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ㅡ편집자 주
<비천무> <태왕사신기> <탐나는도다> <사임당 빛의 일기> 연출한 베테랑 감독
우연히 술자리에서 마주친 고 김종학 감독과의 인연으로 드라마 조감독 생활 시작
제이콤 거쳐 김종학 프로덕션으로… 입봉은 요원하기만 했던 외주 프로덕션의 삶
처참한 실패로 끝난 영화감독 데뷔, 최초 사전제작 드라마 <비천무>는 한동안 방영 못 하기도
프리랜서 연출가에게 ‘밥벌이’보다 더 급한 건 없지만… 지금 원하는 건 무엇보다 흥행
이요원, 유지태 주연의 상해임시정부 배경 시대극 <이몽> 11월 중 크랭크인
사전 제작 드라마 <이몽> 촬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상해임시정부를 배경으로 조선 최초의 외과 의사 ‘이영진’(이요원)과 의열단 ‘김원봉’(유지태)의 관계를 다룬 시대극으로 알려졌다.
시대적으로는 <미스터 선샤인>보다 약 30년쯤 뒤다. 상해임시정부와 의열단이 반목하던 초창기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의열단 소속 ‘김원봉’은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의 활동 방향성을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아 했다고 한다. <이몽>의 이야기 전반적인 골격은 상해임시정부와 의열단이 어느 순간 서로 힘을 합치는 이야기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건 ‘사람’이겠지만.
이영애가 출연하기로 돼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사임당 빛의 일기>(2017) 이후 이영애와 함께할 수 있는 시대극을 기획하면서 <이몽>이 태동했다. 그런데 그가 맡기로 한 ‘이영진’ 역할이 전반적으로 사건에 ‘덤벼드는’ 스타일의 인물이다 보니 배우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어쨌든 역할에 맞는 제대로 된 임자가 나타나 줬고, 작품 자체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가까스로 MBC 편성을 받아낼 수 있었다.
드라마의 굵직한 전개를 들려달라.
조선인 외과 의사 ‘이영진’과 역사 속 실존 인물 ‘김원봉’이 만나 빚어내는 허구의 이야기다. ‘김원봉’은 실제로는 1910년 만주로 간 뒤 해방 전까지 조선에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경성에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와 허구를 섞어 대중에게 알려야 할 역사를 보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빚어내 희망과 쾌감을 전하려고 한다.
‘김원봉’은 무장투쟁 노선에 가까웠던 독립운동가다. 아무래도 드라마에 그의 정치 사회적 사상이 묻어난다고 봐야겠다.
그렇기는 하겠지만, 이념은 전방이 아니라 이야기 뒤에 살짝 깔려있다. <이몽>이라는 제목 자체가 서로 다른 생각과 이데올로기를 가진 인물들이 꾸는 ‘다른 꿈’을 의미하다 보니, 드라마 속에서 인물 간의 이념 대립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현재는 8회까지 대본이 나온 상황이다.
<이몽> 대본 표지를 보니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회’ 로고가 새겨져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크게 준비하려고 한다. 덕분에 상해임시정부 시절을 배경으로 한 <이몽>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회’의 공식 후원을 받게 됐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간 많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외주 프로덕션에서 연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거로 안다.
미국 유학 당시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빨리 직업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방송사 공채를 다 떨어진 상황이었는데 술집에서 우연히 김종학 감독을 마주쳤다. 소주 한 병을 들고 무작정 그가 있는 방으로 가 인사를 드렸다. 당신을 매우 존경하는 팬이라면서 말이다. 그게 김종학 감독과의 인연의 시작이다. 이후 그가 연출한 <백야 3.98>(1998)의 조감독으로 일하게 됐다. 최민식, 심은하, 이병헌 등이 출연한 대작 드라마로 당시 예산만 80억이었다.
김종학 프로덕션에도 짧지 않은 시간 몸담았다.
<백야 3.98>을 만든 제작사 제이콤이 해체되고 김종학 감독과 나를 포함한 5명 정도가 압구정동에 김종학 프로덕션 사무실을 열었다. 아마 그곳이 PD와 작가를 영입해 드라마를 제작하는 외주 시스템을 거의 최초로 구축한 제작사였을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감독으로 입봉할 수 있겠다 싶었다. 김종학 감독도 이번 작품만 끝나면 입봉시켜주겠다 식의 말을 여러 번 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4년쯤 일해 보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겠더라.(웃음)
어째서인가.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영입하는 PD가 모두 방송국 출신이었다. 나에게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때마침 다른 영화 제작사로부터 규모 있는 작품의 연출 제안이 들어왔다. 감독으로 제대로 데뷔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둥지를 떠난다는 아쉬움이나 두려움은 없었나.
