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이유영은 ‘외유내강’이라는 말에 꼭 맞춤한 배우다. 금방 눈물이라도 툭 떨굴 것 같은 큰 눈망울과 야리야리한 모습 뒤로 그간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과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데뷔작 <봄>과 <간신>에서는 대담한 노출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놈이다>에서는 귀신에 빙의됐었다. 모두 소위 ‘센’ 역할들이었다. 이번 <나를 기억해>의 성범죄 피해자 ‘서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역할이 마음에 든다면 센 역이든 약한 역이든, 큰 역이든 작은 역이든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한다. 미리 선 그어 배제하고 몸 사리고 하지 않을 뿐이라고. 그러다 보니 그런 역들이 더 많이 들어 오는 것 같다며 웃는다. 어떤 색이든 흡수할 준비가 된 말간 배우다.
(해당 인터뷰는 <나를 기억해> 관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주연작인 <봄>(2014)을 비롯해 <간신>(2015), <그놈이다>(2015) 등에서 과감한 캐릭터를 선택해 왔다. 이번 <나를 기억해>의 ‘서린’은 성범죄 피해자이다. 쉽지 않은 역할이다.
내가 과감한 역할을 한다고 전혀 의식하지 못 했었다. 독립영화와 단편 영화를 많이 하다가 얼떨결에 데뷔해서 그런지 이미지 때문에 어떤 역을 꺼린다든지 하는 생각도 못 했었고. 나중에 주변에서 겁이 없다고 혹은 몸 사리지 않는다고 얘기해서 아, 그런가 보다 했다. 평소 마음에 들면 어떤 역할이든 하는 편이고 센 역할이라고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소위 ‘힘든 역’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 같다
‘서린’의 어떤 면에 끌렸는지.
요즘 여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 나가는 영화가 드물다. 처음에는 그런 면이 욕심났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자료 조사차 관련 기사 등을 찾아보니 음란 동영상 불법 유포로 피해를 보는 여성과 관련된 성범죄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됐다. 그 이후 의무감조차 들었다.
극 중 계속 협박당하고 불안 속에 사는 역할이라 감정적으로 힘들었을 것 같더라. 실제로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던가.
촬영할 당시에는 잘 모른다. 그냥 그 감정 속에서 연기하기에 어두운 캐릭터라 해서 특별히 더 피폐해지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단막극을 촬영했는데, 아주 유쾌하고 밝은 역할이었고 촬영장 분위기도 흥겨웠었다. 그 촬영이 끝나보니 알겠더라. 밝은 역할이 실제로도 행복한 영향을 준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촬영이 끝나고 확 지쳤다. (웃음) 좀 모순인가?
극 중 ‘서린’이 음란 동영상 피해자인데, 직접 경험해 볼 수도 없는 일이라....그녀의 감정을 어떻게 잡았는지.
성범죄 피해자들이 직접 기록한 경험과 치유담을 읽었었다. 그들이 성범죄를 당한 이후에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듯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당시 받은 상처는 평생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극 중 ‘서린’도 마찬가지다. 윤리교사로 재직하고 결혼을 앞둔,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그녀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그 공포감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괴로울 때 공황장애처럼 호흡이 가빠지는 모습으로 표현해 봤다. 또, 평소 집에 있을 때 어두운 상태로 있고 항상 커튼을 쳐 놓는 등 외부와 단절된 모습으로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해 봤다.
그녀가 성범죄의 피해자인 것만도 아니다.
그렇지, 과거에 자신을 보호해줘야 할 경찰로부터 배신당하고 언론에 노출되어 상처를 받지 않았나. 성범죄도 성범죄지만 그 배신감과 상처가 너무 컸기에 후에 사건을 혼자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은 거라고 본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서린’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해 아주 외롭다고 생각했을 거다.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폭로하거나 맞설 생각을 못 했던 ‘서린’이 제자인 ‘세정’(오하늬)을 위해 용기 내게 된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세정’이 비겁해지고 싶지 않다고, 도망간다고 해도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반문할 때, ‘서린’의 안에서 뭔가 꿈틀했을 거다.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현재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그녀는 항상 도망가고 숨고 범죄 피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고 했었다. 평생을 숨어 살아온 자기 인생을 돌아봤을 것 같았다.
