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시나리오가 재밌었고 1930년대라는 시대도 독특했어요. 주란과 연덕 두 소녀의 시련, 그 시련을 헤쳐 가는 과정에서 먹먹함을 많이 느꼈어요. 안쓰럽고 안타까웠는데, 그것들이 잘 표현됐을 때 관객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좋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주란은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들보다 감정적으로 좀 더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고,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았고, 연기해보지 못했던 감정들도 많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연기적으로도 욕심이 났죠.
영화를 본 소감이 궁금하네요.
톤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보다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은 더 드는 것 같아요. 영화를 처음 봐서 전체적인 영화를 받아들이지는 못했어요. 객관적으로 전체적인 걸 보려면 한두 번은 더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란 캐릭터는 새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했다고 했는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떤 부분에 중점을 뒀나요?
전작들에서는 수동적인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는데, 주란은 진취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신체적 변화로 도움을 받긴 하지만 마무리를 짓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감정적인 부분을 어느 시점에서 어느 정도로 얼마큼 표현할 것인지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시대극이고 액션 장면도 있는데, 캐릭터는 어떻게 준비했나요?
1930년대는 평소 관심이 있어서 조금은 알고 있던 시대였어요.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지만 고증이나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해서 서로 이야기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했거든요. 그래서 감독님과 이야기한 건 다른 자료를 더 안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거였어요. 신체적으로는 준비할 것들이 많아서 준비 기간에 바빴어요. 멀리뛰기 하는 자세나 손으로 사람을 들어 올릴 때의 자세 같은 것들이요. 제 딴에는 온 몸에 힘을 주고 있는데 손에 하나도 힘이 안 들어가 보인다고 해서 연구를 많이 해야 했어요. 사람을 던지는 것도 무술팀장님과 함께 다니면서 연습했어요. 무술팀장님과는 인사가 목을 잡는 거였어요(웃음). 너무 신경 써서 노이로제 걸릴 정도였어요. 수중 촬영도 처음이라 연습을 많이 했어요. 물속에 들어가 눈을 떠도 뿌예서 앞이 잘 안 보이거든요. 수중카메라에서 빛이 나요. 카메라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희뿌연 불빛을 찾아서 보는 연습을 했어요. 또 물속에서 산소 호흡기를 떼면 기포가 새서 얼굴에 다 붙어요. 그러면 스탭들이 기포를 하나하나 다 털어줘야 해요. 머리카락도 미역처럼 날리면 와서 만져줘야 하고요. 그러다 숨이 차면 다시 산소 호흡기를 차고 앞선 과정을 반복하는 거죠(웃음).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너무 힘들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렇죠. 그런데 폼이 너무 익숙한 것도 자연스럽진 않지만, 저는 너무 익숙하지 않으니 문제였던 거죠(웃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에 평소 관심이 있었나보네요.
소극적인 캐릭터는 많이 만나볼 수 있어서 적극적인 캐릭터에 갈증이 있었죠. 표현하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피끓는 청춘>의 영숙은 감정을 대놓고 표현하는 캐릭터였는데, 그런 성격도 좋은 것 같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거든요. 저는 속으로 삭히는 편이라서요.
영화 초반, 주란은 가정사나 건강상의 문제로 위축되어있는 표정이나 대사 톤으로 표현됐어요. 그런 것들이 전체적인 주란의 감정 표현에 있어 수위 조절의 일환이었을 텐데, 그 첫 조절을 어떻게 잡으려 했는지 궁금해요.
그 부분이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마냥 위축되기에는 좀 그랬고요. ‘쭈구리’라는 표현을 감독님과 썼는데(웃음), 캐릭터의 상태를 서로 이해하는 기준이 ‘쭈구리’였던 거예요. ‘저 너무 쭈구리 같아요?’ ‘응, 조금.’ 그러면 조금 덜 표현하는 식으로요. 그 단어를 이해하는 정도가 감독님과 딱 맞아서 그 단어를 기준으로 수위 조절을 했어요. 감독님이 ‘오늘 왜 그렇게 쭈구리야?’라고 하면 저는 ‘더 바짝 좋아진 주란으로 해보겠습니다’라고 연기했죠(웃음).
연덕을 만나고 투약을 받으며 주란이 변하는 모습들이 보이잖아요. 어느 시점부터 관객들이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반 친구들이 저에게 다가와 말도 걸고 스스럼없이 지내는 과정들이 있어요. 에구치가 사라진다든지 투약을 받으면서 약간 자신감이 생겼고, 멀리뛰기를 한 번 잘했을 때 나도 잘 할 수 있다, 연덕이와 함께 도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꿈을 품으면서 조금 밝아져요.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요(웃음). 그런 정도의 수준이 좋을 것 같았어요.
새롭게 추가된 건데, 그래도 내면에 그런 모습이 있긴 있었겠죠. 과거사의 아픔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지 못했고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친구였겠죠. 그러다 친구들과 만나면서 나도 이런 마음이 있구나, 나도 이런 식의 밝음을 표현할 수 있구나, 싶었겠죠. 그래서 의도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보다는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밝아진 느낌이 되기를 원했던 거죠.
학교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고 신체 변화를 자각한 후 주란의 감정 표현이 수위조절의 마지막 단계잖아요.
교장 선생님과의 후반부 장면들에서 주란이 한 번 더 각성하려면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이나 계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주란이 감정을 느끼고 각성을 해야 영화를 마무리할 수 있고 이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교장 선생님과의 마지막 장면에 더 주력했어요. 게다가 크랭크업 장면으로 그 신을 촬영해서 더욱 기억에 남아요. 연덕에게 ‘우리 이제 집에 가자’고 하는 대사도요.
