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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한국 영화계에 일조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로컬 프로덕션 최재원 대표
2018년 5월 27일 일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매력적 제안과 호기심, 잠깐 비를 피하고자 ‘워너코리아’로,
층층시하 없고, 현지 문화와 정서를 존중, 재량권 부여가 장점,
외국 자본을 유치해 다양하게 한국 영화를 제작하는 것에 큰 의의,
워너 측에서도 파격적인 지원이었던 <밀정>,
너무 빨리 변화하는 콘텐츠 소비 트렌드. 마치 생물 같아,
쾌적한 환경에서 두 시간 동안 오롯이 누리는 만원의 행복을 주고파,
박훈정 감독의 <마녀>, 김지운 감독의 <인랑> 출격 대기 중,
애널리스트에서 투자자를 거쳐 제작자로. <변호인>으로 정점,
그간 작품이 성공 못 했어도 현장만은 즐거웠노라고 자신,
선배로서, 영화계에 일조할 방법을 고민 중,
함께했던 감독, 배우들과 잔치 같은 20년 갈무리를 희망.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최재원

<변호인>(2013)의 천만 흥행 성공으로 제작자로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로컬 프로덕션’(이하 워너코리아)의 대표로 적을 옮겼다.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뭐,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워너측에서 강한 제안을 해왔고, 천만을 달성한 이후 차기작에 대한 부담감과 한편으론 개인적으로 해볼 만한 건 다 해봤구나 싶었다. 블랙리스트도 작용했던 게 당시 투자 유치가 안 됐었다. 잠깐 비 좀 피해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또, 워너 100년 역사가 지닌 힘을 옆에서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워너가 한국에 로컬 프로덕션을 설립하는데 내가 안 맡더라도 누군가는 맡을 것 아닌가. 한국 영화에 새로운 기회이고 내가 그간 투자, 제작, 배급까지 모든 분야를 다 해봤기에 잘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강한 제안이라... 어떤 점에 가장 끌렸는지.
워너 내에서 한국 로컬 프로덕션을 책임지는 디비전 사장과 나 사이에 레이어 없이 다이렉트로 내 의견이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규모가 큰 회사임에도 내 위로 흔히 말하는 층층시하가 없었다.

내 사업을 하는 것과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 각각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유롭게 일하다가 월급쟁이가 된 거지. 장점은 일단 와이프가 좋아한다는 것과 견제 장치가 생겼다는 거다. 영화일이 개인이 아무리 잘해도 누군가가 크로스체킹 해주고 반대 의견을 개진해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재 과정이 있는 게 좋다. 게다가 현장이 원체 빠르게 변하니 일하다 보면 안 좋은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본사 핑계를 댈 수 있어서 좋더라. (웃음) 내가 포지셔닝 하는데 한결 수월하다. 게다가 거대 회사가 뒤에 있다는 건 누가 뭐래도 안정적이고, 자본 한계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작품에 투자 결정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한국 영화를 만드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올해 네 편을 개봉 준비 중인데 나 혼자였다면 이렇게 많이 개봉할 수 없었을 거다. 기껏 한 편 정도 수준이었겠지.

장점이 많다! 단점은?
창작을 마음껏 못 한다는 거다. 직접 제작할 때처럼 현장 사람과 다이렉트 커뮤니케이션에 제약이 있다. ‘제작자 최재원’보다 ‘워너코리아 최재원’이 어느새 더 커졌다고 할까. 또, 제작은 흥행에 성공하면 목돈이 들어오지만, 월급쟁이는 한 방이 없는 것도 있고. 그런데 원래 직장 생활하다가 영화 투자와 제작을 시작해서 그런지 월급쟁이 생활도 나름 괜찮다.

