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굉장히 어울리는, 짙은 여운이 남는 영화를 선보이겠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여름에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팥빙수 드셨다면, 가을에는 쓰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땅기는 블랙커피 같은 그 짙은 향, 먹고 나서도 오래 여운이 남는 그런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드라마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제 캐릭터는 두 번째에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 아무생각 없이 봐요. 심지어 제 배역이 뭔지 알려주지 말라고 하고 일단 읽어요. 마음에 들면 무슨 배역을 맡긴 거냐고 물어보죠. 그렇지 않으면 캐릭터만 보게 되잖아요. 시야가 좁아지거든요. 다행히 복인지, 연극할 때 드라마 작품 분석에 대한 시간들로 단련되어있기 때문에 무조건 드라마,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화이>를 선택한 이유는 드라마의 어떤 점 때문이었나요?
일단 장준환 감독의 10년만의 복귀작이잖아요. 개인적으로 팬이었고, 꼭 한 번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시나리오가 고전적인 화두를 담고 있는, 굉장히 클래식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극적이고, 상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면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이야기, 한 세대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세대가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런 것들이 계속된 드라마들의 화두인데, 이 영화는 그 틀을 쥐고 있죠. 그게 매력적이었어요.
그럼에도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거절했다면서요?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는 역할이라서요. 전작들은 말 그대로 이권다툼을 하는 남자들끼리의 싸움이잖아요. 이번 영화는 자기 살을 파는, 자기 핏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만큼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고 아팠어요. 그런데 장준환 감독이 꼭 제가 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아까 말한 그런 매력들 때문에 결국 선택을 하게 됐죠.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예상보다 더욱 힘들었겠죠?
생각보다 더 힘들었죠. 감독님이 더 집요하게 요구했고요. 역시나 굉장히 묵직한 울림을 주는 영화가 나왔어요.
장준환의 집요함과 정성에 대해서는 존경할 정도에요. 정성스럽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하나하나 차근차근 마지막까지 드라마에 한 호흡도 놓치지 않고 본인이 생각했던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란 걸 절실히 느꼈어요. 장준환 감독이 정말 영화를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스타일로 봐서는 빠른 시일 내에 많이 만들 것 같지는 않네요(일동 폭소). 정말 준비를 많이 해요. 원작자가 따로 있는데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개발하는 데만 2년이 걸렸어요. 다른 감독들은 작품 하나를 1년만에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 정도로 하니까 좋은 영화가 나오는 거고, 좋은 영화가 나오는 건 너무 좋은데, 자주 좀 만들었으면 하는 건 바람일 뿐이겠죠. 문소리가 돈 좀 벌어오라고 닦달해야하는데(웃음).
석태라는 캐릭터를 위선과 위악, 두 가지로 세상을 보고 위악을 택한 인물, 화이를 위선에서 끄집어내 위악으로, 위악에 머문 자신을 넘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더욱 처절하게 화이를 단련시킨 인물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어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석태는 보육원 출신이고 따지고 보면 버려진 아이잖아요. 자신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는데 어둠으로 떨어졌고, 다른 사람은 선택하지 않았는데 밝음으로 떨어졌고, 그런데 세상은 밝음이 위에 있고, 모든 걸 가진 자들이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할 수밖에 없는 필요충분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추종하고 따라야하고. 저것은 선이 아니다, 위선이다, 가진 자만의 여유다, 석태는 그 세계를 거부한 거예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버려졌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 어마어마하게 뭉쳐있는 인물일수도 있고요. 그것만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더 들어가 보면 선과 악의 근원적인 물음과 만나죠. 석태라는 인물이 사적으로 돈을 탐하거나 쾌락을 갈구하는 인간은 아니잖아요. 그걸 뛰어넘으면 순수한 악, 절대 악이지만 악의 극점까지 가면 극과 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의미에서 석태를 설명한 거였어요. 화이를 분신처럼 만들고 싶다, 석태와 가장 닮은 인간으로 만들고 싶다, 심지어 석태를 뛰어넘어 더 나은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인거죠.
석태 안에도 어렸을 때 괴물이라는 것이 존재했잖아요. 화이 안에 있는 괴물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하나요?
