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배우 장영남은 그런 작품 <나와 봄날의 약속>에서 독박육아에 지친 엄마 ‘수민’을 연기했다. 여성 투쟁 백서를 집필할 만큼 뜨거운 자아를 품고 있던 왕년의 운동권 센 언니는, 어느덧 자기 욕망은 고이 접어두고 아이와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주부로만 살고 있다. 영화 속 외계인은 ‘수민’에게 어떤 선물을 건넸을까? 선물을 받은 그는 과연 자신을 억누르던 무언가로부터 해방됐을까?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나와 봄날의 약속>은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이다. 지구 종말이라는 배경과 외계인이 건네는 생일 선물이라는 소재는 공통적이지만, 각자의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다. 당신은 엄마이자 주부인 ‘수민’의 에피소드를 맡아 연기했다.
매니저가 “누님, 이건 딱 누님입니다!” 하면서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장영남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다 보니 극 중 엄마로 등장하는 ‘수민’의 상황에 공감이 됐다. 전체 영화에서 내 에피소드가 차지하는 분량은 짧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연출 속에서도 대단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어 매력적이었다. ‘수민’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극 중 ‘수민’은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평범한 엄마지만, 과거에는 운동권을 주름잡던 센 언니였다. 당신에게도 그런 강렬한 과거가 있었는가.(웃음)
아니다.(웃음) 사람들이 다 내가 센 사람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아마 강한 연기를 자주 보여줘서 그런 것 같다. 연기할 때는 배우로서 어느 정도 ‘똘끼’가 있을 수 있지만 평소에는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소극적인 사람이다.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유연해졌지만 여전히 낯을 많이 가린다. 모르는 사람과도 말을 잘했으면… 싶은 생각을 할 때가 많다.(웃음)
연기할 때 워낙 돌변하는 모양이다. 극 중 인물의 어떤 모습에 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던가.
‘수민’은 대학 시절 (운동권 진영에서) ‘여성 전투 전략 백과’를 작성했을 정도로 열정이 넘치고 자아가 강한 여자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되면서 남편과 아이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한다.
표현이 좀 가볍게 느껴지는가.(웃음) (가족이기는 하지만) 남편은 엄연히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아이도 내가 낳기만 했을 뿐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더라. 그러면서도 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때가 많다. 세 사람이 서로 소통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다.
육아의 고단함에 대해 공감을 많이 한 모양이다.
아이를 늦게 낳았다. 이제 다섯 살이다. 아이를 본다는 건 정말 인내심의 한계를 확인하는 일이더라. 내 육아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아서 더 힘든 건지, 원래 이렇게 힘든 건지…(웃음) 도와주시는 분 없이 나와 엄마가 마치 ‘바톤 터치’ 하듯 번갈아 육아를 맡고 있는데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들다. 집에서 예쁜 옷을 입고 있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슈퍼 갈 때도 극 중 ‘수민’처럼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간다. 엄마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다”며 얼굴에 뭐라도 좀 칠하고 다니라고 하실 정도다.(웃음)
‘수민’은 비록 자신의 상상 속에서지만, 아이에게 총을 겨눈다. 일종의 ‘모성 배반’처럼 느껴지는 이 장면은 당신이 맡은 에피소드의 핵심적인 정서일 것이다. 여전히 모성을 숭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굉장히 발칙하게 느껴지는 상상력이기도 하다. 그 정서를 온전히 이해했는가.
(아이에게 총을 겨누는 게) 결국 외계인이 ‘수민’에게 준 생일 선물인 셈이다. 내 생각엔, 그다지 고마운 선물은 아닌 것 같다.(웃음) ‘수민’은 아마 육아가 힘들기는 했어도 자기 아이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계인이 그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것 아닐까.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연기했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시나리오에 써 있는 “총을 쏜다”는 문장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수민’ 입장에서는 아이가 괴물처럼 보여서 총을 겨눈다는 건데,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 연기가 조금 힘들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백승빈 감독님께 솔직히 이야기하고, 대사를 조금 더 넣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너 동현이(극 중 ‘수민’의 아들) 아니지!”라고 확인하려 드는 말이라도 하자고. 바로 오케이 하셨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도발적인 상상력이 백승빈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세계관인 것 같다. 세상은 어차피 망할 테니, 그럴 바에는 ‘잘’ 혹은 ‘통쾌하게’ 망해 보자는 식의 정서는 당신이 출연하지 않은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솔직히 ‘잘’ 망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망하는 건 그냥 망하는 것 아닌가?(웃음) 만약 영화에서처럼 정말로 지구 종말이 다가왔다면, 모든 게 소멸한 뒤에 어떻게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신예 이주영이 당신에게 생일 선물을 건네는 외계인 역으로 호흡을 맞췄다. 언론시사회 당시 이주영을 보고 배운 점이 많다고 했는데.
