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 박은영 기자]
(이 인터뷰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52년 생, 1957년 데뷔. 안성기는 아마도 ‘국민’이라는 애칭을 처음 달은 배우인 듯 싶다. 오랜 시간 배우로, 한 눈 팔지 않고 달려온 그를 만나는 건 상당히 조심스럽고 흥분되는 일이다. 첫 느낌은 지금껏 보아온 모습 그대로다. 참 한결같다는 말에 안성기는 답한다. 그렇게 봐주면 참 고맙다고. 한결같음은 스스로 아주 높이 생각하는 가치라고. 후배 연기자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하자 그는 ‘초심을 잃지 말기를…’ 그리고 ‘한결 같기를…’ 당부한다.
참 한결 같으세요. 정말 변함이 없으세요.
한결같음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운동 많이 한 거 같아요. 영화에서 보니 잔근육이 보여요. 얼마나 오랜 시간 준비했을까 싶었어요.
잘 봤어요. 잔근육은 급하게 준비한다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죠. 운동 시작한지 한 40년 정도 됐어요. 늘 그 시간 동안 큰 변화 없이 몸을 유지해 왔어요. 그래서 이번 <사냥> 촬영하면서도 힘들다기보다는 진짜 행복하고 편안하게 달렸어요. 시사회 때 보니 계속 동작이 끊이지 않게 편집을 해서, 실제보다 더 많이 뛴 거 같이 보이는 거도 있어요.
60대 중반이신데 정말 대단하세요. 오히려 후배들이 못 쫓아온 거 아니에요?
그렇진 않고(웃음). 영화만을 위해서 단기간에 준비했으면 쉬운 일이 아닌데 원래 관리를 해와서 가능했죠.
꾸준히 활동을 해오셨지만 겹치기 출연은 없었던 거 같아요.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은 뭘까요?
대부분의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거의가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결정이 나요. 자신이 그 인물이 되어 상상력이 생기고 마음이 움직이면 일단 그 작품을 하기로 하죠.
<사냥>에 출연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작년에 김한민 감독이 ‘선배님, 시나리오 하나 드리겠습니다’ 했어요. 그러면서 기대해 달라고. 그런데 막상 받고 보니 ‘아, 이런 역이 나한테 오다니, 나한테 새로운 도전이겠구나’ 했죠.
일단은 지금까지 해온 역할 중 가장 액션이 많은 역이라서, 지금 와서 이런 많은 액션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내가 지금까지 체력적으로 많이?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해온 결실인가(웃음)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앞으로 좀 더 다양한 역할 제의가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기도 해요(웃음).
피부는 많이 안 상하셨어요? 영화에서는 주름이 아주 선명한데 실제로 뵈니 그렇지 않아요.
사실 이번에는 그렇게 피부가 상했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예전 <무사> 촬영 시 워낙 햇빛에 많이 노출돼서 그때는 많이 상했거든요. 실제로 보면 그렇게 주름이 깊지 않죠? 그런데 이상하게 카메라로 촬영해 놓으면, 분장해서 그런지, 아주 처절하게 보이는 거 같아요(웃음). 사실 촬영하면서는 피부가 상하고 이런 것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요.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게 좋으니까요. 그 인물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니까.
기성은 극 중에서 아주 생명력이 강한 인물이에요. 죽을 위기에서도 몇 번이나 다시 일어나는. 외형적으로는 백발의 긴 머리로 거친 생명력을 표현했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기성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요?
기성은 비극적 인물이죠. 내면에 아픔이 많아요. 어두운 탄광에서 후배의 살을 먹고, 그 후배의 딸이 사실은 자신의 손녀이기도 하고요. 세상에 대해 스스로 마음도 몸도 가둬놓고 사는 사람이에요. 굉장히 어두운 그림자를 가졌고 내면이 아주 허허롭죠. 액션을 하거나 달리는 등 활동적인 모습 속에서도 그 사람의 어두운 내면이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생각 없이 마냥 달리고 멋있게 싸우는 게 아니고. 만약 그렇다면 그건 진짜 람보죠, 굳이 표현하자면 기성은 고뇌하는 람보라고 할까(웃음).
극 중 람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즉흥적인 그러니까 촬영 중 애드립인 건가요? 아니면 대본상 있던 건가요?
