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지혜 기자]
박석영 감독은 울음기 밴 얼굴로 인터뷰를 했다. 이 사람들은 왜 겉돌지, 세상에 뿌리 내리지 못하지, 하는 안타까움이 말 마디 마다 묻어났다. <스틸 플라워>는 그가 분노와 슬픔으로 만든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 <들꽃>에서는 가출한 청소년들의 드라마를 다뤘다면 <스틸 플라워>에서는 ‘하담’의 현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거리를 떠돌면서도 원칙을 지키는, 서툴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하담’의 강인함이 강철꽃 같았다는 박석영 감독. 그는 그런 ‘하담’을 찍는 과정에서 본인의 뿌리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인터뷰 사진을 찍어 보니 어떤가?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 촬영 당하는 입장이 됐는데(웃음).
내가 저렇게 생긴 덩어리구나, 싶다(웃음).
<들꽃>도, <스틸 플라워>도 뿌리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왜 이들에 관심 갖게 됐나?
내가 그렇다. 내가 뿌리 없는 사람이다. 영화는 시대의 공기와 함께 숨 쉴 수밖에 없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화가든 시인이든 시대정신이 스며있는 창작물을 만들기 마련이다. 때문에 나 역시 2016년의 대한민국이 반영된 영화를 만들게 된 거다. 내겐 세월호 사건이 내 노마드 상태, 다시 말해 뿌리 없는 상태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다. 세월호 사건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구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꿈에 관심이 없다는 것까지도 폭로했다. 문제는 이게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생존을 위협하다니?
꿈을 꾸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은 우리에게 그들이 바라는 아름다움, 그들이 바라는 꿈만을 갖길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그들이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 결국 우리는 이 땅에 터를 잡고 뿌리 내리기가 힘들어진다.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거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이 땅은 매우 척박하다. 힘 있는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풀만을 키우려 한다. 나머지 들꽃에는 제초제를 뿌린다. 그러나 우리는 애석하게도 들꽃 같은 존재다. 시대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빨리 증명하라고 강요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마치 유목민처럼 부유하게 된다. 자기가 뿌리 내릴 곳을 찾아 헤매는 거다. 이처럼 내가 말하는 ‘우리’란 힘없는 사람들,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사람들, 뿌리 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생존과 꿈, 뿌리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것 같다.
기자간담회 때 질문 받은 이후로 계속 고민했다. 이 질문에 답할 순간을 기다렸다(웃음).
그랬나(웃음).
사실 난 뿌리에 대한 질문이 ‘자유’와도 연관된다고 본다. 내가 홍대에서 상영회를 할 때였다. 방송국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지금 세대에게 자유란 뭔가”하고 묻더라. 그런데 진정한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우리는 자유가 어떤 건지 말만 할 뿐, 자유를 겪어본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체험해보지 못한 게 우리의 소중한 것이 된 셈이다. 표현의 자유, 자유의 쟁취를 말하지만 아직도 우린 검열 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잖나. 부산국제영화제가 대표적이다.
원래는 꽃으로 3부작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출 청소년이 눈에 밟혀서 <들꽃>을 찍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도의적인 죄책감이 들었고, 이 죄책감이 작품을 만들도록 이끌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내가 내 명성을 위해 상처받는 아이들을 팔고 있는 것 같더라.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스틸 플라워>는 내가 <들꽃>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치유해줄 것 같았다. 실제로 영화에 대한 사랑, 자존감, 같이 작업했던 사람들과의 파트너십 등이 회복되기도 했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찍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퓨어 시네마 정신도 깨달았다. ‘하담’이가 그저 탭댄스를 추듯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작업했다. <스틸 플라워>를 다 찍고 나니 인간을 카메라에 담는 일을 계속해도 되겠구나 싶더라(웃음).
제목을 꽃으로 지은 이유는?
좀 우스운 이유다(웃음). 처음에 내가 가출 청소년을 취재하러 갔던 곳이 들꽃 문화재단이다. 그래서 정식 영화제목이라기 보단 가제같은 느낌으로 <들꽃>이라 이름 지었다. 사실 ‘들꽃’이라 하면 어쩐지 촌스럽고 80년대 느낌도 나지 않나. 어떤 어르신들은 다큐멘터리냐고 묻기도 하시더라. 물론 지금은 들꽃이란 이름도, 꽃이라는 제목 자체도 좋아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런가(웃음). 그래서 이번엔 영어로 제목을 지은 건가.