직속 상관과 다이렉트로 소통한다고 했는데, 재량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지. 즉, 투자 결정과 문제 상황 발생 시 당신의 의견 반영 정도는.
그들은 한국 시장에 대해서 자신들이 아닌 ‘나’를 전문가라고 믿고 대부분 내 판단을 지지해 줬었다. 최근 보스가 바뀌어서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웃음) 예전 보스는 나를 픽업했던 분인데, 내가 합류 후 한 달밖에 안 된 시점에서 백 억짜리 <밀정>을 한다고 하니, 워너 관리팀이 전에 없던 사례라고 뒤집어 졌었다. 그럼에도 나를 밀어준 그(보스)가 대단한 거지, 성공해서 다행이고.

한국인에게야 <밀정>이 비분한 역사에 바탕한 가슴 뜨거워질 첩보물일 수 있겠지만, 역사적 기반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공감하기 힘들 수 있다. 보스의 반응이 궁금하다.
그에게는 코리아 역사를 바탕으로 하지만, 스파이물이라고 소개했다. 번역해서 보내니 바로 두 시간 만에 하자고 연락이 왔었다. 결정은 바로 했는데 실제 투자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첫 작품이다보니 우리와 그들의 영화 제작 룰을 조율하는데 8개월 정도 소요됐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산업의 관행을 모두 따라줬다.

한국영화의 관행이라 하면.
대표적인 게 제작과 배급의 이익 분배 비율과 자본 투자 시기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크랭크인 들어가기 전에 (대부분 인건비로) 보통 제작비의 반이상이 투자된다. 할리우드의 경우는 완성이행보증 보험을 드는 게 통상인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이런 부분에서 한국의 관행을 그대로 따라줬다는 거다. 한편, 저작권과 스케줄 관리 등 그들의 선진화된 룰은 당연히 우리가 따랐다. 그들은 창작 가치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기에 감독과 작가에 대한 배려가 큰 편이다.

투자 제작과 관련해서 워너만이 고수하는 원칙이나 시스템이 있다면.
일 년 라입업 중 한 편은 꼭 루키(신인 감독)의 작품을 선택하려 하고 장르의 밸런스를 맞추려 노력한다. <밀정> 이후 이주영 감독의 입봉작인 <싱글라이더>, 이후에는 전혀 다른 장르인 <브이아이피>(2017, 박훈정)를 제작했는데, 이런 노력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지점이다. 처음 <밀정>의 흥행을 바라보며 일부에서는 외국이 들어와서 한국 돈을 뽑아간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사실은 반대라고 본다. 외국자본이 그들의 경험치를 투영하여 한국 영화를 제작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돈 다 대가면서 말이다.

제작 영화 관련하여 예상치 못한 사회, 문화적 논란이 불거졌을 때, 워너측의 대응 매뉴얼이 있다면. 예를 들면 <브이아이피>(2017)의 여혐 논란이라든지....
돌발 상황 시 일반적인 대응을 한다. 추세를 지켜보는 거지. <브이아이피>의 경우 완성도 면에선 만족했었다. <이웃사촌>이 오달수 배우가 미투에 연루되면서 개봉이 미뤄졌는데, 재촬영 등을 포함한 판단은 모두 현지에 맡겼다. 한국적 정서와 문화를 존중하고 현지의 판단을 합리적이라고 믿어주는 편이다.

워너코리아를 맡은 지 벌써 4년 차다. 그간 한국영화산업에 영향을 미친 점이 있다면?
음...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워너에 합류한 것이 기존의 CJ 엔터테인먼트로 대표되는 대기업 등에 건강한 긴장감을 주지 않았나 싶다. 워너코리아가 자본 면에서 대기업에 밀리지 않을 테고, 한국영화계 네트워크 면에선 ‘최재원’이 있으니 꿀릴 이유가 없다. 다른 중소 배급사들에도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올해 4년째인데 콘텐츠 접근 방식 등에서 이전의 갑을 논쟁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흥행하지 못해 아쉬운 작품이 있다면.
아직까지 4편밖에 개봉하지 않아서....개봉 중인 <챔피언>은 기대보다는 다소 아쉽지만, 손익분기점은 넘겼다. 함께 붙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가 너무 셌고, 한번 타이밍을 놓치니 치고 올라가기 힘들더라.

