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어울리는 일을 해 인마, 어울리는 일을” 나란히 앉은 친구 ‘상필’(정해인)에게 동갑내기 ‘택일’(박정민)은 투박하지만 진솔한 말을 툭 던진다. 쓰러져가는 오토바이의 희미한 시동을 동력 삼아 같은 길을 달려온 두 청춘은 이제 막 조금 다른 삶의 방향으로 들어서는 참이다. ‘상필’은 서울의 구도심에서 사채업에 발을 들였고, ‘택일’은 무작정 도착한 군산에서 자장면을 배달한다. 보장된 미래 없이, 때로는 방향도 알지 못한 채 뛰어다녀야 하는 불안한 시절, 청춘. 단 한 번도 성에 차 본 적 없는 삶을 제대로 꾸려보려는 두 청춘은 인생의 첫 ‘시동’을 건 차다. 그런데, 이 길을 따라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혹시 미련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인생을 좀 더 살아본 ‘거석이형’(마동석)은 꽤 괜찮은 답을 이미 알고 있을까? 최정열 감독은 영화 <시동>으로 누군가의 휘몰아치는 막연함을 이렇게 달랜다. 좀 늦어도, 돌아가도 괜찮다. 그게 나쁜 길만 아니라면.
당신의 장편 데뷔작 <글로리데이>(2015)에서는 청춘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는 어른들이 여럿 등장한다. 신작 <시동>에서는 그런 어른은 찾아보기 힘들더라.
사회 시스템 안에서 상처받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청춘을 그린 <글로리데이>를 끝내고 나서 뭔지 모를 부채감을 느꼈다. 영화의 문을 너무 쾅 닫고 나온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을 좀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 중에 우연히 <시동>의 원작 웹툰을 보게 됐다. <글로리데이>와는 차별점을 두고 캐릭터를 만들고 연출하고 싶었다.
등장인물도 영화의 분위기도 밝고 유쾌한 느낌이다.
원작 웹툰에서는 캐릭터가 더 어둡고 건조하게 묘사된다. 초등학생을 때리는 등 초반부터 과감한 선택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을 많이 배제했다. 좀 더 사랑스럽고 친숙한 느낌을 살렸다. 제작사 외유내강과 작품을 바라보는 방향성이 일맥상통했다.
예컨대, 어떤 방향성인가.
보통의 영화는 인물이 어마어마한 역경을 이겨내고 한계를 뛰어넘고 대단한 성취를 이룬다. 그리고 그 감동을 표현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동>의 핵심은 사람들이 서서히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누가 멘토인지 멘티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거석이형’이 (중요한 순간에) ‘택일’을 도와주거나, 그로 인해서 ‘택일’이 성장한다는 식의 전개는 정말 피하려고 했다. 그런 결말을 제작사도, 배우도 신선하고 가치 있게 받아들여 줬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달리 말하면 그런 이유때문에 핵심 서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없이 중식당 주방장 ‘거석이형’과 배달원 ‘택일’의 티격태격을 보여준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이 일단 궤도에 오르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초반에는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갸우뚱한 순간도 있더라.
주인공이 목적을 안고 끝까지 달려가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서사에서 확실한 힘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중간중간 인물에 관한 궁금증을 품게 하고 다음 장면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관객이 영화를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캐릭터 플레이’가 굉장히 중요했다. 배우가 발산하는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거석이형’을 연기한 마동석의 존재감은 특히 강렬하다. 단발머리를 한 그가 야무지게 트와이스 춤을 추는데 어떤 관객이 웃지 않고 배길까 싶더라. 연출자 입장에서는 보물 같은 활약이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다른 배우와의 조화도 고민해야했을 것 같다.
마동석이 ‘거석이형’을 표현하는 에너지는 너무나도 대단했다.(웃음) 하지만 작업하면서 다른 캐릭터가 묻힐 거라는 걱정을 크게 하지는 않았다. ‘거석이형’은 어쨌든 영화 안에서 중요한 서사를 담당하는 인물이고, 마동석은 그 캐릭터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경주’역을 맡은 신인배우 최성은의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극의 활기를 더하는 신선한 요인이라고 할까.
연기도 잘 해야 하지만 몸을 잘 쓰는 배우가 필요했다. 최성은은 사람을 화면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더라. 실제 눈빛도 너무 좋다. 무엇보다 정말 큰 노력을 해줬다. 매일 권투 도장에 갔고 한 두 시간이 아니라 온종일 연습을 했다. 지방 촬영을 하러 가면 남는 시간에 서울에 가서 배우고 다시 내려올 만큼 열의로 작업에 임했다. 정말 감동했다.
한편으로는 ‘상필’역을 맡은 정해인 활용법이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다. ‘거석이형’, ‘택일’, ‘경주’가 군산에서 즐거운 에피소드를 만들어가는 동안 서울에서 사채업에 발을 들인 ‘상필’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영화에서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원래는 ‘상필’의 서사가 좀 더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편집했다.(웃음) ‘택일’과 ‘상필’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그런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다. 그런데 ‘택일’이 면접을 볼 때 ‘상필’도 면접을 보고, ‘택일’이 일을 시작할 때 ‘상필’도 일을 시작하니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이쪽이 1을 하면 저쪽도 1을, 이쪽이 2를 하면 저쪽도 2를 하는 병렬식 패턴이 눈에 보이면서 진부한 흐름이 만들어졌다. 별로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가 돼버리는 거다. 일부 서사는 조금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상필’을 연기한 정해인의 몇몇 장면을 편집해야 했다. 지금도 너무 아까울 정도로 좋은 연기였다.
늘 선하고 예쁜 얼굴만 보여준 정해인의 첫 변신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해인의 연기에 나는 정말 만족한다. ‘상필’은 큰 파고가 있는 인물이다. 어둠의 길로 빠져들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길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 관객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길 바랐고, 그가 돌아왔을 때 ‘아, 다행이다’라고 느끼길 원했다. 그런 역할을 소화하는데 정해인 만한 배우는 없을 것이다. 사채업자를 따라다니면서 건들거려보지만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웃음)
‘택일’은 그런 ‘상필’을 두고 “어울리는 일을 하라”고 자주 말한다. 인상적이지만 어려운 이야기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뭐든지 경험해봐야 할 것 같다. 그게 나쁜 길이 아니라면, 좀 늦어도 괜찮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이야기가 <시동>에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감히 희망을 품으라거나 새 출발을 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그랬으니까.
누구든 어느 때든, 새로운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 있는 것 같다.
아마 퇴직을 한 뒤에도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나는 은행원이나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서 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고등학교 때부터 원하던 영화 일을 하고 있다. 한때는 다들 주어진 숙제에만 전념하면서 사는 줄 알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자신이 원하는 삶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이들도 많더라. 물론 영화 일이 나와 정말 어울리는지, 또 내가 잘하는 일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고 안개 속이다.(웃음) 하지만 이 일을 할 때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재미를 느낀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인터뷰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비 오는 창문 밖 풍경을 봤다. 요즘에는 영화 홍보 일정이 많아 주로 이동하는 데 시간을 쓴다. 바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좋더라.
사진 제공_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