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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 <반도에 살어리랏다> 이용선 감독
2018년 1월 25일 목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이른바 재패니메이션이 선보인 환상적인 세계관을 누려온 관객에게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신선한 충격을 안길지 모르겠다. 일단, 그림체가 대단히 단순하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판타지도 없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안시, 오타와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가 이 작품을 공식 초청했다. 대한민국 사회 현실을 지극히 치밀하게 드러내는 까닭이다. 시간강사로 근근이 밥벌이하는 40대 아저씨 ‘오준구’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작품이 보여주는 건 다름 아닌 ‘헬조선’ 생존기다. 비인간적인 조직 시스템의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때로는 괴물 같은 가해자로 돌변할 수밖에 없는 암담한 현실, 이미 어른이 된 관객이 이 생존기에 공감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의 모습이 좋든, 싫든 말이다.

교수 사회 권력 관계와 성 추문 등, 이른바 ‘헬조선’으로 불릴 만한 적폐를 고스란히 녹여낸 애니메이션 <반도에 살어리랏다>를 선보인다. 당신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처음 언론에 작품을 공개하는 자리에서는 정말 긴장했다. 장편은 처음이지만 작품은 다섯 개 째라, 그렇게까지 떨릴 줄은 몰랐다. 기자는 아무래도 보편적인 관객에 비하면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관객인 것 같다. 영화를 좀 더 파고들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작인 단편 애니메이션 <화장실 콩쿨>(2015)로 인디애니페스트 3관왕에 오르는 등,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상영되는 곳마다 반응은 상당히 좋았는데, 인디애니페스트를 제외한 영화제 수상 실적은 형편없었다. 30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영화제에서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 바엔 장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 주인공 ‘오준구’는 여러모로 전작 <화장실 콩쿨>에서 계승, 발전시킨 듯한 느낌이다. 40대 가장이자, 먹고 사는 게 쉽지만은 않은 시간강사다.
내 여건에서는 장편 도전 자체가 무모해 보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수록 콘셉트를 빨리 개발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전작에서 많은 요소를 가져왔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일 수 있었던 까닭은.
한국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은 개봉할 때마다 시험대에 올라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품질 문제 때문이다. 이제는 좀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렇게까지 잘 만들어내는데 너희는 왜 이 정도 밖에 못 만드냐는 지적이다. 관객이 기대하는 만큼 시각적 만족감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컸다. 국내 애니메이션은 유아용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과연 사람들이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얼마만큼 봐 줄지 우려했다.

이른바 재패니메이션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아무래도 작화가 단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각적 만족감을 위해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가장 큰 돌파구로 삼은 건 클로즈업 샷이다. 중간중간 줌을 엄청 많이 당긴다. 작화가 다소 부족해도 박진감 있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웃음) 혹은 전경을 깔아두고 캐릭터를 잠시 멈춰 있게 둔다든지… 투입된 노동력에 비하면 붕 뜨는 장면 없이 연결될 수 있도록 몇 가지 방법을 썼다.

작업에 투입된 노동력은 얼마나 되나.
공식적으로 프로덕션 과정에 참여한 사람은 다섯 명이다. 중간중간 몇 달씩 도와준 사람들도 다섯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한 사람이 하루에 50에서 100장씩 그렸다고 보면 된다. 인력 면이나 제작 기간 면에서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러닝타임은 단편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났는데, 그렇다면 상당히 척박한 제작 여건이었겠다.
하루에 몇 장 그리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수준까지 계산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이 있었다. 정 때에 맞춰 못 그릴 것 같으면… (한숨을 쉬고) 캐릭터의 쓸모없는 선을 몇 개씩 빼면 된다.(웃음)

그런 방법이…(웃음) 강사로 몸담은 청강문화대학교(이하 '청강대')와 산학협력으로 제작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청강대 애니메이션학과 3학년이 되면 졸업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작품을 직접 기획하면 그 프로젝트에 합류할 친구들을 모으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기획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교수 역시 매해 학생들이 졸업작품으로 참여할 수 있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기획해야 한다. <반도에 살어리랏다>도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었다. 직접 보지 않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지만, 졸업작품을 만들어야 졸업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는 꽤 이상적인 시스템이라고 본다.

당신 기획은 프레젠테이션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좀 있었는가.(웃음)
사실은 미리 홍보를 좀 했다. 프레젠테이션 때 학생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기획 자체가 무산 돼버려서…(웃음)

어떤 학생에게는 <반도에 살어리랏다>가 졸업 작품인 셈이다. 그들의 노고가 상당히 많이 들어간 작품이겠다.
청강대에서 졸업작품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장편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치 저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 것처럼 거대하게 느껴져 그동안 아예 꿈을 못 꿨다. 나도 학생 때는 그랬다. 하지만 <반도에 살어리랏다>를 만들었으니, 작품 반응이 좋으면 학생들도 졸업작품으로 장편 제작하는 일을 좀 더 만만하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제작 지원, 개봉 지원 등 애니메이션계의 구조적 지원도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역량 있는 창작자라도 홀로 제작비를 책임지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구조적인 지원에는 사실 좀 회의적이었다. 콘텐츠진흥원에서 요구하는 지원 자격은 아무리 봐도 기업용이다. 예컨대 10억을 지원해주면 자부담금으로 절반을 마련해야 하는 식이다. 독립애니메이션 감독은 어떤 지원이든 일단 받으면 정해진 기간 안에 작품을 완성해내는데… 아마 지금 상황에서는 감독이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절대 믿어주지 않을 것 같다.(웃음)

