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항상 엄마에게 말 한다. 그 일 안 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남편을 사고로 떠나보낸 후 12년 동안 한집에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산 엄마 최미경 씨에게, 딸 한태의 감독이 반복적으로 읊어왔다는 말이다. 자기 출근도 바쁜 와중에 할아버지의 아침을 차리고, 때마다 집안의 차례까지 도맡아 지내는 엄마의 고루한 ‘며느리의 도리’가 늘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상황. 고정된 줄만 알았던 현실이 변화를 맞은 건 “이제부터는 따로 살자”는 할아버지의 한마디 덕분(!)이다. 하지만 설렘 가득한 한태의 감독과 달리 생각지도 못한 독립을 준비해야 하는 엄마 최미경 씨는 두려움부터 앞선다. 정말 이렇게 이 집을 나가도 괜찮은 걸까? <웰컴 투 X-월드>는 그런 엄마의 삶에 깊게 관여해 용기를 보태고 지지를 보내는, 딸 한태의 감독의 따뜻한 마음이 가득 담긴 다큐멘터리다.
엄마와 할아버지의 일상생활과 집안 모습이 다 드러나는 작품을 찍었다. 분명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나만 나오는 게 아니다 보니 걱정되는 부분이 많았다. 20년 넘게 같이 산 가족끼리는 이 사람이 이런 면도 저런 면도 있는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걸 알지만, 관객은 내가 선택한 영상으로 내 가족을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편집을 신중하게 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컨대 어떤 오해가 가장 걱정됐는지.
이야기 전개상 엄마가 할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힘들고 속상했던 부분이 꼭 필요했다. 그런데 그걸 어느 수준으로 보여줘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그저 같이 살기에 힘들기만 한 분으로 인식된다면, 그건 분명 내가 아는 할아버지의 전부는 아니다. 할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스위치에 색칠을 하시고, 베란다에 있는 식물을 보러 가기 위해 담장(베란다 문턱)을 바로 넘어 다니시는 귀엽고 재미있는 분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할아버지를 좀 잘 설명하려고 했다.
당초 그를 어떻게 카메라 앞에 세웠는지 궁금하더라. 내용상 할아버지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그릴 수는 없는 작품인데, 작품을 보고 나신 뒤의 반응은 어떠시던가.
처음부터 장편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찍은 게 아니다 보니 마치 학교 과제를 하듯 우리 가족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는 거라고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러니 집에 둔 카메라를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된다고 말이다. 워낙 말씀하시는 걸 좋아하셔서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를 하면 두세 시간은 기본으로 찍을 수 있었다. “옛날엔 어떠셨어요”하는 순간 바로 앨범, 족보를 꺼내시니까(웃음). 영화를 완성한 뒤에 할아버지 댁에 가서 보여드렸는데 한 5분 보시고는 언제 끝나냐고 하시더라!(웃음) 조만간 극장으로 초대해 다시 보여드릴 예정이다.
당신과 엄마가 이사를 나가자마자 할아버지가 집을 말끔하게 정리해 두신 장면도 기억난다.(웃음) 할아버지 역시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셨던 것 같다.
이사하던 날 저녁 몇 가지 짐을 가지러 할아버지 집에 다시 들렀는데 기분이 이상하더라. 매일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던 집인데 이제는 벨을 눌러야 한다는 사실이 뭔가 찡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을 열어보니 너무나 정리가 잘된 새집인 거다.(웃음) 다음다음 날 다시 찾아갔을 땐 종이에 일종의 생활수칙 같은 것도 인쇄해 붙여놓으셨더라. 물론, 나는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가 우리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작 엄마가 서운해하셨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는 여러 스트레스 속에서도 할아버지를 살뜰히 챙기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았나.
복잡한 감정을 나에게 수다로 푸셨던 것 같다. 벌써 집을 싹 정리하셨네? 빨리 혼자 사시고 싶었나봐! 아님 이런 거였을까? 혹은 저런 거였을까? 하면서 계속해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시더라.