수조 속 연덕을 보며 오열하는 신이 주란이 감정을 극적으로 터트리는 장면이었어요.
진짜 힘들었어요(웃음). 교장 선생님과 다투고 밤새 촬영하면서 다들 예민해있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도 제가 감정 신을 촬영한다고 하니 분위기를 잡아주고 집중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감사했어요. 촬영 준비한다고 어수선할 때는 집중이 안 되기도 하는데 조심조심하면서 신경써주셨거든요. 집중해서 연기를 하다보면 가상의 현실로 가다가 조그만 소리 하나에 현실로 탁 돌아오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정말 집중하면 카메라도, 스탭들도 안보이거든요. 지금 이 상황이 진실이고 카메라가 안 보여야하는데, 카메라가 보이고 스탭들이 보이면 내가 지금 집중이 안 되는 구나, 느껴져요. 다들 피곤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카메라가 서서히 안보이게끔 만들어주니 너무 감사했죠.
출연했던 작품들에서 시대별로 다양한 교복을 입어본 것 같아요.
더 입을 교복은 사실 없는 것 같아요(웃음).
심사숙고했어요. 공도 엄청 들이고, 피팅도 오래하고, 디자인도 계속 수정했어요. 감독님이 옷깃이나 리본의 모양, 색상까지 수도 없이 하나하나 수정해보면서 고민했어요. 교복뿐만 아니라 신발, 잠옷도 엄청 신경 썼고요. 전반적으로 미술에 힘을 많이 줬는데 잘 보인 것 같아 다행이에요. 세트장도 너무 예뻐서 새로운 공간이 나올 때마다 다들 사진 찍느라고 바빴어요(웃음). 세트를 부수는 게 너무 아쉽더라고요.
그때 찍었던 사진들은 공개되나요?
사진은 소녀들 휴대폰에 있습니다(웃음).
소녀들과는 사이가 어땠어요?
또래이기는 한데 동생들이 많아서 저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알려줄 수 있는 한에서 기술적인 것들을 좀 알려줬어요. 실시간으로 친구들이 관객처럼 제 연기를 보고 있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담 아닌 부담이 좀 있었죠.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현장이 매끄럽게 돌아가는지 제 역할을 알게 됐어요. 전에는 선배님들이 하라는 거 하고, 제가할 것만 하면 됐는데, 이번에는 신인 친구들이 많아서 감독님이나 연출부가 하나하나 불러서 설명하려면 너무 비효율적이겠더라고요. 제가 그 친구들에게 현장 용어들을 설명해주고 알려주고 했던 거죠. 연기적인 부분이야 감독님이 해주시니까요. 더 어려운 건 엄지원 선배님이 해주시겠지, 하면서요(웃음).
그동안 함께 작업했던 선배들을 보며 어떤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나요?
선배님들이 제게 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후배들에게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너무 좋은 선배님들이셨어요. 감독님에게 추상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거든요. 그럴 때마다 선배님들이 풀어서 이야기해주면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어요. 배웠던 게 그런 것들이라 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데뷔한지 벌써 10년차에요.
쉬는 기간이 많아서 작품을 많이 못한 게 아쉽죠. 이제는 정말 열심히, 열심히 해보려고요. 그래서 이번에 드라마도 출연해보고 좋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고 재밌고 정신도 없어요(웃음).
고민 많이 했죠. 동안, 소녀, 교복에서 탈피하고 싶지 않느냐는 소리를 자꾸 들으니 빨리 벗어나야하나, 생각을 더 하게 되더라고요. 한동안 고민이 많았어요. 교복을 입지 않는 역할을 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작품이 좋은데 그 이유 때문에 포기하는 건 저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겠더라고요. 교복을 입든 안 입든 한 작품이라도 더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영화에서 주란을 연기하며 감정적으로 한계에 부딪혔던 것처럼, 부딪혀봐야 이번에는 내가 이정도 했으니 다음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겠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작품을 해야 하는데 교복에 얽매여 있으니 더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그런 생각을 안 하기로 했어요. 언젠가 제가 교복을 입고 나와도 얼굴에 깊이가 느껴지네, 라는 생각이 든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모습, 교복을 입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가 어색하고 안 어색하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관객들이 배우를 어떻게 봐주느냐가 중요하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변신을 해도 관객들이 안 봐주면 소용이 없더라고요. 이제는 다 내려놓고, 나에게 잘 어울리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변신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벗어나는 것까지 변신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할 수 있는 한에서 좀 더 나아갈 수 있는 그 정도의 변화랄까요. 다른 면을 요만큼 더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 정도 변화는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어요. 같은 교복을 입어도 조금 다른 모습의 얼굴들을 보여줄 수 있는 거잖아요. 나중에 교복을 벗은 다른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으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번에 다행히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에서 사회 초년생 캐릭터를 맡았어요. 너무 감사하게도 기회가 와서 하게 됐는데, 같이 작업하는 분들이 이제는 사회 초년생 같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단계별로 나아가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요.
이번 영화를 보며 그런 고민에 박보영 스스로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거든요.
맞아요. 이제 답을 찾았어요. 주위에서 이야기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는 된 것 같아요. 전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맞는 건가, 빨리 서둘러야하나, 흔들렸는데 지금은 확실히 흔들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맘도 확실히 정했고요.
흔들리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꾸는 꿈은 무엇인가요?
배우로서도 개인적으로도 지금의 삶은 엄청 만족스러워요. 연기를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고, 더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흥행 배우, 스타성 있는 배우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어요. 연기적으로 더 깊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5년 6월 18일 목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