그렇잖아도 관객들이 그 부분에서 웃더군요. 시나리오상 지문에 나와있어요. 마치 람보같이…이렇게요. 즉흥적인 애드립은 아닌 거죠.
연기 호흡은 너무 좋았어요. 한예리가 양순역에 너무 집중했기에 흐트러진 모습이 전혀 없었어요. 사실 양순이가 연기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예요. 약간 모자라지만 아주 순수한, 거기다 하기 어려운 강원도 사투리도 했고요.
무엇보다 가벼워서 고마웠다고 하셨어요(웃음).
빈말이 아니라 그건 정말 중요해요(웃음). 기성이 양순을 엎고, 메고 뛰는 장면이 많다 보니 몇 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역할을 하셨는데 선생님의 악역은 딱히 떠오르지 않아요.
악역은 이상하게 나한테 섭외가 안 들어오는 편이에요. 또, 들어온다 해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어요. ‘이 역할이 꼭 내가 해야 하는 역인가’ 라는 의문이 드는 역도 많았고. 사실 이전에는 배우의 연기 스펙트럼에 악역도 필요하다,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죠. 그런데 지금은 굳이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 악역을 하는 거보다는, 얼마나 그 인물이 나를 설득시키느냐 그게 중요해요. 악역이고 선역이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역할이 나를 얼마나 감동시켰느냐가 기준인데 지금까지 들어온 악역들이 나를 그다지 설득시키지 못 한 거죠.
전적으로 동감해요. 한국영화의 힘이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조연배우들의 연기력이 가장 큰 몫을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들의 연기가 영화에 힘을 부여하고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니까요. CG나 촬영 기법 등 영화의 기술적인 면이 많이 진보했지만 그보다 더 연기자들의 연기력이 많이 향상됐다고 봐요. 요즘엔 정말 처음 보는 후밴데도 ‘뭐 저렇게 연기를 잘하냐’ 이런 후배들 참 많아요. 우리 영화에서도 엽사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몰라. 사실 예전에는 그냥 주연배우들, 몇 명이 잘하면 그걸로 족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보조출연자들도 누가 따로 시키지 않아도 상황을 설명하면 그 상황에 따라 각자 연기를 너무나 잘하세요.
영화와는 별개의 질문인데요. 요즘 이순재 선생님이나 신구 선생님 등 대 선배님들께서도 시트콤이나 예능을 많이 하세요. 선생님은 영화 외에 다른 분야를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영화 외에? 그런 생각은 없어요. 이번 ‘런닝맨’ 출연은 추격전 컨셉이 우리 영화와 맞아서 한 거고.
출연 안 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런닝맨’은 앉아서 얘기하는 거 보다는 계속해서 움직이니까 좀 쉽지 않을까 해서 출연한 거예요. 사실 예능은 자신 없어요. 만약 나한테 영화 속에서 예능인을 연기하라면 그건 잘 할거 같아. 근데 내 자신이 진짜 예능에 나가서 직접 하라고 하면 너무 힘들어요. 왜냐면 TV는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끝이에요. 계속 진행되니까 다시 되돌릴 수가 없지. 근데 영화는 NG가 있지 않나(웃음). ‘다시 한 번 합시다’며 고칠 수 있고. 여기에 익숙해 지다 보니 내가 한 템포가 늦어요. TV는 자기 스스로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으로 들어가야 돼요. 근데 나는 그 상황을 직접 만드는 게 좀 힘들어요.
헐리우드식 총격 액션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 <사냥>의 리얼한 총격전이 색달랐습니다. 연습 많이 하셨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엽총 소리가 굉장히 커요. 소리가 크다 보니까 총을 쏘면서 스스로가 실감이 나요. 진짜로 쏘는 거 같은 현장감도 상당하고, 그래서 촬영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어요.
거기다 난 8연발 엽총을 쏘았기 때문에 통쾌한 기분이 들었죠. 아주 시원시원하게 사격 했어요.
한데 속도감 넘치는 추격전에 비해 심리묘사나 사건의 개연성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맞아요. 심리적 묘사냐, 추격전의 속도감이냐 에서 하나에 좀 더 치중하고자 했는데, 결국 숨막히는 추격전에 초점을 맞춘 거죠. 그러다 보니 치밀함이 떨어진 면이 없지 않아요. 결론은 추격의 호흡을 한 호흡으로 가려다 보니 중간 중간 감정이 모자라는 부분이 생긴거죠.
