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소원>, <사도>, <동주>, <박열>의 공통점은? 영화를 즐겨본 이라면 이준익 감독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터이고, 영화를 그다지 접하지 않았다면 두 글자 제목에 눈길이 갈 것 같다. 고향 내음 물씬 풍기는 향토적인 어감을 지닌 감독의 신작 <변산> 또한 두 글자 제목이다. 그 이유를 묻자, 그간 두 글자로 제목을 단 영화들의 기운이 좋았다며 이번에도 흥행에 대한 작은 기대를 담아봤다고 한다. 상업 영화를 하면서 영화 흥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감독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는 답변이다. 하지만, 그의 전작들은 글자 수만 같을 뿐 장르도 서사의 결도 달랐다. 이번 <변산>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아버지와 고향이 주요 테마인 <변산>을 만들며 젊은 세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래퍼 주인공에, 영화 음악을 모두 랩으로 채워 넣었다. 또, 커튼콜 형식으로 엔딩을 장식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성공했던 전작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최대한 전작과 멀리 가는 것이 평소 그의 신조인 까닭이다. 박정민과 김고은이라는 두 청춘 남녀 배우를 앞세웠지만, <변산>이 청춘물만은 아니다. 지금 청춘인 젊은 세대는 물론 한때는 청춘이었으나 어느덧 나이 들어 버린 아재들 그리고 그 윗세대까지, 청춘을 거쳐 간 모든 이들에게 이준익 감독이 보내는 즐거운 초대장이자 마음의 응원이다.
<변산> 영화가 좋더라. 공개 후 주변 반응은.
좋게 봐줘서 고맙지만, 취향의 차이가 크게 작용할 거 같다. 한 영화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변산>의 가장 큰 테마가 고향인데, 요즘 세대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옅은 세대라 정서적으로 공감이 안 될 수 있다.
영화의 영어 타이틀이 ‘Sunset in my hometown’ 이다.
고향이란 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공간이자 지난 온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hometow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갈등이 해소된 후 두 남녀(박정민, 김고은)가 나란히 앉아 노을을 바라보는 시퀀스에 의미를 부여해서 그렇게 정했다.
극 중 ‘학수’(박정민)가 쓴 ‘내 고향은 가난한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폐항’이라는 시가 참 좋더라.
정말 각본을 쓴 김세겸 작가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가 없었다면 <변산>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고향이 변산반도 변두리에 있는 ‘줄포’라는 폐항이다. 일제 강점기에 성업했으나, 다들 떠나고 폐항이 된 포구로,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영화 보는 내내 당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궁금했었다.
서울 용산 근처인데, 이젠 다 사라지고 주상복합 건물만 그득하다. 사실 아버지 고향은 대구 경북 쪽인데, 어쩌다 보니 매번 전라도 배경 영화만 찍고 있다.
고향과 더불어 ‘아버지’, 즉 부자간의 애증이 영화의 주된 정서 중 하나다. 영화 속에 당신의 경험이 어느 정도 녹아 있지는 않은지.
내가 각본을 쓴 것이 아니라서...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다행히 인자하신 분으로 내게 고통을 주지 않으셨었다.
장르와 주제는 다르지만, 당신의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를 꼽는다면, 개인적으로 ‘따뜻함’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고와 감정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굴까.
당연히 어머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위대하신 분이셨다. 모든 아들은 못난 아들 콤플렉스가 있다. 아닌가, 나만 그럴 수도.(웃음) 어머니가 물려준 정서로부터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형성됐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또한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 같다.
<변산>이 고향과 아버지를 주요 테마로 하면서, 음악으로 ‘랩’을 선택한 점이 상당히 참신하다.
영화란 젊은 세대와 가까운 매체라고 생각한다. 나이 먹은 감독 입장에서 젊은 세대를 주인공으로 하여 교감을 확대하고 싶었다. 랩은 젊은이들의 일상에 파고들어 어느 정도 그들의 일부분이 된 장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깊숙이 들어가는 장치로 ‘랩’을 선택했다. 젊은 층과 중장년층 서로 다른 세대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며 문화를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자 한발 먼저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했는데, 영화를 통해 젊은 층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메시지는 관객이 보고 느끼는 것이지 감독이 보내는 게 아니다. 만일 부여하려 한다면 한편으론 오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변산>은 그냥 재미있고 즐겁게 일하고 싶어서 만든 거로, 내 감성에 맞춰 행복하게 촬영했었다. 인간은 작용 반작용 에너지에 의해서 튀어 나가는 것 같다. 무슨 소리냐 하면 <소원>(2013), <사도>(2014), <동주>(2016), <박열>(2016)까지 작업하면서 감정적으로 힘들고 괴로웠거든. 그런 감정이 내 안에 몇 년 동안 쌓여 있던 것 같다. <박열>을 하면서 다음 영화는 무조건 코미디를 하고자 했었다. 그래서 괴로움을 발산하고 웃고 싶었는데, 이번 현장에서 몇 년 동안 참아 왔던 웃음을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우연인지 전작들이 모두 제목이 두 글자인데, 이번에도 역시다.(웃음)
왠지 두 글자 제목이 나한테 좋은 기운을 준다고 할까. 망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역시 두 글자 제목으로 갔다.
