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중국 땅에 묻혀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한국 사찰에 모셔진 금동불상. 마음먹은 문화재는 무엇이든 <도굴>해내는 ‘꾼’들이 모였다. 천재적인 도굴 실력을 갖춘 ‘강동구’(이제훈), ‘존스 박사’(조우진), ‘삽다리’(임원희)와 계약을 맺은 건 최고급 문화재를 모아들이는 엘리트 큐레이터 ‘윤실장’(신혜선). 이들의 새로운 미션은 ‘조선의 엑스칼리버’로 불리는 서울 선릉 속 보검을 훔쳐내는 것이다.
땅굴을 파고, 하수도를 지나고, 무덤 속에서 활약하는 ‘꾼’들의 배경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상황. 박정배 감독은 수조 세트 안에 땅굴을 짓고 특수효과팀을 동원해 물살을 흘려 보내며 원하는 장면을 얻어 나갔다. 감전 사고 같은 안전 문제까지 신경 써야하는 촬영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 어려움을 잘만 극복한다면 관객에게 톡톡한 볼거리를 선사할 만한 작품이 되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과정은 어렵지만, 그만큼 신선한 영화가 될 것 같았다.
<마이 파더>(2007)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3)까지 황동혁 감독의 작품에서 조감독으로 오래 일했다.
<수상한 그녀> 이후 몇 년간 내 작품 시나리오 작업을 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때 황동혁 감독님과 그가 연출한 <남한산성>을 제작한 싸이런픽처스 김지연 대표님이 <도굴>이라는 시나리오를 전해줬다. 작품의 첫인상은 “어렵지만 신선한데?”였다.
어떤 점이 어렵게 느껴졌나.
땅굴, 하수도, 무덤 속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미술 부분에서 겁이 좀 났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갈 세트가 필요한데 ‘그냥 잘 만드는’ 정도로 될까? 돈 쓴 티가 날까? 싶었다. 땅굴 안에서 물이 차오르는 신도 있는데 물을 얼마만큼 퍼부어야 적당한 장면이 나올지… 파주 쪽 영화 세트장에서 수조 안에 땅굴을 지었고, 특수효과팀이 펌프를 이용해 물살이 생길 만큼 물을 흘려가며 촬영했다. 감전사고 등 안전 문제도 대비하느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시행착오를 굉장히 많이 겪었다.
어려움이 예상됐음에도 <도굴> 연출을 선택했다.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앞서 말한 어려운 점을 잘 극복한다면, 그만큼 볼거리가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 그게 좋았다. ‘도굴’이라는 소재가 한국 영화 최초인 만큼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주인공들은 중국 땅에 묻힌 고구려 벽화를 떼어오고 한국 사찰에 모셔진 금동불상도 거뜬히 훔치는 ‘꾼’이다. 그들의 활약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한 사전 취재가 필수였을 것 같다.
문화재 관련 사건을 전담하는 형사님을 만나서 도굴하는 사람들의 기술을 전해 들었다. 실제 있었던 과거의 도굴 기사도 많이 찾아봤다. 고구려 벽화 도굴은 2000년대 초반 있었던 실제 사건이다. 한국 사람이 중국 인부를 사서 영화처럼 다이아몬드 실톱이라는 걸 동원해 도굴했다는데, 중국 작업자만 잡혀 처벌받고 (진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금동불상 도굴 역시 국내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이후 전개되는 서울 선릉 도굴 부분은 작품이 빚어낸 허구의 영역이다. 왜 선릉을 택했나.
최초 시나리오부터 선릉 도굴이 설정돼 있었다. 앞선 도굴 장소가 사람들 눈길이 없는 고립된 산속이었다면, 선릉은 도심 한 가운데인 만큼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도굴하는 과정이 주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였다.
이 모든 과정의 주도자인 ‘강동구’역의 이제훈은 그동안 <박열>(2017) <사냥의 시간>(2000) 등으로 보여준 묵직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가볍고 느물느물해 보이는 연기에 도전했다.
이제훈의 연기력은 또래 중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굴>의 ‘강동구’처럼 캐주얼한 역할을 맡은 적은 없더라. 워낙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인 만큼 그의 다른 지점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만의 묵직한 느낌을 덜어내기를 요구했다. 물론 ‘주문하면 다 되는 배우’인 만큼 내 생각 이상으로 잘 해줬지만, 한편으로는 ‘강동구’라는 캐릭터가 아무리 잔망스럽게 떠들어대도 이제훈 내면에 지니고 있는 어떤 묵직함이 완전히 덜어내 지지는 않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존스 박사’(조우진)와 캐릭터가 겹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우진이 연기한 ‘존스 박사’, 신혜선이 연기한 ‘윤실장’, 임원희가 연기한 ‘삽다리’ 등 주변 인물도 다채로운 편인데.
신혜선은… 마치 공부를 하나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시험을 보면 1등만 하는 캐릭터처럼, 사기꾼 같은 느낌이었다.(웃음) 현장에서 분장이 끝나면 미술팀 작업을 같이하거나 여러 세팅을 도와주는데, 일단 연기를 시작하면 (자세가) ‘딱’ 잡힌다. 인상적이었다. 조우진은 자기 노력으로 촬영장 분위기를 경쾌하게 이끄는 배우다. 주변 사람을 잘 관찰하는 편이라 성대모사도 엄청 잘 한다. 고민도, 아이디어도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임원희는 현장에서는 다소곳한 편인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이 있지 않나. 그런 점을 잘 이용했다.
영화 현장에서 오래 일했지만, 배우와 현장 상황 전반을 통솔하고 모든 결과의 최종 책임을 지는 연출자의 자리를 경험한 소감은 또 다를 것 같다.
조감독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타임테이블(시간표)에 예민한 편이다. 몇 시에 집합하고, 언제 밥을 먹고, 몇 시까지 일정을 끝내야 할지 자꾸 신경 쓰게 되더라. 그게 감독으로서도 옳은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이라면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한 노력만 해도 부족한데, 본의 아니게 쓸데 없는(?) 행동을 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조감독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맞춰 기상 여건, 배우 스케줄을 조율해가며 촬영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 도움이 된 것 같다.
감독의 이름으로 대중을 만나는 일은 처음이다. 그 부분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 같다.
그게 제일 긴장된다. 데뷔하는 다른 감독님보다, 유독 더 떨고 있는 것 같다!(웃음) <도굴>로 데뷔까지 6~7년 정도 걸렸는데 그러면서 힘든 시간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변한 건지,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에 적응이 잘 안 된다. 담이 작아졌나.(웃음) 붕 떠있는 느낌이고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이런 상태에서는… 따뜻한 한마디가 힘이 된다. 물론 쓴소리도 듣게 되겠지만, 칭찬을 들으면 ‘잘 해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작업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은.
편집된 장면이 있다. 엔딩에서 주인공들이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지 않나. 일본의 문화재를 털러 가는 장면인데 그때 ‘삽다리’역의 임원희가 ‘아이 러브 독도’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분명 나쁜 놈들이지만, 건전하고 올바른 의식이 있는 일당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억지로라도 넣었는데 최종본에서는 안 보이더라.(웃음)
<도굴> 이후는 어떤가. 제약 없는 연출 여건이 주어진다면 어떤 장르를 맡고 싶은지.
휴먼코미디, 혹은 청춘멜로. 음악을 곁들인 작품도 좋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갈증이 있다. 일단은 그런 작품을 하고 싶다고 주변에 많이 떠들고 다닌다. 이러다 보면 어디선가 기획되고 있는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겠지.(웃음)
2020년 11월 10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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