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스토리가 좋아야 하고 그 다음이 캐릭터인데, 캐릭터가 먼저 보이는 시나리오가 있어요. 캐릭터에 저를 대입해서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읽게 되는데, 기존 드라마 속 제 이미지와는 다르게 좀 더 즉흥적인 모습들이 있었어요. 그런 캐릭터를 만나기 쉽지 않아서 끌렸어요. 다른 배우들에게는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대중들이 기억하는 한지민의 이미지가 있다 보니 저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 코미디로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소소한 재미도 있지만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음악으로 함께 하나가 되는 이야기가 좋았고, 그 안에서 소정이 가진 트라우마나 정석의 상처가 서로에 의해 치유되는 메시지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정재영 선배님이 출연한다는 이유도 컸어요. 워낙 정석이 중요한 역할이다 보니 어떤 배우가 하느냐가 중요했는데, 정재영 선배님이 한다고 하니 너무 같이 하고 싶었어요.
소정은 인디밴드 보컬 역할이라 노래 연습도 많이 했겠어요.
후두염도 생기고 목소리도 안 나왔어요. 노래하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고 기타 치는 것도 캐릭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라 매력을 느껴서 하게 됐으나, 너무 부담과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잖아요. 배우가 진짜 연주하는지 아닌지, 제대로 연주하는지 틀리는지 다 알잖아요. 그게 스트레스로 다가오더라고요. 한 곡도 아니고 네 곡을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잘 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다보니 수업은 받았는데, 입시생처럼 수업에 임해서 스트레스가 더 쌓이더라고요(웃음). 기타는 악기라서 연습할수록 실력이 늘지만, 노래는 내 몸인데도 생각할 게 많다 보니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말하듯 노래하고 싶지만 한 음절 한 음절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평소 노래를 좋아하고 음치 박치도 아니었지만, 스트레스가 돼서 못하겠더라고요. UV의 뮤지가 그렇게 연습할 필요 없다고, 음악은 필로 해야 하는데 왜 스트레스를 주냐며 부담을 많이 덜어줘서 막상 녹음할 때는 재밌게 했어요. 소정은 가수처럼 노래를 잘하는 캐릭터가 아니었고, UV가 노래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줘서 생각보다는 잘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도 눈에 띄더군요.
고양이 분장도 제 아이디어였는데, 퍼포먼스도 많이 생각해봤어요. 정석이 고양이를 싫어하고, 가사에도 고양이가 나와서 그런 분장을 해본 거죠. 그런 부분들은 많이 아이디어를 내고 같이 만들어 갔어요.
아무래도 인디밴드 보컬이라 그런 자료들을 많이 봤는데, 오히려 안 꾸미고 자연스러운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흔히 인디밴드하면 갖는 이미지를 주고 싶진 않았어요.
그렇게 전형적으로 다뤄지기 쉬운 캐릭터를 다르게 접근한 부분이 좋았거든요.
그런 것들을 추구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정석이 소정을 처음 보고 까무러치게 놀라서 나가야 하는데, 청순한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그 부분을 표현할 수는 없어서 비주얼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소정이 부르는 네 곡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요.
처음에는 ‘삼각 김밥’이 어려웠어요. 가사가 가장 늦게 나왔거든요. 처음 들었을 때 마음에 들었어요. 멜로디가 특색 있는 노래는 아니지만, 가사가 독특해서 귀 기울여 듣게 됐어요. 노래 부를 때의 느낌을 뮤지는 김밥이랑 이야기하듯 하면 좋겠다고 했고, 감독님은 창법에 대한 욕심을 내는 거예요. 담백하게 하는 게 맞는지 과장되게 하는 게 맞는지, 녹음할 때 힘들었어요. ‘플랜맨’은 멜로디도 귀여워서 크게 어렵지 않았고, ‘개나 줘버려’는 특유의 색이 있었고요. ‘유부남’은 소정의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가 담겨있는 노래라 과거사를 이야기하지만 유쾌하게 해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유부남’이 제일 중요했어요. 네 노래가 다 다른 느낌이라서 편집하기 전에는 노래가 너무 많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다 필요한 노래라서 가져간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소정은 굉장히 밝은 캐릭터지만 사랑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 상처가 있는데 이해가 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해가 됐던 게, 저도 사랑하기까지 오래 걸리고 사랑하면 무한 신뢰하는 편이에요. 저도 기본적으로 밝지만, 이별 앞에서는 상대에게 따지지도 묻지도 못하는 성격이었거든요.
소정은 전형성을 거부하는 캐릭터인데 사랑 앞에서는 전형적인 흐름을 보이는 것 같아서 아쉬운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이해가 되냐고 물어보셨던 거예요. 드라마에서 여자 캐릭터들이 초반에는 강단 있지만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지면 울기도 잘 울고 전형적으로 변하잖아요. 남자와 여자는 그런 면에서 다른 것 같아요. 여자는 사랑하면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여자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또 소정이도 정석만큼은 아니지만 꽤 독특한 캐릭터라서 사랑 앞에서도 독특하면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일반적인 느낌은 덜했을 것 같아요. 사랑 앞에서는 오히려 평범해야 공감대는 더 형성될 것 같았어요.
소정과 정석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나요?
