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관객이 많이 드는 여름시즌에 개봉하는 영화는 꽤 오랜만이다.
<괴물>하고 <최종병기 활>이후로 <덕혜옹주>가 세 번째다.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싶지만 마음은 비우고 있다.(웃음)
<덕혜옹주>를 처음 본 소감은.
예진씨가 옆에서 너무 많이 울었다. 콧물 훌쩍이는 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되더라.(웃음) 농담이다. 매번 겪는 거지만, 완성된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전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촬영했던 상황이 겹쳐서 다가오기 때문에 아무래도 작품 그 자체로 순수하게 보기 어려운 것 같다. 멍했다. 어쨌든 ‘해일아 고생했다’고 스스로 말해주고 싶다. 새삼 덕혜옹주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노인 역할 전문 배우가 된 것 같다.
당분간 노역은 쉴 거다.(웃음) 그래도 한 번 해봐서 수월했다. 분장이 힘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예민함이 덜했다.
이미지가 고착된다는 부담은 없나.
내가 20대때는 ‘섬 전문’배우였다. 인어공주 배경이 우도였고, 극락도 살인사건도 섬이 배경이니까.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새로운 역할과 작품을 맡고 이제는 노인 역할 전문이란 소릴 듣는다.(웃음) 앞으로도 또 새로운 전문으로 다가 가려고 할 거다.
그것 덕분에 다른 역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감독님과 상의해 영화적으로 살을 많이 붙였다. <덕혜옹주>에서 김장한은, 관객이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끝까지 관찰하면서 따라올 수 있도록 하는 렌즈 같은 역할이다. 원작 소설에서도 김장한 별명이 ‘그림자’였다. 그만큼 덕혜옹주를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니면서 지키고 보호하는 게 임무였으니, 그걸 기본 콘셉트로 삼았다.
극 중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독대하는 씬이 있다.
그게 노인으로 특수분장 하고 제일 먼저 찍은 장면이다.
‘저는 이 정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는 대사가 상당히 돌직구였다.(웃음)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던 대사인가.
현장에서 만든 대사다.
누구 아이디언가.
내 아이디어겠나?(웃음) 당연히 허진호 감독님 생각이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나를 ‘장한아’ 하고 부르셨다. 그 대사를 제안하실 때 ‘장한’ 하고 (침묵하며) 지금처럼 이렇게 뜸을 들이시더니, 이 대사를 한 번 넣어보는 게 어떨까 하더라. 당시 촬영이 아주 초반이었고 걸음마 단계이다보니 나 역시 생각할 게 많은 상황이었다. 스크립터가 건네준 대사를 보는데 이 대사가 내 캐릭터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이 말을 할 때는 어떤 감정 상태인 건지, 또 어떻게 내 입맛에 맞게 내뱉을 건지도 따져보게 되더라. 어쨌든 했다.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시대를 사는 그 나이대의 서울신문 기자 김장한이라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구나 싶었다. 한 평생 덕혜옹주를 귀국시켜야 한다는 큰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 아닌가. 그 목적을 좀 더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대사였다. 같이 일해보자는 정치권력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는 원하든 원치 않든 김장한의 삶이 정치적으로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설정의 뿌리는 권비영 작가 소설 ‘덕혜옹주’일 거다. 거기서 고종이 자기의 어린 딸 덕혜를 김장한과 약혼 시키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부분을 근거 삼아서 김장한이 노인이 될 때까지 덕혜옹주를 귀국시키기 위해 찾아다니게끔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손예진과의 호흡은 어땠나.
다른 장르에서 만났으면 부담이 덜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찍을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예진씨는 워낙 <덕혜옹주>를 촬영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준비한 만큼 무언가 보여줘야 된다는 의지가 옆에서도 느껴지더라. 그런 예진씨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재미 있었다는 게 무슨 의민가.
음. ‘느낌’같은 거다. 말을 유려하게 잘 못해서.(웃음) 왜 누가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알아가는 동안 흥미로운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역할 속에 빠져드는 모습 자체도 인상적이었고.
손예진과 키스씬이 있었는데 편집됐다고 들었다.
허진호 감독님 스타일인 것 같다. 감독님 필모그래피를 보면 남녀 관계를 다룰 때 직접적으로 그 감정을 전달하지 않고, 마치 관객이 지근거리에서 그 감정들을 바라보듯이 그려낸다. 그가 갖고 있던 철학이 이번 영화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난 그와 첫 작품이긴 하지만 그 의 표현 방식은 참 미묘하면서도 매력 있다.