원래는 ‘강철꽃’이나 ‘철꽃’으로 제목을 정하려 했다(웃음).
<스틸 플라워>의 의미는?
꿈을 위해 강인해지는 사람, 무언가를 사랑해서 튼튼해지는 사람을 생각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중에 남자주인공이 악당을 찾아가서는 “나는 무적이야, 왜냐하면 난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이지”라고 대사를 치는 장면이 있다. 말하자면 이런 느낌인 거지(웃음). 그 영화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해서 강인해지지만 내 영화에서는 자기 안의 강함을 발견한다는 게 차이점이고. 강인해진다는 건 딱딱해진다는 것과는 다르다. 인생의 가치를 떠올리면서 자기 자신만의 심지를 지닌 채 제자리에 서는 걸 뜻한다. 설사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말이다. ‘하담’도 그런 소녀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혼자서 춤추잖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극복해내는 ‘하담’의 강인함을 철에 빗대고 싶었다. 이뿐만 아니라 탭댄스에서 소리를 내는 것도 탭슈즈 바닥의 철이잖나. 탭슈즈의 강철이 공간과 부딪쳐서 내는 소리는 매우 정직한 것이다. 심장박동이나 생명의 리듬과도 닮아 있다. <스틸 플라워>는 그런 중의적인 제목이다.
‘하담’이 곧 스틸플라워, 강철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하담’은 자신의 원칙을 굽히지 않는 인물이다. 그 원칙은 거짓말 하지 말라, 몸을 팔지 말라, 일한 만큼 받자, 라는 아주 상식적인 것들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 상식을 이런 저런 식으로 비틀어 비극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런 세상에서도 원칙을 지켜나가는 인간을 그리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긍지가 아니겠나. 비록 사회적인 적응력이나 유연함은 부족해도 원칙과 강인함을 지켜나가는 인생이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비로소 큰 인간인 거고.
배우 정하담은 여려 보이지만 자기 의사표현이 분명하다. 또한 자기가 맡은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든 정확하게 표현해낸다. 특히 ‘하담’ 역을 연기할 때는 자기 혼자서 캐릭터를 위해 꿋꿋하게 싸워나가는 전사 같았다. 촬영하면서 정하담과 많이 부딪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전사와는 맞서 싸워줘야 하지 않나. ‘하담’ 자체가 전사같은 캐릭터이기도 했고, 맞서 싸우며 촬영해야만 우리가 딴 데 정신을 팔지 않고 영화에 몰입할 거라 생각했다.
정하담에 대한 굳은 믿음이 느껴진다.
난 배우를 나와 동등한 위치의, 다른 역할을 맡은 예술가로서 존중한다. 호흡이 잘 맞다, 안 맞다를 따지기 보단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예컨대 배우가 이 장면이 뭔가 이상하다거나 잘못됐다고 지적하면 난 다시 고민한다. 연기나 각본 뿐만 아니라 편집에 대한 부분까지도 배우의 비판을 수용한다. <스틸 플라워>는 함께 만들어가며 피드백을 주고받는 여정이었다.
그렇다면 정하담이 <스틸 플라워>의 주인공인 이유는?
처음에 <들꽃>을 촬영할 때였다. 오랫동안 거리를 떠돌아다닌 듯한 현실감을 지닌 인물이 필요했다. 특히 ‘하담’은 가장 오랜 시간 거리를 떠돌던 소녀다. 일반적인 배우에게 그 역할을 맡길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배우가 제일 연기하기 어려운 게 피로감인 것 같다. 하루종일 헤매다 앉아 있는 것과 1년 동안 헤매다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피로감의 농도부터 다르다. ‘하담’은 그 피로감의 정점을 찍은 인물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11년 동안 떠돌아다니다, 이제 들꽃의 맨 앞에 선 소녀잖나. 말이 아닌 눈빛이나 행동으로 이 친구가 고아다, 버려졌다, 세상에 얻어맞고 끌려 다니는 소녀라는 걸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더라. 이런 건 일반 배우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한국배우들의 경우에는 영화를 준비하는 기간이 상당히 짧다. 해외 배우들이야 6개월이나 1년씩 한 영화를 준비하면서 극중 캐릭터가 지닌 세월의 근사치를 찾아나갈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 배우 정하담은 이 어려운 것을 감당해낼 수 있는 배우다. 자칫 멜로드라마처럼 보일 수 있는 극을 마치 흙처럼 떠받치며 현실감을 부여해줬다.
