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액션과 분위기로 압도하는 누아르다. 직접적인 폭력과 잔인함은 많이 절제한 모습이다.
처음 기획부터 15세 이상 관람을 목표로 했고, 이에 맞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묘사는 지양했다. 제작진이 재미있고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게 연출 의도라면서 배우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 역시 당연히 오케이였다. 신체를 훼손하는 장면이 나오면 해당 부위를 잡기보다 내가 표정으로 다 해줄 테니 얼굴을 찍으라고 제안했었다. (웃음)
형을 죽인 살인범을 끈질기게 쫓는 ‘레이’(이정재)는 ‘인간 백정’이라는 극 중 표현 그대로 피에 굶주린, 순도 높은 악인이다. 연기하면서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다고.
어떤 캐릭터를 만나든지 그 한계까지 가보고 싶은, 나아가 뛰어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배우가 그럴 것이다. 어떻게 포장할 수 없는 악인이라 출연에 망설이지 않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 점에 끌렸다. 처음엔 기존의 악인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곧 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 혹은 자신감이 들었다. 인물의 전사가 없어 부담됐으나 그만큼 자유롭게 채울 수 있었다. 레이가 벌이는 집요한 추격을 그가 지닌 독특함으로 커버해보고 싶었다.
독특함을 표현하기 위해 신경 쓴 방향은.
관객들은 아마도 ‘레이’가 왜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인남’(황정민)을 쫓는지 의아할 것이다. 과연 형의 복수를 위해서일까.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 접근하기보다 ‘레이니까’, ‘저 캐릭터는 왠지 그럴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납득시키고 싶었다. 레이만의 독특함을 잘 표현한다면 그가 벌이는 추격전에서 서스펜스가 힘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선 행동도 행동이지만 시각적으로 강한 임팩트가 필요했다.
레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스타일리쉬한 살인자다. 가운 같은 흰색 롱 코트를 입고 장례식을 찾은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의상, 헤어 등 외형에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고 들었다.
캐릭터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킬러와 마찬가지인 인물이라 어둡고, 어디에 섞여 있어도 묻히는 튀지 않는 이미지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누아르 장르에 등장하는 보편적인 킬러의 모습으로는 레이가 지닌 묘함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보통은 인물의 전사나 대사를 통해 이야기로 풀어나가는데 이번엔 대사와 소리가 없으니 비주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 의상팀과 의논하는 한편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처음으로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합류시켰다. 평소엔 의상팀과 분장팀에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편이다. 내 의견이 반영되면 캐릭터 속에 인간 이정재가 살아 있을 수 있어 지금까지 100% 영화 스태프의 의견을 따라갔었다. 한데 레이는 여러 아이디어가 필요하겠더라. 정말 여러 시도를 거쳐 같이 만들어 낸 것이 극 중 ‘레이 스타일’이다! (웃음) 지적한 첫 등장에서 입은 의상도 다 이유가 있는 선택이었다.
이유가 뭔가. (웃음)
‘레이’가 벌이는 추격의 원동력으로 형의 죽음 이상의 것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을 포착해 드러내는 게 관건이었다. 혈육을 향한 진한 애정보다 사냥을 갈구하는 짐승한테 사냥감이 생긴 것 같은 느낌 아니었을까.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애도가 목적이라기보다 죽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정도의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추모하기 위해 검은 복장을 입는 대신 평소 즐겨 있는 스타일대로 가지 않았을까 싶었고, 혼자 튀게 하기 위해 흰 코트를 선택했다. 극 중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으나 나름대로 이유와 의도가 있는 선택이었다.
목 주변에 한 문신이 시선을 강탈하던데, 매 촬영마다 그린 것인가. 보는 내내 궁금했다.
매회 차마다 그렸다. 문신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어떤 문양을 할 것인지 등 선택하는 데 고민이 많았다. 태국 로케이션이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를 정도의 날씨인데 액션 신을 하다 보면 땀 범벅에 밀고 당기고 몸싸움에 문신이 지워질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문신 없이 가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좋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민 형이 연극하면서 알게 된 문신이 오래가는 팁을 알려줘서 결국 하기도 했고 이왕 그릴 거 눈에 띄게 하자 싶어 목부터 귀밑까지 왕창 그렸다. 마지막으로 웬만해선 안 지워진다고 하는 도포제를 뿌렸는데, 중간에 지워지지는 않았으나 끝나고 특수 리무버로 지우는 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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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의 스타일만큼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게 그가 펼치는 액션이다. 정말 힘들었겠다 싶더라. 촬영하다 잠시 쉬는 모습이 담긴 현장 스틸을 봤는데 정말 탈진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나이 탓인지 초반에 몸이 안 풀리고 예전 같지 않더라. 액션은 욕심 내기 시작하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다. 파워풀하게 보이려면 그만큼 힘을 줘서 몸을 써야 하고, 당연히 부상 위험도가 높아진다. 연기하다 보면 욕심이 안 날 수 없고 결국 몸이 부서져라 하는 거지.
첫 액션인 태국의 셔터 시퀀스, 인남과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신 등 몇몇 장면은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각별한 장면을 꼽는다면.
음, 언급한 것 중 하나인 셔터 시퀀스다. 셔터를 열고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표정, 한정된 공간에서 태국인들을 다 처리하는 과정에서 펼치는 액션, 이후 나와서 피로 물든 얼굴과 손을 얼음에 닦는 것까지 레이라는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시퀀스다.
오, 얼음 세수 신! 대사 한마디 없지만, 레이의 기분이 잘 전달됐던 장면이다. 또 창고 안에서 날 듯이 액션 하다가 슬로우로 잡히는 순간 언뜻 보이는 무심한 표정도 좋았다.