흥행에 아쉬움보다는 만듦새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 영화를 매번 내놓으면서 관객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피는 중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관객의 반응과 소비 패턴이 정말 빠르게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 예전엔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게 있었는데, 이젠 그 정도가 먹히지 않는다.

연출 외에는 안 해본 영화 작업이 없는데, 이 일의 매력이 있다면.
20년을 해도 똑같이 언제나 조마조마하다는 거?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하면 관록이 붙고 어느 정도 시스템에 따라 일 처리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영화일은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이를 먹지만, 관객은 아니다. 새로운 세대가 끊임없이 유입되어 순환하고 있다. 한마디로 내 정서와 관객의 정서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거다. 콘텐츠 소비 문화 트렌드를 유심히 살피며 흥행 결과에 겸허해지는 이유다. 이일의 장점이자 단점인 거 같다.

당신이 체감하는 콘텐츠 소비 트렌드 추세는.
좀 전에 말했듯 예측이 힘들다는 거다. 전혀 엉뚱한 반응이 나올 때도 있다. 대중의 관람 성향이나 태도가 마치 생물처럼 변화가 크다. 의아하기도 하다. 가령, 스크린 독과점으로 비난받았던 <군함도>보다 <인피니티 워>는 더 많은 스크린에서 상영됐는데, 그 점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반응 원인에 대해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사실 <인피니티 워>가 너무 궁금한데, <챔피언> 때문에 아직 못 봤다. 영화 내리기 전에 두 영화표를 모두 산 후, <인피니티 워>를 봐야지.(웃음) 예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다. <다크 나이트>(2008)와 내가 제작한 <좋은 놈, 이상한 놈, 나쁜 놈>(이하 <놈놈놈>, 2008)이 동시에 개봉했었다. 그때도 <놈놈놈>과 <다크나이트> 표를 동시에 산 후 <다크나이트>를 봤었다.

‘생물’이라...재밌는 표현이다. 생물 같은 환경에 대응책은.
영화는 기획부터 공개까지 시간이 걸리는 반면 콘텐츠 소비 성향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관객에게 소비를 부탁하는 입장에서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관객이 공감하는 포인트가 무엇일지,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고민한다. 영화는 위안과 공감, 재미를 줘야 한다. 내 생각을 고집해서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게 아니라, ‘이거 재미있던데 당신은 어때?’ 이런 화법으로 접근하려 한다.

영화는 하이 문화가 아니다. 이 말은 싸구려, 저질이라는 말이 아니니 오해 말라! 영화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문화라는 뜻이다. 비교하자면, 파인 레스토랑이나 한정식이 아니라 탁배기 한잔과 함께 즐기는 국밥 같은 음식이다. 티켓 가격이 올랐다고 하지만, 만천 원 내외로 두 세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활동을 찾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일상에 지쳤거나 희망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영화를 관람하는 그 시간만이라도 웃고, 휴식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주고 싶다. 마치, 옛 사람들이 주막에 들러 엉덩이 한자리 걸치고 앉아 먹었던 뜨끈한 국밥처럼, 금전적 부담 없이 따뜻하게 배 불려줬던 것처럼, 영화를 통해 그런 즐거움을 선사 하고 싶다. 마침 한국 영화관은 세계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만큼 쾌적한 환경을 자랑한다.(웃음)

이후 워너코리아의 라인업을 소개한다면.
첫 주자는 박훈정 감독의 설욕작 <마녀> 다. 완전 신인 배우인 김다미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다. 다음은 강동원, 정우성, 김무열이 함께한 <인랑>이다. 개인적으로 김지운 감독의 역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 최재원

<인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지운 감독과 인연이 깊다. 한마디로 영화적 동반자 같은 느낌이다. (웃음)
음,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장화홍련>(2003)의 투자자로 첫 인연을 맺었고, 이후 <놈놈놈>(2008)으로 제작에 도전했다. 워너코리아 첫 작품이 <밀정>이었으니.... 이만하면 동반자라 할만하지 않나!

