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스릴러물 <장산범>(2017)으로 인터뷰를 할 때만 해도 염정아는 “(2000년대 중반에 비해) 제안받는 작품 편수가 현격히 줄었다”며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그가 내놓은 결과물은 어떤가. 영화 <완벽한 타인>(2018)으로 500만 관객 동원의 주역이 됐고 드라마 <스카이 캐슬>(2018~2019)로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김윤석 감독의 데뷔작 <미성년> 인터뷰로 다시 만난 그는 지난 활약을 증명하듯, 최근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부쩍 다양해졌다며 웃는다. 젊은 팬들이 촬영장을 찾아올 때는 기분이 영 오묘하고 이상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 끝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쓱 지어 보이는 그에게서 ‘일의 기쁨’에 감격한 배우의 얼굴을 본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것부터 묻고 싶다. 당신의 인기를 실감하는가.(웃음) <완벽한 타인>과 <스카이 캐슬>로 큰 사랑을 받았다.
젊은 팬들이 생긴 건 아직도 남의 일 같다. 그분들이 현장에 찾아와주면 참 좋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하다. 나 아닌 다른 배우들을 찾아오는 경우야 늘 봐오던 거라 익숙한데…(웃음) 팬들과 최대한 눈을 많이 마주치고 그들의 카메라도 잘 바라봐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으로 돌아왔다. 남편 ‘대원’(김윤석)의 외도를 알아차린 아내 ‘영주’역이다.
감독님이 먼저 작품 제안을 주셨다. <범죄의 재구성>(2004)에 함께 출연하기는 했지만 대사 한 번 맞춰본 적 없고 사적으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친분으로 배역을 주는 분이 아니더라. 자리에 딱 맞는 배우만 캐스팅하셨다. 그래서 더 영광스러웠다. 저렇게 연기를 잘 하시는 분이 자신의 첫 연출작을 어떤 배우에게 제안할지 얼마나 고심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성년>은 각자의 부모가 저지른 외도를 알게 된 고등학생 소녀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 드라마다. 언론시사회 이후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과 유머 면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김윤석 감독님과 잘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웃음) 실제로 만나보니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면이 있으시더라. 아, 이런 이야기를 쓰실 만 했구나 싶었다.
감독 김윤석과의 호흡은 어땠는가.
배우 입장에서는 굉장히 구체적이라고 느낄 만한 디렉팅을 주시는 편이었다. 덕분에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걸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영주’가 운전을 하는 도중 뒷자리에 앉은 딸 ‘주리’가 “엄마, 아빠 도망갔어”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영주’에 빙의해있던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숨만 고르고 있었다. 그걸 보던 감독님이 ‘픽’하고 한 번 웃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듣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남편의 행동을 떠올린 ‘영주’는 그 순간 정말 그런 기분일 것 같았다. 감독님이 배우보다 배역을 더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걸 알겠더라.
감독이 원작자와 함께 시나리오를 각색했으니, 배역의 상태와 감정을 꿰고 있을 만하다.
감독님이 쓴 대사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영주’가 남편 ‘대원’에게 “성욕이야, 사랑이야”라고 묻는 장면이다. 나는 그 대사를 입으로 뱉을 자신이 없었다. 남편 얼굴에, 그렇게 대놓고? 어감도 뭔가 이상한 것 같고… 다른 말로 바꿔주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결국 감독님이 이기셨다. 나중에는 이해를 했다. ‘대원’은 아내가 그렇게 정확하게 물어봐도 대답을 할까 말까 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남자였다. 그래서 정확한 질문이 필요했던 거다.
당신 말대로 남편 ‘대원’은 도망치는 남자다. 아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렇게 예뻐하던 딸이 자신을 불러도 못 들은 척 피해가고, 바람피운 여인 ‘미희’(김소진)가 병실에 누워 자신을 찾아도 통 찾아가지 않는다.