당신 입장에서는 독립이 정말 좋았을 것 같은데, 엄마에겐 마냥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엄마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엄마가 지나온 시대의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 25살 넘어서 결혼하면 이미 늦은 거였고, 결혼을 하면 가정을 위해 충실해야 했고, 그러려면 직장은 안 다니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때다. 사람이 한 번에 바뀌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50년 동안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엄마니까 그런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한 번쯤 모녀간의 큰 싸움 장면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물론 평상시에는 싸우기도 하지만, 이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에 있어서만큼은 엄마의 기분을 많이 살폈다. 내가 방 없이 생활해온 걸 엄마가 굉장히 미안해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부채감이 있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이사 문제에 관한 말을 잘못하면… 그래서 굉장히 조심했던 것 같다.
엄마가 집안의 차례까지 도맡아 치르는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법한데.
그 문제로는 지난 추석까지 싸웠다. 이사를 나온 직후 설날에도, 그해 추석에도, 그다음 설날까지도 엄마는 나와 둘이 차례를 지냈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해준 조상에게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내 엄마를 고생시키는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그래도 해야 된다”고 하더라. 거의 벽을 보고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말을 계속하면 싸움만 나니까 결국 어쩔 수 없이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전만 부쳤다. 난 결혼도 안 했는데 명절 스트레스를 받은 거다.(웃음)
설마, 지금도 차례를 지내나!
재미있는 게 뭐냐면, 우리가 할아버지 집에서 이사를 나간 뒤 친가는 더는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거다. 조상을 절에 모셨다고 하더라. 그럼, 그동안 우린 왜 그 일을 한 거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욱더 강하게 차례를 그만 지내자고 했다. 엄마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 추석에는 차례를 준비하는 대신 어디 큰 공원에 가서 산책이나 하지 않겠냐고 묻는 거다. 심장이 ‘쿵’ 할 정도로 놀랐다. 절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 있는 건가?(웃음)
심경에 변화가 있으셨나 보다.
(끄덕끄덕) 그런데 막상 그렇게 지내보니, 엄마 입으로 “이거 안 해도 되는 거였네”라고 하는 거다. 그 말이 너무 좋았다. 나도 느낀 게 있다. 강압적으로 엄마 생각을 바꾸려 하지 말고, 엄마가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늘 “그런 식은 틀렸다”고 말했고 엄마는 그런 점 때문에 위축돼 있었던 것 같다.
각자의 공간이 생기면서 모녀에게는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것 자체가 환경의 긍정적인 변화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가지고 있던 걸 빼앗기면 굉장히 불편하다. 핸드폰 같은 게 그렇지 않나. 그런데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물건이라면, 그게 굳이 왜 필요한지를 모른다. 내 경우에는 잘 데가 있고, 책상이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굳이 다른 공간을 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사를 나와보니 할아버지 집에 사는 동안은 하지 못했던 걸 누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 같다.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이지만, 엄마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한 인물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주변인의 증언이 담긴 인터뷰를 제외한 셈인데.
본래는 할머니, 작은 아빠, 이모를 모두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인터뷰라고 해서 그런지 다 좋은 말만 해주더라. 나는 엄마가 이렇게 대단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었다. 딸로서 엄마를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는지를 담는 데 집중하는 게 차라리 혼선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로써 영원히 남을 작품이 탄생했다.(웃음)
어릴 때부터 뭔가를 숨기는 걸 싫어했던 성향이라(웃음) 나는 괜찮다. 그런데 엄마가 좀 걱정된다. 엄마 주변 사람 중에서는 아직도 이런 사연을 모르는 분들이 계신다. 좋은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엄마가 상처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미안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물었다. 만약 이 영화가 너무 잘 돼서 엄마 친구들이 보면 어떡하냐고. 그런데 “자랑스럽지!”라고 하더라. 그마저도 내가 생각한 엄마와는 또 달랐다. 난색을 보일 줄 알았는데, 고마웠다. 이 작품을 통해서 엄마의 고유한 성격과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된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웰컴 투 X-월드> 언론시사회때 엄마가 나한테 기습 뽀뽀를 했다. 나는 거의 밀랍인형처럼 서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그 사진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나왔더라. 정말 다행이었다.(웃음)
사진_박광희(울트라 스튜디오)
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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