당연히 있었다. 김종학 프로덕션에 들어간 걸 방송 3사에 입사한 것보다 더 큰 자부심처럼 느낄 때도 많았으니까. 그곳을 떠날 때는 김종학 감독님께 세 장의 편지를 ‘몰래’ 남겨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웃음) 그 편지에 “월급은 마약이다”라는 말을 썼던 게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메가폰을 잡은 영화 <아 유 레디>(2002)가 거액의 제작비를 들이고도, 속칭 ‘폭망’했다.(웃음)
당시 내 나이가 서른셋이다. 패기만 가지고 덤벼들었던 것 같다. 당시 출연한 배우 중 하나가 천정명인데, 당시에는 신인이었다. CG 수준도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대중이 잘 모르는 신인 배우 다섯 명을 데리고 별의별 장면을 다 찍었으니… 결국 끝내주게 망했다.(웃음)
이후 생활은 어땠는가.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1년쯤 지나서 연출료로 받은 돈이 바닥났다. 다행히도 아는 인연 덕분에 KBS 재연 드라마 <이것이 인생이다>(2001~2005)를 만들게 됐다. 45분간 드라마와 마지막 10분간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형식이었는데,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내 취향에 맞게 연출할 수 있었다. 2~3일 촬영으로 모든 분량을 뽑아내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꽤 재미가 있었다.
최초의 사전 제작 드라마인 <비천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한중합작 드라마였고, 전체 촬영분을 중국에서 소화했다.
<비천무>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는 이미 대본 24개가 다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드라마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고 중국으로 이동해 10개월 간 200회차의 촬영을 마쳤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고생도 뒤따랐다. 당시 출연한 배우가 주진모, 김강우, 이종혁, 박신혜 등이다. 나머지는 전부 중국 배우였다. 그 시절 업계에서는 규모가 굉장한 대작이었던 만큼 2004년 촬영을 마친 뒤 한국 방송국에 방영권을 팔 수 있었다. 정작 방송은 <태왕사신기>가 끝난 뒤인 2008년에 KBS 16부작 형태로 나가게 됐지만 말이다.(웃음)
4년이나 작품을 묵혀 뒀던 셈이다.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방송사에서 일종의 편성 담합이 있었다. 도대체 저 ‘외주 놈들’은 뭔데 자기들끼리 사전제작 형식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놓고 우리 채널에서 상영을 하겠다고 하는가 싶었던 모양이다.(웃음) 물론 <비천무>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 드라마로 우리나라 드라마의 업계의 구조적 모순을 깨겠다는 둥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센 이야기가 오가긴 했다.(웃음) 하지만 큰 구조를 보면 방송 3사 간에는 일종의 편성 카르텔이 있었고, 그 구조 안에서 홀대받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비천무> 상영을 가능케 했던 건 당신 말대로 <태왕사신기>의 흥행이겠다. 김종학 PD와 공동 연출로 이름을 올린 작품으로 당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태왕사신기>는 사실 몇 차례 고사한 작품이다. 작은 작품이라도 단독 연출을 제안받았다면 고마운 마음으로 달려갔겠지만, 공동 연출이라는 점이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프리랜서 연출가는 밥벌이가 중요한 존재인지라...(웃음) 무엇보다 김종학 감독이 나를 계속 찾는다고 했다. 다행히도 현장에서는 드라마 연출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 할 수 있었다.
이후 <탐나는 도다>(2009) <버디버디>(2011)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2011~2012) <백년의 신부>(2014) 등 여러 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간 연출로 이름을 올린 작품만 12개다. 지상파 편성 기회도 3차례나 얻었다. 물론 ‘편성은 고통’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은 흥행에 대한 엄청난 갈증이 있다.
이른바 ‘대박’ 드라마를 말하는 거군.(웃음)
앞으로 작품에 대한 내 열정을 더 발산할 수 있으려면, 이제는 확실한 흥행이 필요한 때다. 아마 내 감각이 부족한 게 문제였을 것이다. TV 시장에서 흥행하려면 때로는 약간의 막장 요소도 갖추고, 촌스럽게 느껴질지언정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게 필요한데 그동안은 그걸 잘 못 했다.
곧 촬영에 들어가는 <이몽>은 어떨까. 흥행에 자신 있는가.
최선을 다해야지.(웃음) 그동안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만 했던 감독이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이야기를 기획했다. <이몽>은 그래서 내 인생에서 굉장히 소중한 연출 기회다. 마치 내 첫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예술에 가깝게 연출할지, 상업드라마의 측면을 잘 살려서 연출할지 여전히 고민 중이다.(웃음) 이미 대본만 십 수차례 고친 상황이다. 내년 4월까지는 촬영 현장에서 전투할 일만 남았다. 겸허하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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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박꽃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