실례가 안 된다면, 혹 누가 선배인지. <밀정> 당시 김지운 감독 인터뷰 보니 말씀을 참 잘하시더라. 특히, 표현력이 탁월했던 기억이 있다.
그가 연배가 높다. 그는 어눌한 달변가로 생각이나 단어 선택이 정말 탁월하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종자부터 아티스트,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에서 감히 예술가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중 감독은 김지운, 배우로는 송강호다.

증권사 애널리스트 출신이다. 영화계에 뛰어든 계기는.
애널리스트로서 영화 투자 분석을 했던 게 인연이 됐지만, 일단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연극도 좋아했고, 한때는 다큐멘터리 작가도 했었다. 영화 투자를 한 것도 영화계로 진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직접 뛰어든 후 투자가 잘 안 되고 망하기도 했는데, 어느덧 파이넌스 쪽으로 다시 가긴 많이 와 있더라. 영화계에 말뚝 박게 된 거지. 투자하다 보니 직접 제작해서 평소 만들고 싶었던 작품을 만들고 싶더라. 그때, 김지운 감독이 기꺼이 합류해줬다. <장화홍련>의 투자자와 감독으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투자자답지 않게 거들먹거리지 않고, 자신을 이해해줬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놈놈놈>이다.

영화에 그톡록 매료된 이유는 무얼까.
정말 매력적인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거다. 한때, 벤처 투자로 돈을 많이 벌고, 잘 쓰기도 했지만, 그런 것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 흥행에 실패해서 망하건 성공하건 내가 만든 걸 누군가 보고 웃고 운다는 사실 자체가 짜릿하다.

<장화홍련>(2003), <살인의 추억>(2003) 등의 투자자에서 <놈놈놈>(2009)으로 제작에 도전했다. 이후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1) 등을 거쳐 <변호인>(2013)으로 제작자로서 정점을 찍었다. 제작자로서 ‘최재원’을 자평한다면.
꽤 많은 작품을 했지만, 잘 해서 한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측면이 컸다. 처음으로 프로듀서로서 능력 있다고 인지한 게 바로 <변호인> 이었다. <변호인>을 하면서 나도 꽤 괜찮은 프로듀서라고 느꼈고, 워너코리아를 맡으면서는 내가 프로듀서가 맞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한국에서 프로듀서는 자금 조달, 퀄리티 평가, 키맨들의 조화를 유도하는 맏형 역할 등등 하는 일이 정말 다양하고 많다. 파이넌스 출신이라 자금 흐름에 냉정, 꼼꼼, 타이트하게 조임에도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편해하는데 그게 내 강점인 것 같다. 많은 현장을 거치며 양아들과 양딸이 많이 생겼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면 막내 스태프들이 그냥 날 ‘아부지’ 라고 부르며 편안하게 대한다. 내가 만들었던 작품이 모두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전부 즐거웠던 현장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웃음)

연출, 프로듀서, 배우, 작가 등등 영화 관련 일을 희망하는 후배들이 많다. 또, 워너코리아를 비롯해 직배사 입사를 희망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후배에게 조언한다면.
인문학의 중요성을 말해 주고 싶다. 소비 대상인 관객을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르치려 말고 관객과 함께 가야 하는데, 인문학 베이스가 튼튼하지 않으면 좁은 시야와 얕은 지식으로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익숙함 속에 새로움이나 기발함을 끌어냈을 때 무릎 치며 감탄하지, 낯설고 난해한 것에 감격하지 않는다. 즉,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게 관건이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책이든 영화든 타인의 생각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니 책을 많이 읽고 영화를 자주 봤으면 한다.

