할 때마다 번번히 내 한계를 직면하게 되니 현장은 여전히 가장 두려운 곳이다.
사실 더 어릴 적엔 대선배님들만 보면 도망치기 바빴다. 왠지 눈이 마주치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내가 선배님 말씀을 못 알아듣고 실망을 안겨 드릴까 무서웠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좋은 배우를 보면 나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어른이고 선배 같고 마냥 편하지는 않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조우진씨의 연기를 보고나선 어찌 이런 훌륭한 분의 어깨에 감히! 하면서 모니터링할 때도 멀찍이 서 있었다. (웃음)
혹시 작품에서 만나고 싶은 배우가 따로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김혜자 선생님을 정말 존경하는데 영화, 드라마, 하다못해 봉사활동 현장에서도 선생님의 얼굴을 뵈면 알 수 없는 감동이 느껴진다. 존재만으로 감사하고 숨결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달까. (웃음) 선생님의 언행 하나하나에 삶의 궤적이 묻어나오는 거 같다. 언젠가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를 보는데, 선생님과 연기하는 한지민씨가 어찌나 부럽던지! (웃음) 기회만 온다면 선생님과 꼭 연기해보고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한 행복이 있다면.
예전부터 바느질을 참 못했는데 최근에 친구 가디건에서 떨어진 단추를 꿰매준 적이 있다. 생각보다 바느질이 잘 돼서 그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웃음) 또 지인들과 소규모로 만나 음악과 영화 얘기를 하면서 시간 보낼 때도 소소하게 즐겁고 행복하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대접하고, 다 같이 모여서 수다 떠는 재미를 뒤늦게 알아 아쉽다.
사진제공_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