정하담이 <스틸 플라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현실감을 부여하던가?
정하담은 실제로 한 달 동안 거지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하담’이 어떤 순간에 어떤 감정을 겪는지 알아내려 했던 거다. 그런데 거지옷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참 가혹해지더라. 정하담에게는 전단지를 건네지도 않았고 편의점에서는 잔돈을 던지면서 줬다. 토하고 있는 여자에게 휴지를 건네니까 그 여자가 기겁을 하며 거절했고. 정하담은 이런 방식을 통해 ‘하담’을 구축해갔다. 매우 영민하고 직관적이면서 지적인 배우라 생각한다.
그렇겠지(웃음). 정하담이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이렇게까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디렉션도 주지 않은 채로 캐리어를 끌라 하고, 원칙을 지키라 하며, 직장을 찾고, 탭댄스를 추라고 하면 무척 힘들어 할 거다. 그런데 정하담은 매우 지적인 방식으로 ‘하담’을 구축해갔다. ‘하담’이 걷는 것, 그녀의 뒷모습, 캐리어를 끌고 가는 태도, 속도 등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실험하며 연습했다. 배우로서 ‘하담’이란 인간을 정확히 표현해내려 한 거다.
그렇게 고생할 것을 알면서도 왜 ‘하담’을 침묵하는, 설명하지 않는 캐릭터로 만들었나?
‘하담’에 대해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하담’에 대해 설명을 하면 할수록 캐릭터가 얄팍해지고 설정을 채워 넣을 수록 이 아이가 우리의 공감대에서 멀어졌다. 사연을 들으면 그 사람을 사연에 비추어 설명하게 되잖나. 나는 ‘하담’이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됐으므로 동정 받아야 한다는 식의 프레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정하담이 ‘하담’에 100% 몰입하기도 바라지 않았다. 배우가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해서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만 구축한다면, 내가 ‘하담’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수 없이 많은 정체성이 사라질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정하담에게 ‘하담’의 그림자만 보여주고서는 그 그림자를 넘어가지도 마라, 꽉 채우지도 마라, 했던 거다. 그래서 <들꽃>과 달리 <스틸 플라워>에서는 싸우다시피, 수차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필요했다.
당신에게 있어서 ‘하담’은 어떤 인물인가?
글쎄. 나조차도 ‘하담’을 모르겠다. 심지어 그녀가 인간인지, 혼령인지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한때는 ‘하담’이 죽은 아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하담’이 세월호에 수몰돼 죽은 아이들의 혼령 같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왠지 뭍으로 올라와 우리를 조우하고 있는 것 같더라. 어쩌면 거부당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담’으로써 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고. 나도 왜 ‘하담’을 딱 떨어지는 캐릭터로 구축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영화를 찍는 과정이 ‘하담’에 대한 그림 맞추기, 모자이크를 하는 여정 같더라.
처음부터 ‘하담’이 사는 곳을 쓰레기 집으로 설정한 건 아니다. 가장 먼저 생각한 곳은 노래방 아래층의 보일러실이었다. 따뜻해서 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위에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데다 위험한 사람이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더라. 진짜 ‘하담’이라면 피할 것 같았다. 그래서 번잡스러운 곳을 떠나서 ‘하담’이 자신의 주거 공간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그런 곳을 찾기 위해 부산의 철거촌을 방문했다. 금방 이사 간 듯 말짱해 보이는 집도 있었지만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찬 곳도 있었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빈 집에 쌓아 둔 거다. 영화 속 그 집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창문 틈의 돌 세 개 때문이다. ‘하담’이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열어보지 못하게 막고, 이 집을 누가 들여다 봤는지 알 수 있게 놓아 둔 돌들이다. 비록 허술하고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난 그게 좋았다.