리암 니슨 얘기도 나와요(웃음). 외국의 경우 연령대 있는 배우들이 활발한 액션을 보여주니까요. 우리도 없진 않지만 드문 편이죠. 따져보면 이번 기성 역할이 내가 가장 액션을 많이 한 역이기도 하니까요. 이번을 계기로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사냥>에서는 배우만큼 중요한 역할이 산이라는 공간인데요. 우리 산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요?
수묵화에서 느껴지듯 우리 산은 굽이굽이 아주 아름답죠. 그 속에 어떤 처절한 사연이 있을 거 같아요. 거대한 서양의 산에 비하면 좀 더 아기자기하면서 친근하기도 하고요.
평소 등산은 즐겨 하시나요?
그렇진 않아요.
극중처럼 선생님이 만약 현실에서 금맥을 발견하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실까요?(웃음)
난, 얼른 신고합니다. 그래서 주인한테 돌려주죠. 근데 ‘좀 생각해 주십쇼(웃음)’ 이러겠지.
촬영장 분위기는 어떠셨나요?
촬영할 때 난 사실 엽사팀과 반대 방향에 있었어요. 근데 멀리서 봐도 그들이 너무 즐겁고 재밌게 연기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촬영장에서 오징어 참 많이 먹었어요. 요즘에는 예전만큼 오징어를 많이 먹진 않지만 이번에도 한 세 번 정도 구리 농수산 시장 가서 직접 사와서 밤 촬영하면서 함께 구워먹었어요.
아역부터 시작해서 평생 연기를 하셨는데 혹시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으세요?
난 하고 싶어요. 단, 지금 나 같은 환경의 배우. 그러니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서 하고 싶은 역을 할 수 있는 배우요. 배운데 빛을 못 본 배우는 솔직히 힘들어요.
배우의 어떤 면이 가장 매력적이세요?
매번 새로운 거요. 작품 속에서 새로운 인물이 되어 새로운 장소로 여행을 떠나는 거죠.
<사냥>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요?
늘 선택의 기로에서 아쉬움이 남아요.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랬으면 좋았을 걸’ 하죠. 그런 마음이 없을 순 없어요. ‘아, 이 장면은 감정이 너무 과했나, 너무 부족했나’ 그런데 작품 전체가 그렇게 느껴지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후회가 남아요. 다행히 이번 <사냥>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부분 부분 작은 아쉬움이 있는 정도죠.
<사냥>의 매력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긴박감과 속도감을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 그건 외적인 부분이고 오히려 관객들이 봐줬으면 하는 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 변해가는 과정이에요. 영화에서 보면 비리 경찰, 속물 공무원, 사채업자, 때 묻은 세무서 과장 등 아주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등장해요. 이런 사람들이 욕심이 생겼을 때 너무 쉽게 타인의 목숨을 뺏을 정도로 광기로 치닫는 모습, 그 속에서 인간의 잔인함을 봐 줬으면 해요. 또 하난 기성이 양순을 끝까지 챙기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고통을 하나씩 해소해 나가는 과정요.
다 좋은데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싫어요. 집에서 TV 채널 돌리다가도 무서운 장면 나오면 막 빨리 돌려버려요(웃음).
선생님의 연기 원동력이 궁금해요.
스스로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감성, 또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물을 접하고 싶은 욕구 그리고 나 나름대로 그 인물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창작열. 이 세 가진데 한마디로 새로움에 대한 추구죠.
젊은 연기자들한테 조언한다면요?
촬영하는 그 순간에 집중하라는 거요. 그 외의 것에 신경을 쓴다면 중요한 핵심을 놓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연기에서 인정을 못 받을 수 있게 되죠. 제일 중요한 게 한결같음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초심으로 돌아가서 연기에 집중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최근에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일이 있다면요?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내 성격이 모든 게 그러려니 하는 편이에요. 어떻게 보면 너무 나태하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모든 걸 받아들인다고 할까. 반응의 속도가 좀 느려요. 지금 딱히 생각나는 게 없네요.
2016년 7월 4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young@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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