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를 특별히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블록버스터나 코미디보다는 멜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단순히 웃고 재미난 것보다 여운이 남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멜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항상 빼 놓을 수 없는 주제인 것 같아요.
<인간 중독>에 출연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선 시나리오의 김진평이라는 인물과 그 친구의 사랑이 너무 좋았어요. 누군가를 저 정도까지 사랑할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사랑이 좋았어요. 분명 노출이 있고 유부녀를 사랑하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중독>을 안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김대우 감독님에 대한 신뢰도 있었고요. 감독님의 전작들을 봐 왔고, 감독님이 보여주기만을 위한 노출을 하는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또 틀 안에 있는 바르고 순수한 사랑보다는 유부남인 상태에서 유부녀를 사랑하는 틀을 깨는 설정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1~2년 전만 해도 송승헌은 <인간중독>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있어요.
솔직히 30대 초반까지는 연기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마흔이 넘으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건가, 고민도 됐고요. 하지만 최근 2~3년 동안 길을 정하게 된 것 같아요. 이제는 평생 배우로 남고 싶어요. 마흔, 쉰, 환갑이 돼도 그 나이에 맞도록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은 게 목표, 꿈인 것 같아요. 전에는 언제까지 배우를 할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항상 멋지고 좋은 것만 하고 싶었다면, 이제는 이런 저런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내가 평생 갈 길이고, 한 작품이 안됐다고 다른 작품을 안 할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역이든 불륜이든 그 캐릭터를 열심히 하면 대중들이 배우를 인정해주고 박수쳐주지 돌을 던지지는 않잖아요.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커진 것 같아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우연치 않게 카탈로그 모델이 되고 드라마, 시트콤으로 데뷔하면서 정신없이 20대를 보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내가 배우인지 뒤돌아 볼 여유도 없었어요. 시스템에 의해서 그냥 이게 내가 해야 되는 일인가보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배우의 길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어요. 그러다 제대 후 한 해외팬이 보낸 편지에 당신 때문에 감동 받았고, 한국에 대해 알고 싶게 됐고, 한국을 다시 보게 됐고,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 당신도 스스로에게 감사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적혀 있었어요.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당신의 직업이 얼마나 좋으냐면서요. 그때 그 편지가 마음에 와 닿았어요. 내가 하는 일이 누구한테는 아주 큰 웃음과 감동을 줄 수 있구나, 이 직업이 에너지를 가진 굉장한 직업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또 예전부터 막연하게 호텔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었는데 최근에 에너지 낭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도 제대로 못하는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 연기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작품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전에는 이미지를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항상 정의로운 역할,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 그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가을동화’에서 지고지순한 남자 역할을 했고, <숙명> <무적자> ‘에덴의 동쪽’ ‘남자가 사랑할 때’도 밑바닥을 살긴 하지만 결국 바른 남자, 정의로운 남자 역할이었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인간중독>에서 김진평이 천하의 악당이거나 바람둥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관계 설정이 유부녀와 바람이 나는 거니까 저에게는 색다른 시도였어요. 어떤 팬들은 충격이라고 하더라고요. 20대 때 선배들이 배우가 돼야지, 라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때는 그 말을 이해 못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한정된 이미지 안에서만 연기하려고 하면 그만큼 배우로서 폭이 좁아지잖아요. <인간중독>은 기존의 이미지를 좀 내려놓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시작인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이 옳았다는 자신감을 얻은 건 <인간중독> 이후 저한테 안 들어왔을 것 같은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인간중독>으로 송승헌이 다른 시도를 한다는 얘기가 들려서 그런지 비열한 역할이나 악역을 권해주는 분들도 있고요. 그래서 아, 이런 내 마음가짐의 변화로 이렇게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람들이 저의 이런 시도를 조금 알아주는 것 같아서 굉장히 기쁘고 좋더라고요. 이미지를 일부러 망가뜨리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적으로 많은 시도를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요즘은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맡은 캐릭터를 정말 잘 소화해내는 조연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박수를 쳐 주잖아요. 이제는 그런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연기파, 비주얼파 이렇게 나누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비주얼파는 아무래도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선입견도 있고요. 하지만 사실 한국도,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로 비주얼 좋은 배우로 시작해 연기력을 인정받게 된 배우들이 많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송승헌이라는 배우가 항상 반복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너스 점수를 받은 것도 있는 것 같고요. 하지만 그건 제가 더 노력해야 되는 부분이라고 보고, 이렇게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많이 하다 보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제가 더 노력해야겠죠.