그동안 주도하는 인물을 맡아본 적이 없어요. 이번 영화에서는 인물 관계에서 소정이 정석을 이끌잖아요. 그런 작업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저는 좋았어요. 정석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도와주고 제안을 하고 이끌어가는 부분이 저는 새로웠던 것 같아요.
10년이 된 줄 몰랐어요. 느낌이 새로웠던 게, ‘올인’ 때 10년 뒤가 궁금했어요. 혼자 너무 힘들었거든요.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다 보니 준비도 안 됐는데 기회는 주어지고, 잘하고 싶지만 연기는 못하고, 그래서 10년 뒤를 생각했어요. 그때도 연기를 하고 있다면 지금보다 잘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 후로 10년이 지났다고 하니 계속 이 일을 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아역으로 데뷔해서 갑자기 미니시리즈도 하고 너무 큰 그릇이 주어지다보니 다 담아내지 못해서 저 자신에게 좌절하기도 했고, ‘대장금’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조연을 하면서도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이 일을 너무 원하는 분들이 많은데 죄책감도 들었고요. 그럼에도 기회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왜 나는 잘하지 못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도 많이 했고요. <청연>을 통해 연기에 대해 다르게 바라보게 됐어요. 무섭지만 도전해보고 싶다고, 연기를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부활’ 이후 쉼 없이 했어요. 막연히 주어지는 한 작품 한 작품 하면서 연기도 늘겠지 생각하며 달려왔는데, 10년이 된 거예요. 돌이켜보니 연기를 못했던 시절이 있어서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고, 한 작품 한 작품의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결국 내가 연기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고, 아직도 어렵지만 앞으로의 10년 뒤를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다르게 생각하면, 이제 10년 밖에 안 된 거예요.
그죠? 정재영 선배님이 그랬어요. 여배우는 서른을 넘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고요. 지금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전도연, 김혜수를 보면 TV로 시작했지만 네 나이 대에 영화를 많이 했다며, 영화 쪽으로는 잘 걸어가면 좋겠다고요. 마치 처음 출발하는 사람에게 응원해주는 느낌으로 이야기해주신 거죠. 나이가 들고 언제까지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오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편안해졌고, 스무 살 때 시작하는 마음과는 다르겠지만 앞으로의 10년을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면서도 그때의 발전보다는 연륜도 쌓이다 보니 깊이감 있게 발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선배님이 여러 모로 도움을 주셨죠.
활동 기간에 비해 영화 출연은 많지 않은데, 작품 선택에 있어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했어요. 최근 <플랜맨>부터 <역린>까지 영화에 집중하려는 건가요?
말씀드렸지만, 연기를 너무 못해서 열정을 갖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런데 왜 나에게 작품은 주어지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여서 그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청연>을 하면서 영화 작업이 너무 좋았거든요. 감독님이 기다려주고, 이야기도 나눠주고, 욕심을 내주는 것들로 인해 연기를 계속 하고 싶었거든요. 당연히 영화 작업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인연이 된 게 드라마가 많았어요. 딱히 구분 지으면서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게 드라마를 영화보다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드라마만 하다 보니 새로운 캐릭터에 갈증도 생겼어요. 아무래도 한 작품을 하면 그 작품을 보고 비슷한 캐릭터로 제안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비슷한 걸 하다 보면 똑같은 연기,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게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영화에서는 작업을 많이 못하다 보니 조금 더 독특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기회가 안 됐어요.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도 새로운 기회였고, <플랜맨>도 그렇게 하게 됐어요. 영화는 분량이 작더라도 캐릭터가 새로우면 하고 싶은데, <역린>도 그렇게 출연하게 됐어요. 작은 역할이지만 안 중요한 역할은 없잖아요. 새로운 시도를 영화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어요.
계획대로만 안 되는 게 이쪽 일 같아서(웃음). 변화를 시도하려는 마음은 있어요. 넓게 볼 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질문을 많이 받는데, 선배 배우들 작품을 보면 어떤 때는 연기 잘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끔은 작품 자체로 볼 때도 있더라고요. 처음 일을 할 때는 그러지 못했는데, 배우의 연기에 집착하다 어느 시기가 지나니 작품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한지민이 변화를 시도했네, 이런 것보다 작품에 녹아드는 게 가장 어렵지만 관객들에게 가장 좋은 일인 것 같더라고요. 넓게 볼 때는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이라면 배우의 연기도 당연히 부각되는 거죠.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도 배우의 연기가 살리는 영화도 더러 있지만, 그런 작품은 오래 기억에 남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참 어려워요. 드라마는 더 어렵고요. 타이밍도 중요하고요. 대본만 봐서는 요즘은 어떤 걸 대중들이 좋아할지 모르겠어요. 이름 있는 배우가 나와도 안 되는 게 드라마고요. 영화도 3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하는데, 요즘은 더 많은 박자가 맞아야 하는 것 같아요. 또 한 편으로는 작품을 고르면서 심사숙고를 하는데, 한 번 가리다 보면 점점 더 많이 가리게 되더라고요. 배우 인생을 넓게 보면 각자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작품이 있는 건데 너무 가리는 게 과연 좋은 걸까 싶더라고요. 실패도 해보고, 작품이 쌓이는 게 배우에게는 배우는 과정인데 너무 가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지금은 조금 더 많이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2014년 1월 10일 금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