이주영은 말하듯 연기하는 배우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듯 자연스럽다. 마치 진짜 외계인인 것처럼.(웃음) 그게 정말 부럽더라. 요즘 유행하는 연기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상당히 젊은 감각처럼 느껴졌다. 따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됐다.
공부가 됐다는 건…
어떨 때는 누군가가 연기하는 걸 그저 보기만 해도 뭔가 배우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저 사람은 마치 말을 안 하는 것처럼 대사를 하네? 저 대목에서는 호흡을 거의 쓰지 않네? 같은 것들 말이다.
<늑대 소년>(2012) <국제시장>(2014) <눈길>(2015) <공조>(2016) 등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엄마’역을 연기했다. 비슷한 역할을 여러 번 맡을 때는 배우로서 분명 고민될 것이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서 비슷한 역할을 여러 번 해도 크게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한 역할만 보여주면 대중이 금세 싫증 날 수 있다는 이쪽 업계의 생리를 너무 간과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래도 분명 작품마다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나와 봄날의 약속>의 엄마는 기존의 역할과 어떤 점이 가장 다른지.
‘수민’은 자기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엄마다. 여태껏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거나, 자기 할 일을 느슨하게 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엄마이기 전에) 자기 욕망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는 한 여자이자, 인간인 것 같다. 어쩌면 지금껏 연기했던 엄마 중에 가장 현실적인 엄마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흔히 엄마라는 존재를 두고 늘 푸근하고 옆에 있어 줄 것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오히려 그건 그야말로 드라마 속 엄마에 가까운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엄마는 종종 자식에게 뼈아픈 ‘팩트 폭력’을 시전하는 존재 아닌가.(웃음) 평소 작품을 선택하는 여러 기준이 있을 텐데.
당연히 작품이 재미있어야 하겠지만, 사람과의 관계나 신뢰도 상당히 중요하다. 같이 작업한 연출자 혹은 제작자가 또 다른 역할을 제안하면 고마운 마음 때문이라도 꼭 함께한다. 설령 캐릭터가 이전 작품보다 좀 미미한 느낌일지라도.
최근에는 연극 <엘렉트라>(2018)에 출연해 전사 역할을 소화하기도 했다.
음… 한동안 연기를 하는데 자꾸만 위축되고, 자신도 없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는 소극적이었어도 무대에만 오르면 돌변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분’이 오지 않는 거다.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그래서 공연을 선택했다. 연극하면서 늘 칭찬받았고, 연극 덕분에 인생이 잘 풀리기도 했으니까 그걸 하면 잘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연극을 할 때 자유롭고 행복했으니까 말이다.
고향의 무대로 돌아가 기력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그런데 결과가 미진했다. 연극 무대를 비운 7년이라는 시간이 좀 길었던 모양이다. 너무나 좋아했던 분야에서 혹평을 들으니 정신이 바짝 들더라. ‘너 미쳤구나?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 망치로 머리를 쿵 맞은 것 같은 느낌.(하하하) 다행히 많이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나를 다잡아야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음… 에너지를 회복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작품도 쉬어 봤는데…
숨을 고를 수 있는 혼자만의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 같다. 지방 촬영에도 아이를 데리고 다녔으니, 어쩔 수 없이 자꾸 치이게 되더라. 그래서 혼자 여행을 떠나보려고 신랑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더 이상 가족 여행은 가지 않겠다! 올겨울 혼자 독일에 가겠다! 하고 말이다.
선전포고.(웃음) 꼭 계획을 달성하길 바란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이 있다면.
음… (고민 끝에) 아무리 치이고 힘들어도, 결국엔 사람 때문에 행복한 것 같다.
2018년 6월 27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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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BH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