주변의 평가에 많이 민감한 편인가요?
전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확신이 없었던 때에는 한 작품 한 작품 그런 평가에 민감했어요. 마음은 항상 좋은 평가를 받고 싶죠. 하지만 이제는 내 길을 정했고 작품 하나의 성공과 실패에 좀 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김진평과 종가흔의 욕망을 다룬 영화를 보면서 송승헌의 욕망은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술자리를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게 뭔지, 돈을 얼마를 벌면 행복한지, 할리우드 스타가 되고, 연기대상을 받고,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야 행복한지, 이야기를 자주 해요. 하지만 주변을 보면, 목표를 갖고 위만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행복을 못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도전하지만 설령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좌절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허무하잖아요. 요즘은 너무 먼 미래의 큰 목표를 좇아 아등바등하면서 사는 것 보다 현재의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고 해요. 아무래도 또래보다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더 챙겨 줄 수 있는 조그만 여유가 있으면 그 사람들을 챙기면서 배우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면서요. 그게 목표인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더 좋은 배우가 되긴 글렀다고 할 수도 있지만(웃음), 배우로서 열심히는 해도 너무 큰 목표를 쫒아가려고 아등바등하지는 않는 거 같아요.
김진평이 너무나 이해돼요(웃음). 전 항상 그랬어요. 첫사랑부터 그랬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첫사랑을 만났는데 정말 번개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이 뭔지 너무나 잘 알아요.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때는 내성적이었고 낯도 많이 가려서 결국 그 친구에게 얘기를 못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는 저보다 더 적극적인 친구를 만나게 됐고요. 결국 1년 반 후에 만나긴 했지만 그때까지 혼자 가슴앓이를 했어요. 이번 작품은 진평과 가흔의 첫사랑을 다루잖아요. 촬영하면서 진평이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진평은 삶의 의욕도 없고 전쟁 트라우마가 있는, 다 시들어가는 꽃이나 나무 같은 인물인데 생명수 같은 종가흔을 만나면서 활력도 생기고 춤도 배우고 적극적으로 변하잖아요. 이제 이 사람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이런걸 보면 정말 진평은 저와 비슷한 것도 같고요. 실제 저도 굉장히 무뚝뚝하고 그러다가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밖에 안 보이고 시야가 좁아지는 게 있거든요.
그러면 극중에서 김진평이 벼락을 맞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새장 장면인거죠. 시나리오에는 사실 ‘김진평,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는 지문이 있어요. 그 장면에서 김진평은 누군가 좋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죠. 김진평이 종가흔을 사랑하는 느낌을 연기할 때, 내가 첫사랑을 만나지 못해 애탔던 그때의 느낌을 가지고 촬영했던 것 같아요.
김진평을 연기하면서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이번 영화에서 가장 큰 숙제는 김진평과 종가흔의 사랑이 불륜이지만 가슴 아프게 보여야 되는 것이었어요. 또 가슴앓이를 하고 애타는 부분도 잘 표현해보고 싶었고요. 베드신이 아무래도 화제가 되고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데, 베드신이 너무 강조되거나 야하게만 보이면 둘의 사랑은 퇴색되고 육체적인 사랑으로 보일까봐 감독님이 찍은 분량이나 신을 많이 덜어냈어요.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요.
의견이 갈리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지금 결말이 더 좋았어요. 감독님도 처음부터 김진평이 종가흔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끝까지 ‘내 사랑’으로 기억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기획하신 거였고요. 그런데 다른 결말을 원하는 분도 있더라고요. 저는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랬으면 좋았을 걸,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낯간지러울 수 있는 대사가 많은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요?
근데 그게 사랑인 것 같아요. 물론 낯간지러운 대사도 있지만 되돌아보면 누군가를 좋아했을 때는 그랬던 것 같아요.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도 있잖아요. 그때는 그게 진심이고요. 그런 것 아닐까요.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만 인정되는 둘만의 언어가 있는 것 같아요. 진평의 말과 행동이 남들이 보면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면 인정되는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인간중독>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요?
배우로서 진짜 홀가분해진 것 같아요. 그동안은 뭔가를 항상 가리거나 꾸미려고 하고 힘을 주고 갔는데, 툭 놓아 버리니까 배우로서 훨씬 더 넓은 세상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인간중독>은 흥행 여부를 떠나서 배우로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드는 의미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내가 갈 길이 배우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멋지고 바른 역할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