당신이 후배였던 시절도 있을 거다.(웃음)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
영화 처음 시작할 때 도움을 많이 주셨던 분이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셨다. 나에겐 스승 같은 분이다. 이후 영화 산업에 상장 바람이 불고 규모도 커졌지만, 이 바닥에 어른이 없다, 선배가 없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20년 전에도 주축이었던 386세대인 우리가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내가 선배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내 바로 밑 팀장이 14살 차이인데, 중간에 다른 직원을 두지 않고 내가 좀 내려가고 네가 좀 올라와서 일하자 한다. 기반을 어느 정도 다져 놓은 후에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시 제작자로 돌아갈 의향이 있는지. 아니면 투자, 제작에 이어 남은 건 연출인 거 같은데.... 혹시? (웃음)
작품을 제작할 생각은 없다. 다만 영화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연출은 음, 한 편쯤은. 감독을 업으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영화를 했던 사람들과 20년을 갈무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까. 그간 같이 작업했던 감독들이 총 출동해서 그들이 프로듀서를 맡는 등 역할을 바꿔 보고, 송강호를 비롯한 배우들이 단역이나 카메오로 등장하는 거다. 그 영화를 상영하는 자리는 정말 한바탕 잔치일 거 같다. 그런 축제 같은 갈무리도 좋지 않을까.(웃음)

평소 경쟁 업체 작품이나 라이벌 작이라든지 일적으로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지. 좋아하는 영화를 꼽는다면.
한국 영화의 경우는 내가 꼭 보지 않아도 시나리오, 감독, 배우 등 제작진과 출연진을 보면 대충 체급이 결정된다. (웃음) 그들과는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조절을 한다. 솔직히 외화는 굳이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다. 한국 영화 관객과 외국 영화 관객은 성향이 다르다는 생각에서였는데, 최근의 블록버스터들은 다르다. 한국 영화에 영향을 미칠 만큼 파급력이 커졌다. 또, 한국에 들어오는 외화는 웰메이드 작품이 많기에 창작에 도움을 받고자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사나 카메라 워킹 등 할리우드 영화는 대부분 컴팩트하고 짧은 기간에 찍어내는 노하우가 뛰어나다. 영화를 보고 좋으면 메이킹 필름을 구해서 보곤 한다. 카메라 워킹이 뛰어났던 <그래비티>(2013), 원 신과 원 테이크, 8분 롱테이크 등의 <버드맨>(2014) 등등 어떻게 촬영해서 구현했는가를 중심으로 본다.

좋아하는 영화는 내가 제작한 영화지만, <놈놈놈> 이다. 영화적 완성도가 너무 좋아 이런 게 아니라 만들었던 과정 모든 것이 기억에 남아서다. 당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풀자면 끝도 없을 거다. (웃음)

영화계에 몸담으며 그간 명암이 많았을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혹은 인생에서 고수하는 원칙이 있다면.
불교 신자인데, 명상이 많은 도움이 됐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는 본질이 무엇인가이다. 평소 내가 누구인지 자문한다. 현재 워너코리아 대표 최재원, 남편 최재원, 아버지 최재원.... 그 타이틀을 다 뗀 후 ‘최재원’은 누구인가. 그게 나의 본질이 아닐까. 영화업은 사람 간의 관계가 가장 힘들다.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하고 욕망이 상충하게 되는데, 그 원인의 본질을 찾다 보면 해답이 보이곤 한다.

최근 인상적인 일이나 행복한 순간은.
예전에 같이 일했었던 후배 두 명이 독립하여 직접 영화를 제작했다. 그들이 어느 날 나에게 ‘선배가 롤모델’이었다고 하더라. 그게 너무 고마우면서 한편으론 선배 구실 잘 해야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 있는 아들이 3년 전에 출가했는데, 이번에 가서 만나니 나보다 훨씬 성장해 있더라. 출가 당시에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었다. 이번에 아들이 그렇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너무 행복했다. 내 나이 또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자식인데, 나는 거기서 해방(?)됐으니 앞으로 나만 잘 살면 된다.(웃음) 남은 시간을 잘 보내면서 한편으론 후배를 위해 영화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는 요즘이다.

<인랑> 마지막 장면에,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희망을 꿈꾸는 자들은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는 이런 모순적인 대사가 있는데 그게 와닿더라. 항상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챙기기 급급했는데,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2018년 5월 27일 일요일 | 박은영 기자(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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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종훈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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