그럼에도 5,000만원 이라는 한정된 제작비로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물론 픽사나 지브리처럼 강력한 팬층을 확보한 스튜디오 작품과 바로 품질 면에서 승부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만큼은 볼만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20대 이상 성인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면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성인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라면, 예컨대 작품에 등장하는 ‘헬조선’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임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전셋값, 청소년의 꿈이 공무원 등… 르포에 준하는 사회 관찰력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속해있는 사회의 시스템에는 꽤 관심이 있다. 시스템이 제 역할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는 주인공에 대항하는 명확한 안타고니스트가 없다. 한 명의 악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긴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교수 사회 권력 관계의 피해자이자, 가부장제의 희생자이기도 한 ‘오준구’는 노교수에게 성추행당한 여성 제자 ‘김기쁨’과 갈등 구도를 형성한다.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일종의 가해자로 둔갑한다.
‘오준구’가 벌이는 행동은 도저히 응원할 수 없다. 하지만 창작품의 기능 중 하나는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강사라는 직업을 정한 뒤, 그가 몸담은 사회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냈다. ‘오준구’의 행동이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실제로 우리가 그런 사회에 놓여있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만 있다면 창작품을 계기로 주변을 되돌아볼 수 있다고 본다.

그게 블랙코미디의 기능일지도 모르겠다.(웃음) 이 작품으로 처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이하 ‘안시 영화제’) 초청받았으니 상당히 기쁠 것 같다.
엄청 좋았다. 동생이 프랑스에서 순수미술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10년 동안 한 번도 찾아가 보질 못했다. 학생 때는 학생이라 거지였고, 졸업하고 나서는 작품을 만드느라 거지였다.(웃음) 작품을 초청받아 가보게 됐으니 성취감이 정말 컸다.

정말 뿌듯했겠다.
안시 영화제는 청강대에서 졸업작품을 만들던 3학년 시절부터 상당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 당시 안시 영화제에 출품을 했는데 아주 친절하게도 떨어졌다는 메일을 보내주더라. 그래서 스팸 계정으로 등록했다.(웃음) 우리나라는 탈락 소식은 메일로 보내주지 않아서, 메일을 보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기 싫었다. 그래도 가끔 스팸메일함을 열어 보긴 했다.

그 심리 알 것 같다.(웃음)
영수증 같은 필요한 정보도 종종 들어 있고…(웃음)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출품하긴 했지만 초청될 거란 기대는 전혀 안 했는데, 스팸 메일함 안에 초청 메일이 와있더라. 이게 진짜 초청 받았다는 뜻인 건가?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고 바로 안시 메일 계정을 스팸 해제했다.(웃음)

오타와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 전 세계 유수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도 아직까지 정확히 모르겠다.(웃음) 다만 오타와에서 작품을 상영했을 때는 관객들이 코미디 요소마다 다 웃어주더라.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전부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떤 상호작용은 됐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미국이나 프랑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다. 판타지를 섞어도 좋긴 하겠지만 그렇다면 그 사회의 실제성과 특수성은 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내 작품이 강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음.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하다니.(웃음)

관객에게 추천할만한 감상 포인트가 있다면.
‘오준구’가 교수 회식 자리에서 상을 엎고 달려들며 화내는 신을 좋아한다. 참고 참다가 감정이 폭발하는 부분인데, 그런 걸 그릴 땐 참 통쾌하고 기분이 좋다. 사실 평소에도 한 번쯤, 너무 화가 나는 상황에서 밥상을 엎어버리는 상상을 하곤 하지만 저지르지는 못한다.(웃음)

자기 욕구의 반영이군.(웃음) <반도에 살어리랏다>만의 독특한 해학을 느끼게 하는 ‘오준구’의 한풀이 춤 시퀀스도 독특하다. 감정 분출구 역할을 한 듯싶다.
정확히 그 기능을 의도해 넣은 장면이다. 하지만 관객마다 받아들이는 느낌은 다르더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어떤 시간강사 분이 그 장면을 보고 나서 상당히 답답했다는 의견을 주셨다. 사람의 실제 손가락 모양이 등장할 때 마치 자신을 비난하고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자신을 ‘오준구’의 처지에 대입하고 작품을 봤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때로는 연출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에 놓이곤 한다.
재미있고도 미묘한 순간이다. 일단 작품은 관객에 보이는 순간 내 손을 떠난다. 본 사람의 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이번 작품으로는 더 변명할 수 없지만, 차기작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

동의한다. 개봉 준비 과정은 버틸만한가. 작품에 몰두하는 창작과, 언론을 만나고 작품을 홍보해야하는 개봉은 전혀 다른 경험이라고 본다.(웃음)
작업을 할 땐 마치 최면을 걸듯이 내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건 혁명적인 작품이고, 만들면 무조건 잘 될 작품이라고.(웃음) 그래야 팀원 사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봉 이후에는 그 최면을 다 풀고 관객의 객관적인 평가와 함께해야 한다. 그 자체가 영광이고 기쁜 일이면서도 긴장감이 크다. 작업실에만 처박혀 있으니. 무엇보다… 기사나 인터뷰에 들어가는 사진을 찍는 게 정말 싫다.(웃음)

그 심정이 여기까지 느껴진다.(웃음) 당신의 차기작을 만나보려면, 이번 작품을 어느 정도의 관객이 찾아줘야 할까.
일단 내 바람은 만 명이었다. 그 정도 관객이 들면 대단히 성공한 게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차기작을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안 그래도 친구들이 묻더라. 몇 만 관객이 들면 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 거냐고. 10만 명을 넘기면 고민 없이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고 했다.(웃음)

아마 그러면 투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웃음)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시기마다 다르다. 요즘은 뭔가를 써냈을 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좋다. 곧 사라지는 감정이긴 하지만, 마치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그런 순간을 만들려고 한다. 쭉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그래서 감독으로 남고 싶다.



2018년 1월 25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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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필앤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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