사실 인간은 누구나 괴물이 있는데, 그건 본인이 알죠. 괴물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언뜻언뜻 괴물이 본인을 지배하거든요. 잘못된 선택을 해요.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괴물이 있는 줄 모르잖아요. 다 까뒤집어보면 안에 분명 괴물이 숨어있죠. 다만 잠재적으로 있을 뿐이죠. 근데 이기심이 발동되는 순간 괴물은 버럭 튀어나와서 모두 해치고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하잖아요. 그것을 석태는 정면으로 만나는 거죠. 화이도 그 괴물을 만나고요. 괴물의 생김새가 같은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석태의 톤은 어떻게 잡았나요?
석태가 추구하는 것이 섣불리 정의할 수 없을 만큼 깊게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석태는 섣불리 흔들리지 않죠. 사람하나 죽는 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인간 본질에 있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 알고 싶은, 그래서 가장 악으로 점철돼 있는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 나머지는 보이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흔들림도 없는 거죠.
맹인을 살려준다든지 하는 행동들로 인해 다소 이질적인 포인트가 생기잖아요.
십자가를 돌려보면 성지라고 쓰여 있잖아요. 성지보육원. 이 사람도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일말의 어떤 동조가 있었던 거죠. 근데 두 번째는 가차 없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이를 죽이는 게 더 악으로 가는 건가, 아니면 화이를 키워서 나와 같은 악으로 만드는 게 더 잔인한 건가, 가치를 판단했겠죠. 따지고 보면 가장 끔찍한, 가장 극악무도한 짓을 한 거잖아요.
본인도 하지 못했던 악의 극으로 화이를 끌고 가는 건가요?
그렇죠.
화이가 다섯 아버지 중 석태만 아버지라고 부르다 후에 아빠라고 부르는 상징도 그 연장선이겠죠.
전화를 끊자마자 화이 앞에 괴물이 있는데 눈으로 이기잖아요. 석태도 화이가 변했다는 느낌을 받고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눈이 흔들려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붙어서 싸우겠다는 의미죠.
화이에게 키워준 아버지와 낳아준 아버지, 누가 진짜 아버지일까요?
그래서 그 해석이 정말로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누가 진짜 아버지인가, 이 영화가 아버지의 이야기인가, 아들의 이야기인가, 이런 것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이야기됐으면 좋겠어요.
여진구는 사위 삼고 싶을 정도라고 좋게 평가했어요(웃음).
건강하고 순수하고 잘 큰 아이에요. 어떤 가식도 없고 정말 괜찮은 친구에요. 연기도 극찬했잖아요. 배우로서의 자질은 정말 대단하다고. 외려 나이든 사람보다 젊은 친구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워요. 이렇게 했을 때 어른들이 잘한다고 하면 자기도 모르게 어떻게 해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지 게임 익히듯이 빨리 익히거든요. 그런 버릇들이 여진구는 하나도 없는 거예요. 백지 같이 작품을 대한다는 건 굉장한 자질이죠. 작은 거인이라고 했는데, 성숙한 거인이 될 때까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 같아요.
<황해>에 비하면 <화이>는 식은 죽 먹기죠(웃음). <화이>는 생 날 것 같은 영화는 아니에요. 날 것 같지만 달콤한 크림소스가 발라져있는 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소스가 뭔가 가미된 것이 이전과 다른 영화인 것 같아요. 장준환 감독의 계산적인 영화 미학이 반드시 거기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카체이싱이나 석회창고 액션도 굉장히 독특하게 자기만의 액션을 창조하잖아요. 드라마랑 연결시켜 액션을 만들어내는, 스타일리시한 자기만의 미학. 그래서 장르적 쾌감도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어떤 액션 연기가 더 잘 맞고 편한가요?
몸이 안 피곤한 액션(웃음). 이 나이에 그만하면 됐잖아요? (웃음)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계속해서 액션 연기를 하잖아요(웃음).
이 정도야 뭐(웃음). 총인데(웃음). 이번에는 감정적으로 힘들었지 액션은 힘들지 않았어요.