창고 안에서 펼치는 액션보다 다 끝내고 나와서 보이는 표정이 더 중요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던 장면인데 현장에서 은밀하게 들어가 스릴을 고조하는 방식으로 갔다. 격렬하게 적(?)들을 물리치긴 했는데, 정작 찾던 ‘인남’은 못 찾은 것 아닌가. 그러니 짜증도 나고 덥기도 하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할 방법으로 얼음 세수를 고안한 거지.
평소 과하게 표현하기보다 가만히 있으면서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두르면서도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장례식에서 형을 바라보는 표정 등 레이를 연기하면서 가장 신경 쓴 지점이다. 그런 표정이 나오려면 촬영할 때만이 아니라 생활에서도 스스로를 좀 괴롭혀야 한다. 그래야 저절로 나오는데, 그 순간을 포착해 알아봐 줘서 고맙다.
레이가 음료수(종류가 정확하진 않으나)를 들고 다니는데, 그것도 의미가 있나.
일본과 태국 각각 한 번씩 두 번 나온다. 특별한 의미라기보다 그가 굉장히 폭력적인 인물이지만, 그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것은 싫었다. 마치 ‘나 무섭지’ 이렇게 인상 쓰고 다니는 것은 별로라… 분위기를 좀 유하게 보이기 위해 음료수를 들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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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레이의 보이스 톤 역시 걸걸한 중저음이다. 당신의 시그니처가 될 것 같다.
원래 좀 가볍게 가려 했다. 그런데 의상 입고 헤어메이크업까지 다 한 후 읽어보니 가벼운 톤이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 동영상으로 찍으며 여러 톤으로 시도해 봤고, 심지어 후시 녹음에서도 최적의 음색을 찾아봤는데 결국 극 중 톤이 가장 매칭이 잘 됐다.
<신세계>(2012) 이후 황정민과 다시 만났다. 반가웠겠다! 촬영 들어가기 전 많이 설렜다고 고백한 바 있다.(웃음)
당연! <신세계> 때 아주 즐겁게 작업했기에 당연히 좋은 시간이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막상 가보니 더 좋았다. 해외 촬영이라 숙식을 같이하니 더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촬영 후 갈 데 없으니 또 같이 어울려 작품 얘기 등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전보다 사이가 훨씬 깊어졌다.
<도둑들>(2012)의 얍삽한 배신자 ‘뽀빠이’, <관상>(2013)의 권력의 화신 ‘수양대군’, <암살>(2015)의 변절자 ‘염상진’까지 다양한 악역을 선보였는데, 이번 ‘레이’는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악역의 매력은 뭘까.
아무래도 악역은 상상력을 더욱 발휘하게 하고 덕분에 그 안에 폭넓고 깊게 많은 서사와 감정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상>의 수양대군은 생각이 폭력적이길 바랐고,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행동은 더 점잖게 가져갔었다. 말할 때, 사람을 쳐다볼 때 등 평소와 다른 톤으로 갔다. 이번에 (말했듯) 대사가 적어 비주얼적으로 레이의 폭력성을 드러내려 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악역과 다른 사람이 연기했던 악역을 보다 보면 닮은 듯 다른 지점이 보인다. 그걸 보고 레이의 톤을 잡아갔는데, 그래서 아마도 이번에 특히 달라 보인다고 하는 것 같다.
장르와 역할을 불문하고 40여 편이 넘는 영화에 주연으로 활약했다. 그중 애착이 가는 세 작품을 꼽는다면. 참 뻔한 질문이나 그래도 궁금하니까! (웃음)
음… 참 고르기 어렵고 시간이 지나며 또 바뀌겠지만 그래도 <젊은 남자>(1994)와 <태양은 없다>(1998)는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머지 하나는… 이번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로 하자!(웃음)
<태양이 없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침 절친인 정우성 배우가 주연한 <강철비2: 정상회담>이 경쟁작이다. 혹시 봤는지, 또 오랜 우정의 비결은.
너무 재미있게 봤다. 정치·사회적인 주제를 블랙코미디로 풀다가 잠수함 액션으로 넘어가는 것에 놀랐다. 코로나 국면에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서 상영된다는 것 자체로 기쁜 일이다. 물론 흥행도 중요하지만, 다 잘됐으면 한다.
그(정우성)와 나는 같은 시기, 비슷한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 지금까지 현업에서 활동하고 있다. 항상 고맙고 든든하다. 친하게 지내는 비결은 간단하다. 그만큼 아끼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내 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존대를 하는 것도 그만큼 존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원래도 말을 잘 놓지 않는 편이다. 내가 존대할 경우 후배가 너무 어려워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지.
그렇군. 평소 인간관계에 있어 중요시하는 것은 뭔가.
솔직함이다. 처음 만났을 때 상대에게 나를 다 보여주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보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과정이 길 때도 있고, 때론 잘못 파악할 수도 있다. 그 시간을 단축하고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좀 더 솔직하게 나를 내보이려 하는 편이다.
마지막 질문! <헌트>(가제) 연출 소식이 들리더라. 주연은 물론 각본까지 썼다고, 게다가 100억 대의 스케일이 큰 영화다.
예전부터 시나리오를 조금씩 썼었다. 영화화될지, 된다면 언제 될지 장담 못 한 채로 그냥 써왔는데 그게 <헌트>로 이어졌다. 또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출을 생각하게 되더라. 내가 썼으니 마무리도 직접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 지금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촬영 중이라 내년이나 들어갈 것 같다. 규모가 커서 부담스럽긴 하나 아마 제작자 등 더 부담되는 사람이 많지 않을지!
2020년 8월 5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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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