‘서린’의 약혼자가 음란 동영상 피해자를 향해 ‘그럴만 했으니 피해를 당했겠지’ 라는 식의 발언을 한다. 피해자가 숨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현실에 만연한 그릇된 사고를 반영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서린’을 각성시켰다고 본다.
자기는 당해보지 않아서 툭 던진 말인데 사실 너무 잔인한 말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노와 오기가 치솟고 약혼자에 대한 정도 뚝 떨어졌겠지.
그의 무신경한 발언에 관객이 공분할 듯 하더라. 혹시 관객의 화풀이용 대사일까? (웃음)
음... 그럴지도(웃음) 감독님이 원체 꼼꼼하시더라.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다 의도적이고 빈틈없이 배치돼 있었다. 사실 같이 결혼 준비하는 등 약혼녀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도 있었는데 다 편집되다 보니 (강지섭) 오빠의 나쁜 면만 부각된 게 있다. 그래서 욕을 집중적으로 먹는 것 같다.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질문하기가 조심스러운데, 후에 밝혀진 범인 ‘마스터’의 존재에 ‘서린’이 다행이라고 안심한다. 그 점에 공감이 되던가.
솔직히 처음에는 공감이 안 됐고 처벌과 용서의 경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게 정말 용서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스스로 설득한 거로 이해했다.
일전에 기자간담회에서 의미 있고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라 소개했다. 아쉬운 점은.
촬영할 때는 잘 못 느끼다가 완성본을 보면서 매번 느끼는 감정이다. 특정 장면보다는 전반적으로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너무 연약한 여성처럼 보여서 아쉬웠다. 장면과 장면이 전환하는 지점에서 다른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크게 달라 보이지 않더라. 특히, 자살 시퀀스는 다시 촬영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 장면을 보고 ‘서린’이 자살하려 한다는 걸 알아챘는지?
당연하다, 옆에 버젓이 면도칼을 두고 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다시 촬영하고 싶을 정도로 만족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살하기 직전에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는 건 정말 힘들다. 울어서 엉망이 된 모습일 수도 있고 아주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모습일 수도 있을 거다. 아니면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일 수도. 그렇게 다양할 텐데, 그녀(서린)가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겪은 힘듦이 잘 표현 안 된 것 같았다. 좀 더 사연이 있었는데 편집돼서 아쉬웠다.
약혼자(강지섭) 분량도 그렇고 형사 ‘국철’(김희원)이 나오는 부분도 꽤 많이 편집됐다고 들었다. 러닝타임이 101분으로 그렇게 긴 편이 아닌데 편집을 많이 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아마도 감독님이 스릴러임을 고려해서 긴박감을 주려고 한 듯하다. 사실 ‘서린’과 엄마와의 사연도 더 있었다.
엄마와의 사연을 잘 살리면 눈물 꽤 났을 법한데 안타깝다. 고등학생 ‘서린’을 연기한 배우(김다미)와 실제로 많이 닮았더라.
감독님이 일부러 닮은 배우를 찾았다고 하시더라. 처음 시나리오 보고 내가 고등학생 역할까지 다 하는 중 알았고 그 점이 욕심났었다. 둘 다 잘 해 내면 연기적으로 칭찬받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었다. (웃음)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는다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차되며 차를 타는 모습이다. ‘서린’이 차에서 호흡이 안 돼 힘들어하다가 그걸 극복하고 다시 운전해 나가는데 그 모습이 좋았다. 과거의 ‘서린’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지만, 그 어려움을 참고 이겨낸 거니 말이다. 많이 강해졌구나 싶었다. 그리고 ‘서린’이 전학 가서 첫인사를 하는 장면도 좋아한다. 안경을 벗고 헤어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이름을 바꾸고 주먹을 꼭 쥐고 새로 시작하려는 그 마음이 너무 예뻐 보였다.
감정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것 같은데, 특히 힘들었던 장면이 있다면.