돌에 특별한 상징성을 담고자 한 건가?
그런 건 아니다. “오브젝트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발견된 것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파운드 오브젝트의 개념처럼 현장에서 발견된 것을 사용했을 뿐이다. 내 머릿속엔 집에 대한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처음에 내가 생각한 건 집도 아니고 창고였으니까. 난 미리 상징적인 의미를 깔아 놓고 로케이션을 하며 특정 대상을 찾아내진 않는 편이다.
쓰레기 집에서의 촬영은 어떻게 이뤄졌나?
시나리오에는 하담이 집에 들어가서 ‘이것 저것 청소해 보려고 노력한다’ 라는 정도로만 쓰여 있었다. 정하담에게도 “들어가서 뭐든지 해 봐라” 고 디렉션을 줬을 뿐이다. 쓰레기 집에서 삶을 위한 최소한의 가사 노동을 해 보라는 거였다. ‘하담’은 쓰레기집에서 피곤한 모습으로 얼굴을 닦고 이불을 대충 덮은 채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불을 하나 켜 놓고 그 날 하루 일을 회상한다. 이 과정에 하루의 피곤함이 묻어나길 바랐다. 또한 ‘하담’이 “후~” 하고 입김으로 불을 끌 때 마치 그 날의 생기가 모두 꺼지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길 바랐다. 그러다 보니 어떤 연기를 봐도 맞다는 느낌이 들지 않더라. 덕분에 정말 힘들게 찍었다.
그러나 정말 잘 표현된 것 같다.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으니까. 그러면 ‘하담’은 그 불빛 하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로 그 상상이 차기작 <재꽃>의 내용이다. 아마 ‘하담’은 그 불빛을 바라보며 자신이 버려졌을 때의 느낌들과 영상들, 기억들을 떠올릴 거다. 그러나 너무 많이 떠올리고 생각한 나머지 그 기억을 특별한 감정으로 떠올리진 않을 듯하다. 그저 ‘수고했어, 오늘도’,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내가 그 순간을 바라보며 차기작을 준비하듯 관객 역시 그 순간을 본인들의 상상으로 채울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이 장면에, 그리고 ‘하담’에 부연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이유다. 채울수록 뻑뻑해지고, 담을수록 손을 다치는 느낌이랄까.
‘하담’이 어떻게 투쟁하며 긍지를 가지는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자신을 세상에 외치는 거다. 이 장면은 전적으로 배우들을 신뢰한 채 촬영했다. 횟집 여자로 분한 배우도 경험이 많으신 분이다. 그래서 난 이들이 연기하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아예 밖에 나가 소리만 듣고 있었다. 이 장면을 한 번만 찍되 이게 잘못된다면 영화가 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밖의 카메라 한 대, 안 쪽 카메라 한 대, 이렇게 총 두 대를 놓고 동시에 촬영했다. 시점이나 연기 포인트, 촬영 포인트 같은 것도 지정해주지 않았다. 당시 대사들도 배우들의 애드립이다.
왜 그렇게 했나?
난 될 영화는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거다. 안 될 영화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망한다. 이 장면도 그런 마음으로, 마치 베팅하듯 촬영했다. 그리고 나서는 풋티지 영상도 확인하지 않았다. 부산 편집실에서 한 번 보고 그대로 서울에 보냈다. 편집 상 끊어내야 할 부분도 있었지만 배우들의 헌신과 열정적인 공기를 그대로 담고 싶더라. 다시 찍으라고 해도 못 찍는다. 오직 그 장소, 그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하담’이 횟집 여자와 싸우고 나서 바닷가에서 탭댄스를 추잖나. 이 장면으로 영화를 끝낸 이유는?