평소 작품을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의뢰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했는지.
<변산>의 경우는 반대였다. 시나리오와 함께 연출을 의뢰받았었다. 사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안 한다고 고사했었는데, 주위에서 하라고 하더라. 귀가 얇아서 각색을 거쳐 하기로 했다. 사실 처음에는 주인공이 래퍼가 아니었다.
원래 주인공 직업은 무엇인가.
원래는 단역배우였는데, 마침 영화 <럭키>가 개봉하더라. 그래서 직업을 래퍼로 바꿨다.
랩을 활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학수’(박정민)가 랩을 통해 자기 내면을 고백하는데, 그 어떤 독백보다 호소력이 짙더라. 가사가 마음에 아주 와닿았다.
힙합이나 랩이 서양 문화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랩은 우리 정서에 맞게 재생산된 것 같다.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차트를 석권한 것에 알 수 있듯이 문화는 서로 교환되는 거다. 전라도 촌구석에서 랩을 하는 게 어딘지 비현실적일 수 있겠으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그게 문화의 전파라고 생각한다. 영화 <동주>(2016)에서 중간중간 시를 삽입했던 경험을 살려, 시 대신 랩을 넣어보고자 했다. 시와 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시에 운율이 있듯이 랩에는 라임이 있으니 말이다.
극 중 랩 작업은 모두 래퍼 ‘얀키’가 맡은 건가.
그렇다. 재야의 고수를 수소문했고, 그(얀키)에게 시나리오를 보내고 의뢰했는데, 다행히 흔쾌히 허락해줬다. 아주 만족한다.
한편으론 중간중간 삽입되는 랩에 어색해하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 영화가 많이 다양해졌으나 엄격하고 경직된 부분이 아직 있다. 인도 영화에서 뜬금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 등이 우리한테는 이상하지만, 인도에선 자연스러운 영화적 문법이다. 극 중 주인공의 독백을 랩으로 하는 게 물론 이상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모험을 한 거다. 나름 과감한 도전이었다! (웃음) 어색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좋았다는 평이 많아, 꽤 괜찮은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출연 배우들이 모두 등장하는 엔딩의 커튼콜도 인상적이다.
일부러 파격적으로 하고 싶었다. 틀을 깨고 싶었거든. 평소 영화의 지향점이 ‘내 전작으로부터 멀리 가자’이다.
전작으로부터 멀리?
<사도>(2014), <동주>(2016)를 좋아했던 관객들이 유사한 작품을 기대했다면, 나는 그분들께 배신자일 수 있을 거다. 그 지점에서 욕을 먹는다면 할 수 없다. 감독으로서 평가와 흥행 면에서 좋은 성과를 받았다고 유사한 작품을 반복한다면, 그건 매너리즘에 빠진 거라고 생각한다. 내 전작에서 멀리 가려 하는 것이 나에겐 일종의 의무와 같다. <동주>(2016)에서 멀리 가려는 생각으로 <박열>(2016)을 만들었다. 두 영화는 동시대 이야기이지만, 톤앤매너가 완전히 다르다. 이번 <변산>은 완전히 딴 데로 가보고자 했다. 혹자는 실망할 수도, 혹자는 칭찬할 수도 있다. 양쪽 의견 모두 존중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감독이 비슷한 욕구, 즉 전작과 차별화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현실적 여건으로 실행하기 힘든 게 아닐지. 그렇게 과감하게 용기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은.
간단하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라고 생각해서다. 실패가 두려워 머뭇거리며 세월을 낭비하지 말자는 거지.
개인적으로 ‘혁수’(박정민)가 아버지에게 한 방 먹이는 장면이 가장 파격적이었다. 시늉만 할 줄 알았거든.
그건 ‘학수’(박정민)의 의지로 때린 게 아니라, 아버지(장항선)의 의지로 맞은 거다. 자신(아버지)을 넘고 ‘용대’(고준)라는 조폭에서 벗어나라는 거지. 코미디 장르다 보니 아버지가 “컴 온, 컴 온” 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 웃음 나게 표현했지만, 속마음은 ‘제발 나를 타고 넘어가라’는 마음이다. 그걸 직접 말로 표현했다면 아마 파격으로 안 느꼈을 거다.
오히려 그런 나쁜 아버지를 쉽게 용서한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용서에 관해 이야기 하자면, 극 중 ‘학수’(박정민)는 아버지가 두 번이나 사과하지만,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용서해야 용서를 받을 수도 있는 거다. 즉, ‘학수’가 아버지를 용서해야, 그 자신도 ‘선미’(김고은)한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지. 그렇게 개연성을 부여하려 했다.