‘영주’는 아마 그가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을 거다. 그러니까 재산 명의도 전부 남편 이름으로 해두고 살았겠지.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스스로 ‘멍청한 년’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아마 관객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물이 ‘영주’일 거라고 본다.
남편의 배신으로 좌절감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영주’는 놀랍도록 성숙한 대응을 보여준다. ‘미희’의 딸 ‘윤아’를 마주할 때도 날카롭게 굴지 않는다.
딸 ‘주리’에게도 ‘윤아’와 싸우지 말라고 한다. 너희 둘은 나와 똑같은 피해자일 뿐이다, 너희가 잘못한 건 없다고 말이다. 아마 ‘영주’는 극 중에서 가장 어른이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어떤 사람이 성숙한 사람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 같다. 나이를 먹었다고 다 ‘성년’은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전부 ‘미성년’인 것도 아니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
‘영주’처럼 어떤 사건을 맞았을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을 좀 해보려는 사람 아닐까. 그게 참 어렵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상황을 길게 보면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일을 또다시 그르칠 수 있다. 나도 종종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편인가.
내 나이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웃음) 그래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젊었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반성한다.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금방 알아챈다. 고집스럽게 나이 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것 같다.
후배 배우들과 자주 소통하는가. 노력하는 선배를 후배들이 싫어할 리 없다.(웃음)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배까지는 대하기가 좀 편하다. 그보다 젊으면 나도 많이 어렵다. 혹시라도 나를 꼰대로 볼까봐…(웃음) 나 역시 그들의 나이를 지나왔는데, 정작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잊어버린 거다. 어떤 말을 들을 때 내 기분이 나빴던가… 말도 행동도 어디가 적정선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그래서 주춤한다. 아이들한테도 마찬가지다. 엄마라는 이유로 모든 일에 다 개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니까.(웃음)
영화, 드라마 일정으로 상당히 바쁜 날들을 보냈을 텐데, 아이들과 교류할 시간이 조금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쁘게 일하는 동안 아이들이 많이 컸다. 그 시간을 계기로 스스로 해결하는 일도 생겼더라. 기특하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저렇게 커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서운할 때도 있다. 나와 나누는 게 앞으로 점점 없어질 것 아닌가. 이래서 엄마도 일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서운함을 덜 느끼도록.(웃음)
<스카이 캐슬>이 흥행할 때는 아이들도 덩달아 엄마를 자랑스러워했을 것 같다.
평소에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데 <스카이 캐슬> 때는 친구들이 엄마 사인을 받아달라고 했다며 좋아하더라.(웃음) 드라마가 확실히 파급력이 있는 모양이다.
작품을 선택할 때 가족들의 의견도 어느 정도 고려할 것이다.
그렇다. 아직은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라 내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을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내가 출연한 작품이라고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한다. 남편은 내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킨십이나 노출이 많은 작품은 내가 알아서 잘라낸다. 그런 걸로 불편한 건 정말 싫다.
다음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시동> 외에는 아직 결정한 바는 없다. 시나리오를 많이 받아보고 있다. 역할이 전보다 훨씬 다양해 졌다는 걸 느낀다. 캐릭터가 조금씩 바뀌어가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다. 한동안 우리 또래 여자 배우들이 출연할 작품이 없다면서 입이 여기까지 튀어나와 불만을 얘기했는데 말이다.
김윤석에게 작품이 또 들어온다면, 어떨 것 같나.
아마 감독님은 계속 연출을 하실 것 같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만약 제안이 들어온다면… 그래도 역할은 봐야지. 볼 건 보고 결정해야한다.(웃음)
혹, 연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완전 없다.(웃음) 어떻게 연기와 연출을 같이 할 수 있는 건지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글 한 줄도 못 쓸 것이다. 이야기를 생각해내는 수준도 중학생 수준이다. 연기하는 게 다행이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지금처럼, 누군가가 호의를 가지고 나와 이야기해주는 순간들. 나이를 먹을수록 감사할 일이 많다. 아마 나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그럴 것이다.
사진 제공_아티스트컴퍼니
2019년 4월 12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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