음, 화장실에 앉아서 속옷 사진 찍어서 보내는 장면. 이게 행복한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로서 그간 쌓아온 행복을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이라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심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다. 너무 바보같이 느껴지고. 시부모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협박에 굴복해 ‘마스터’의 요구를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딱히 그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없을 것 같더라.
<나를 기억해>의 강점을 꼽는다면.
너무 끔찍하고 불쾌한 이야기이지만 현실이라는 것, 음란 동영상 불법 유포 관련 성범죄의 심각성을 환기한다는 거다. 사실 나는 여러 번 봤기에 객관화가 잘 안 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우리 영화가 많이 불쾌하던가.
불쾌하기보다는 가해자는 있는데 그에 대한 처벌이 없다는 것에 화가 나고 답답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잔인함과 노출 수위는 의외로 낮더라.
그 부분이 나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게 어쩔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관련 사회제도나 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마 최대한 현실적으로 그리려 한 결과라고 본다. 또, 감독님과 제일 많이 상의했던 부분이 수위 조절이다. 아주 예민한 부분이라 어느 정도까지 보여줘야 할지 고민했었다. 성범죄 피해자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다 보여준다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희석되니 말이다.
좀 전에 단막극 촬영을 마쳤다고 했는데, 소개 좀 해달라.
음, 2부작으로 제목은 <미치겠다, 너 때문에>이다. 예전엔 각 방송사에서 단막극을 제작했지만, 요즘엔 없어졌는데 이번에 MBC가 다시 시도한다고 한다. 이번엔 특집극 형식으로 아직 정규 편성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상대역은 김선호 배우로 오래된 친구인데 서로 미치게 하는 내용이다. (웃음)
제목부터 끌린다. 꼭 챙겨봐야겠다.
5월 7일~8일에 방영된다. 봐달라.
앞으로 ‘밝은’역의 당신을 자주 보게 되는 건가.
생각해보면 내가 밝은 역을 한 적이 없는 거 같더라. 이번에 단막극 촬영하고 나서야 밝은 역이 좋다는 걸 알았다. 일단 마음이 편하고 유쾌했다.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할까.
홍상수 감독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서 약간 사차원이긴 하지만 그래도 발랄한 역할이었다. (웃음)
그때 촬영하면서 정말 행복했었다. 마치 노는 것처럼 작업했던 게 일단 대본이 너무 재미있었다. 연기하다 한 두시간 줄 테니 외우고 오라 하시만 또 열심히 가서 외워왔었다. 극 중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은데, 실제로 맥주 마시면서 상대 배우랑 처음 만나는 양 연기하곤 했었다. 평소 술 마시면 좀 업되는 편인데 그래서인지 연기가 아니라 진짜 들떠서 촬영했었다.
당신의 매력을 200% 끌어냈던 작품이 아닌가 한다. 보면서 홍 감독님은 여배우의 매력을 살리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감탄했었다.
고맙다. 감독님께서 한두 번 촬영해 보고, 그때그때 대본을 써 주셨었다. 내 좋은 모습이라고 할까, 여하튼 내가 잘 할 수 있는 지점을 잘 포착하셨나 보다.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아, 떨린다. 당연히 많은 분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열심히 힘들게 촬영했는데 너무 외면당하면 힘 빠진다. 관객수보다 무관심이 가장 슬프다.
우문을 하자면.... 평소 흥행과 작품성 중 어느 쪽을 중시하는지.
어, 아직 흥행작이 없어서.... 흥행과 작품성이 함께 가면 제일 좋겠다! 그런데 보통 작품성이 좋으면 흥행도 잘 되지 않나?
우문에 현답이다. (웃음) 그런데 흥행과 작품성이 꼭 같이 가진 않는다고 본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인상 깊은 일이나 행복했던 일이 있다면.
요즘엔 단막극 촬영할 때가 참 행복했었다. 정말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문제는 촬영장에선 행복한데 집에 오면 우울했다는 거, 내가 조울이 왔다 갔다 한다. (웃음)
2018년 4월 19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제공. 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