‘학수’에게 ‘선미’는 초반 자신을 짝사랑했던 동창생이었다가, 점차 그 의미가 커진다. ‘선미’에게 ‘학수’는 첫사랑이었다. 두 사람에게 서로는 어떤 존재일까.
결국은 문학적 동료이자 정신적으로 교류하는 관계? 물론 표현은 그렇게 안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끝까지 간직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극 중 ‘선미’가 ‘그 사람(학수)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사랑한 것’ 이라고 말한다. ‘선미’의 ‘학수’에 대한 감정은 그런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폐항’이라는 시를 쓴 장본인이 ‘학수’라는 것을 알고, 순수했던 사랑을 더 오래 간직하게 된다. 시를 통해 문학적으로 정신적 교감 혹은 공감을 했기에, ‘학수’가 잘못을 해도 계속 연민을 가졌다고 본다.
캐스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박열>에서 ‘다테마스’로 출연했던 김준한 배우가 이번에는 아주 찌질한 선배 ‘원준’으로 변신, 전혀 다른 연기를 펼친다.
전혀 다른 배우로 느껴지지 않나! 그가 정말 연기를 잘한다. <박열>의 경우도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했는데, 일본어 발음이 정말 정확했다. 그는 빨리 되든 조금 더디 되든 잘 될 배우임에 틀림없다. 허당끼가 있는데 그게 또 매력이다. 이번 <허스토리>에도 출연한 거로 알고 있는데, <변산>에서 와는 전혀 다른 연기를 펼친다고 들었다. 동네 조폭 ‘용대’역의 고준 배우도 마찬가지다. <타짜- 신의 손>(2014) 에서는 아주 살벌하게 나왔었는데. 이번에는 겁나(?) 귀엽지 않나.
두 주인공인 ‘선미’역의 김고은과 ‘학수’역의 박정민은 어떤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 두 배우가 가장 놀랍다. 특히 김고은 배우는 출연 분량이 박정민 배우의 반 정도밖에 안된다. 그럼에도 극을 휘어잡고 있다. 초반에는 ‘학수’의 관점에서 ‘선미’가 대상화되다가 중반 버스킹 시퀀스 이후 ‘선미’의 관점에서 ‘학수’가 대상화된다. 내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패턴이라 할 수 있다.
시점의 이동인 건가.
이준익식 내러티브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극 중반에서 관점이 바뀌는 거다. <동주>(2016)에서는 ‘동주’(강하늘)에서 ‘몽규’(박정민)로, <박열>(2016)에서는 ‘박열’(이제훈)에서 ‘후미코’(최희서)로 그리고 이번에는 ‘학수’에서 ‘선미’로.
얘기했듯, 극 중 ‘선미’의 지분이 크다. 김고은 배우가 그렇게 능청스럽게 코믹 연기를 잘하는지 미처 몰랐었다. 혹 알고 캐스팅한 건지? (웃음)
음, 그건 아니고. 일단 20대 연기 잘하는 배우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배우였다. 게다가 박정민 배우와 선후배 사이라 너무 친했고, 연기합을 따로 맞춰보고 할 게 없을 정도로 잘 맞았다.
개인적으로 <변산>은 청춘 영화라기보다는 휴먼 드라마로 두루두루 누구와 함께 봐도 좋을 영화인 것 같다. 특히, 나이 드신 부모님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한다.
그러게, 청춘 남녀가 주인공이지 이게 딱 청춘물은 아니다. 다만, 홍보의 방향이 그쪽으로 맞춰진 듯하다. 혹자는 청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어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홍보 프레임에 가둬지지 않았으면 한다. 충분히 어르신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다음 작품 계획은.
두세 개 구상 중인데 아마 <변산>과는 또 다른 느낌일 거다. 그런데, 영화라는 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엎어질 수도 있어서 지금 구체적으로 밝히기에는 조심스럽다.
당신에게 <변산>이란.
나에게 즐겁고자 하는 욕망은 일상에서나 인생에서나 가장 아픈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변산>은 내 영화 중에서도 나와 가장 유사한 정서를 지닌 작품이다. <사도>나 <동주> 속의 인물들이 지닌 정서와 실제 나는 거리가 머니 말이다.
현재 이준익이 ‘청춘기의 이준익’에게 한마디 한다면.
누구에게나 청춘이 있고, 누구나 청춘이 지나감을 경험한다. 꼭 청춘의 나를 향해서만은 아니고, 지금 청춘에 머물러 있는 젊은 세대에게는 ‘수고한다’ 라고 응원하고 싶다. 또, 지금 나 같은 아재들에게는 - 그들이 날 때부터 아재였겠나! - ‘수고했다’ 라고 격려하고 싶다.
최근 인상적인 일이나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오토바이 탈 때 행복하다. 피디, 음악 감독 등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 대여섯 명과 오토바이 타고 적성이나 설악산 혹은 낚시하러 가곤 한다. 올드팝, 남미 음악 등 여러 음악을 들으면서 타는데,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2018년 7월 3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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