미리 결말을 생각해 두고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새벽 바다에 몇 번 다녀오면서 떠올린 장면이다. 아마도 ‘하담’은 그 순간에 이젠 그만하고 싶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거다. 매일 같이 새벽바다를 오가며 여러 가지 상태의 바다에서 이 장면을 촬영해 봤다. 춤을 추다 훅 뛰어들 수 있는 잔잔한 바다면 어떨까, 조금 풍랑이 있으면 어떨까, 하면서. 그렇게 그 장면을 6번쯤 찍을 때였나, 갑자기 높은 파도가 몰아치더라. 이전까지는 파도가 밑에서 들이치며 포말이 올라오는 정도였다. 만일 이렇게 높은 풍랑이 몰아칠 줄 알았다면 누가 그 바다에서 그렇게 촬영을 하겠나. 이 장면은 결코 의도해서 촬영한 게 아니다. 결국 정하담이 넘어졌다. 그런데 그녀가 일어서서 다시 연기를 했다. 그 순간 정말 ‘하담’의 춤이 완성됐다. 무척 지쳤음에도 다시 일어나 춤추는 장면이 된 것이다. 엄숙한 순간이었다.
목숨을 건 촬영이라는 건가.
그런 셈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떨어질 뻔 했다. 부산영화제에서 후반작업을 지원해 주는 사람이 말해줬다. 훌륭한 장면이긴 하지만 이 장면이 너무 위험하게 촬영됐기에 나의 감독으로서의 도덕성, 자질을 의심받았다 하더라. 하지만 우리가 의도한 게 정말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위험이었다. 사실 나도 이것이 논란이 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뺄까도 고민했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장면은 완성 됐잖나. 또한 이 장면은 배우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거다. 배우 정하담이 ‘하담’으로서 남긴 마지막 발자국을 담고 싶었다.
예전에 학교에서 공부할 때 <사랑은 비를 타고>의 감독이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일흔 살이 넘은 노인임에도 강연 중에 무대 위에서 탭댄스를 추더라.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이후로 탭댄스가 내 뇌리에 박혀 있었나보다. 영화적인 논리로 생각해 봤을 때도, 탭댄스가 ‘하담’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이자 춤이라 생각한다. 탭댄스는 음악이라기 보단 춤이고 멜로디라기 보단 리듬이다. 이 리듬은 맥박소리와도 닮아 있어 심장을 연상시킨다. 또한 ‘하담’이 세상과 맞부딪치며 살아가듯, 탭댄스도 맨몸으로 바닥에 부딪쳐 소리를 낸다. 이 모습은 우아하지 않다. 춤사위의 목적 자체가 우아함이 아니라 악기로서의 연주에 있는 거니까. <스틸 플라워>를 위해 정하담이 약 반 년 동안 탭댄스를 연습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자유롭게 춤을 춰 보라는 식으로 탭댄스를 훈련했다. ‘하담’의 탭댄스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이자 자유에 대한 외침으로 들리길 바랐다.
차기작 <재꽃>에서도 정하담과 함께 할 건가?
모르겠다. 이젠 정하담에게도 소속사가 있지 않나(웃음). 나와 정식 계약을 맺은 상태는 아니다. 혹자는 마치 내가 정하담을 키우거나 만들어낸 것인 양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페르소나라고도 부른다. 나는 정하담을 이렇게 부르는 게 부담스럽다. 정하담은 본인이 본인의 연기를 한 배우일 뿐이다. 난 정하담이 자신의 꿈을 펼쳤으면 좋겠다. 만일 <재꽃> 촬영 시기에 정하담에게 좋은 작품의 제의가 들어온다면 같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재꽃> 시나리오에는 정하담을 위한 배역이 있다.
차기작 <재꽃>은 어떤 내용인가?
6명의 주연 캐릭터가 나온다. 지금은 아역 캐스팅에 대해 논의 중이다. 앞서 말했듯 ‘하담’이 불빛을 바라보며 회상하는 과거를 그린다.
최근에 가장 행복했던 일은?
밤에 대본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광국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본인 시간이 비었다며 놀러오겠다는 거다(웃음). 이광국 감독은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에는 마냥 어색해서 앞으로도 계속 어색한 관계로 지낼 줄 알았다. 그런데 인연이 닿더라. 결국 한밤중에 만나서는 커피를 마시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은 이런 게 행복하다. 정말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들과 친해져서 카톡을 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는 게(웃음). 내 마음은 네가 알고, 네 마음은 내가 아는 느낌이랄까(웃음)?
2016년 4월 8일 금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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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