동작보다는 기가 강렬한 액션이죠.
그걸로 잘 때우죠(웃음).
어떻게 보면 그것이 더 힘든 액션 연기 아닐까요?
따지고 보면 액션도 연기거든요.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 연기해서 액션에서 그런 느낌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힘든 과정이었는데 촬영 끝나고는 괜찮았나요?
저는 스타일이 힘든 것을 고스란히 그 안에 붓고, 나오면 없어요. 어떤 배우들은, 특히 여자 배우들은 빙의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후유증이 심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그동안 맡은 역할들로 봐서는 가장 후유증이 심할 것 같은데요(웃음). 정신력이 강한건가요?
나태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일동 폭소) 빨리 끝내고 놀자(웃음).
누가 흥행에 이겼다느니, 그것도 따지고 보면 웃긴 말이에요. 배우 하나가 흥행을 시켰나요? 사실 천만배우라는 수식어도 너무 웃겨요. 그리고 ‘설송김’은 김처럼 씹어 삼키고 싶어요. 그 말 지겨워 죽겠어, 정말(웃음). 빨리 뭔가 다른 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기자들이 창의력이 없어서 그래(웃음).
<도둑들> 이후 내년 제작 라인업까지 멀티캐스팅이 대세가 됐어요. 원톱, 투톱영화도 많이 참여했고, 멀티캐스팅 영화도 작업해봤는데 어떤가요?
멀티캐스팅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자연스럽게 나눠먹으니까 출연 분량이 적잖아요. 그래도 개런티는 똑같아요. 그런 이점이 있죠(일동 폭소). 멀티캐스팅 영화는 굉장히 행복하게 작업했어요. 그걸 만들어준 건 감독의 재능이죠. 감독이 배우들을 온전히 적재적소에 제대로 다 활용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안 되면 멀티캐스팅은 지옥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것이 잘 조율되었을 때는 정말로 멀티캐스팅이 재밌어요.
이전에는 블록버스터도 원톱, 투톱 위주로 제작됐다면, 요즘은 한 영화에 주연급 배우들 여럿이 출연하는 멀티캐스팅 기획이 많아졌어요. 물론 배우들 보는 재미도 커지고 다양한 장점이 있겠지만, 우려가 되는 부분도 많아요. 투자 받기 용이하고 장사가 잘된다는 이유만으로 흐름에 편입돼서 기획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요.
가만 놔두세요. 안 되면 또 다 안합니다(웃음). 시류의 흐름인 것 같아요. 성공해서 사람들에게 회자될 수도 있고, 쫄딱 망한 영화도 있을 테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스로가 안하게 돼요. 한때 충무로에서 스릴러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거든요. <추격자>가 터지고 난 후 스릴러가 대세를 이루듯이, 한때 조폭코미디가 대세였듯이 놔두면 알아서 빠지고 새로운 게 들어오고요. 중요한 건 다양성과 질적 향상이겠죠. 일단 올해는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경사난 해잖아요. 다양하고 좋은 영화들이 더 나오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화이>가 올 한해 다양성에 대한 풍성함을 또 보여주는 거고요(웃음).
드라마가 좋은 멜로 장르가 들어온다면 할 의향은 있나요?
마음에 들면 하는 거죠. 이를테면 전신 노출, 이런 건 가족과 상의를 해서(웃음). 멜로도 정말 매력적인 장르죠. 멜로 하라는 얘기가 요즘 왜 이렇게 많죠? 꽃 들고 사진 찍으라고 할 때 미치는 줄 알았는데(웃음). 이걸로 날 보고 뭘 하라는 건지, 사람을 때리라는 건가? (웃음)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정신적인 긴장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풀어지기 시작하면 편한 것만 하려고 하잖아요. 그러지 않고 끝까지 인간의 드라마, 우리가 파보지 않은 곳을 파보는 용기 있는 드라마에 계속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저만이 아니라 동료 배우, 감독, 스탭들 모두가요. 힘이 있을 때까지 가보지 않은 길을 과감하게 헤쳐가볼 수 있는 배우가 됐으면 해요.
2013년 10월 27일 일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