일단 감정이란 건 배우한테서 나오는 거다. 허진호 감독님은 배우에게 표현 방법을 충분히 준비해오게 하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보게 한다. 일단 지켜본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양이나 염소들은 풀을 뜯어먹으러 초원에 왔다가도 알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고. 허진호 감독은 배우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최소한의 터치만 하고 배우가 자기 감정과 호흡을 가져갈 수 있게 도와준다. 어떤 배우들은 감독이 더 많은 디렉팅을 줘서 확신을 갖고 그 방향을 따라가는 쪽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난 허진호 감독님 방식이 오히려 좋았다. 배우를 믿어준다.
그 외에 또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 있나? 정상훈 배우는 자기가 나온 장면이 많이 짤렸다고 하던데.(웃음)
아. 얘기를 했구나. 그럼 나도 말 해도 되지 뭐.(웃음) 정상훈씨가 맡은 ‘복동’은 원래 애를 많이 낳은 설정이었다. 차 안에 가족사진도 붙어있고. 김장한에게 결혼 했냐고 묻기도 한다. 그 때 사실 두 가지 버전을 다 찍었다. ‘어땠을 것 같냐?’라고 역으로 물어보는 장면이 있었고, 아예 대답을 안한 채 창가만 쳐다보는 장면도 있었다. 결론적으론 사족처럼 보여서 짤려나간 거겠지만.
김장한과 옹주는 결혼을 했을까.
아마 안 했을 거다. 김장한한테는 ‘옹주님’ 아닌가.(웃음) 지근거리에서 계속 모셨겠지.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다음에 그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더 있다면 그건 번외편으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깊은 드라마일거다.
제대로 총 쏘는 장면은 이번 작품에서 처음이다.
총은 할리우드 뿐만 아니라 기존 한국 영화에서도 많이 쏘는건데 나는 이번에야.(웃음) 한데 총을 다루는 장면은 상당히 집중해야 되더라. 부상 위험이 있어서 긴장되고. 물론 그만큼 현실감도 살아서 감정을 느끼는 데는 훨씬 도움이 됐다.
솔직히 난 그 장면 찍을 때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하는 건가 싶었다.(으하하) 감자 세 개를 놓고 “이거 참, 맛있습니다 옹주님“ 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옹주님이 감자 요리를 잘 해서 맛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옹주님이 해 준 거니까 맛있습니다 라고 하는 건가? 대체 모르겠더라.(웃음) 감자를 씻는 장면에서는 또 내가 하겠다고 나서고. 총도 맞았는데?(웃음) 한데 그 장면이 허진호 감독만 만들 수 있는 거란 생각은 든다. 이런 장면에서도 또 감정선을 보여주는구나 싶었다.
윤제문에게 일본군 제복 입혀줄 때 <고령화 가족> 생각이 나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고령화 가족>은 코미디였으니 <덕혜옹주>에서는 서로 그런 모습 보여주지 말자고 했는데 알게 모르게 그런 분위기가 나와버렸다.(웃음) 사실 그 장면은 김장한이 한택수를 속여야 되는 긴장감 있는 지점이다. 둘이서 편하게 있다가도 촬영에 들어가면 진지해졌다. 어쨌든 재밌게 찍었고 잘 나온 장면인 것 같아서 나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술도 약간 도움이 됐다.(웃음)
극 중 인상적인 배우가 있다면.
김대명씨. 이번 작품에서 처음 만났다. 평상시에 시를 쓴다고 하더라. ‘아 이사람 캐릭터 뭔지 알겠다’ 싶더라. 좋았다. 이우 역의 고수씨도 아주 매력적으로 나온다.
영업 비밀이라서.(웃음) 내 의지만으로 된 건 아니고 운이 좋게도 그렇게 됐다. 앞으로도 규모나 러닝타임 따지지 말고 무조건 1년에 한 작품이라도 관객에게 보여드리고 싶다.
배우 생활 25년차인데 초반과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터뷰 방식이 달라졌다.(웃음) 옛날에는 일대일이었는데 요즘은 나 하나를 두고 기자들이 여섯 명씩 질문을 한다. 그래도 나름 잘 하고 있다.(웃음)
최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허진호 감독과 막걸리 마실 때. 한 창작자를 알게 되는 게 내 입장에선 상당히 중요하다. 술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허진호 감독이 이런 사람이구나, 그래서 그런 작품이 나왔구나, 알 수 있었다.
2016년 8월 5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pgot@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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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박광희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