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을 맡다
이 배우, 낯설다. <기담>의 원작자인 박진성 감독의 데뷔작인 <마녀의 관>에서 당당히 주연을 꿰찬 임지영은 “어디서 봤더라?”가 아니라 완전히 처음 보는 배우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지영은 이번이 첫 작품이다. 한국에서 연기를 전공하다가 러시아국립영화학교로 유학을 떠나 7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2008년 2월에 입국해 5월에 박진성 감독을 만나 바로 <마녀의 관>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에 오자마자 작품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주연이라는 점은 또 다른 동기를 부여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대문호 고골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마녀의 관>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러시아에서 대학을 다닐 때 선배들이 연극으로 올리는 것을 본 덕에 감은 잡을 수 있었지만, 표현 방식이 난해하고 대사를 절제하면서 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많은 작품을 한 스태프들 앞에서 이제 첫 작품인 신인이 주연을 한다는 점에서 주눅이 들기도 했어요. 또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아 가면을 쓰는 장면에선 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죠.” <마녀의 관>은 임지영에게 고달픔을 안기기도 했지만, 그동안 자신의 연기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욕심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첫 작품부터 임지영이라는 배우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박진성 감독의 연출 덕분이기도 했다. 특별한 오디션 없이 러시아 학교생활을 찍은 다큐멘터리와 한 번의 미팅만으로 임지영을 주연으로 낙점한 박진성 감독은, 현장에서도 특별한 연기 디렉션을 주지 않았다. 대신 촬영 전에 한 달 동안 수업을 하듯 매일 만나 시나리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현장에서는 리허설도 없었어요. 감독님은 ‘여기서는 적막감을 표현해줘’라고만 주문하셨죠. 연기가 끝난 후에는 모니터도 못 보게 했어요. 심지어 남자 주인공도 크랭크인 며칠 전에 처음 봤어요.” 박진성 감독은 카메라 앞에서 배우가 마음껏 놀도록 했고, 덕분에 임지영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다. 전형성을 탈피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때론 몽환적이고 때로는 친근하게 여러 캐릭터를 소화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왜 이렇게 못 생기게 나왔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저 평범하고 예쁜 캐릭터였다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거다.
연기에 대한 욕심, 영화에 대한 욕심
임지영은 어려서부터 엔터테인먼트 관련 산업에 종사한 아버지 덕에 상대적으로 이 바닥이 익숙했다. 관련된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영화의 매력에도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때 봤던 영화 때문에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 배우는 가만히 있어도 뭔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혼자 연기 연습도 하고 그랬죠.(웃음)” 임지영에게 배우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업이라는 인식보다 인생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잘 아는 부모는 딸을 말렸지만, 이미 그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임지영은 평범한 역할엔 매력을 느끼지 못 한다. 그래서 빤한 멜로 영화의 여주인공보다는 심하게 상처받고 온몸이 부서지는 역할에 더 끌린다. 희로애락을 동시에 담아내는 캐릭터에 욕심을 부린다. “롤모델까진 아니더라도, 윤진서 씨를 좋아해요. 연기도 좋고, 맡는 캐릭터도 매력적이에요.” 그러고 보니 묘한 분위기가 윤진서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평탄한 삶보다는 파란의 삶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를 지녔다. 거칠고 세게 자신을 표현하길 원하는 모습을 보니 TV드라마보다 영화에 더 어울릴 듯도 싶다. 하지만 “신인 배우가 뭘 가리겠어요? TV드라마나 영화나 다 감사드리죠(웃음)”란다. 말은 이렇게 해도 영화에 대한 열정이 더 느껴지는 건 감춰지지 않았다.
어떤 캐릭터도 자신의 색깔로
배우는 관객을 많이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이 봐주지 않는 배우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대중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자신의 색깔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임지영은 스스로 늦은 출발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TV드라마나 영화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캐릭터라면 기회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단순히 다작을 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제대로 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크다. 대중에게 많이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자기의 색깔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이기를 더 바라고 있다.
임지영은 굉장히 낯선 느낌의 배우다. 영화 속의 몽환적인 느낌이 현실로 이어진 것처럼 묘하다. 지금까지 이 땅에 없었던, 다른 차원에서 온 듯한 느낌이다. 신선하다거나 4차원적이라는 흔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 발랄한 여대생이나 그저 예쁘기 만한 20대 캐릭터를 맡아도 자기만의 색깔로 다시 칠할 것만 같다. 자신의 취향이 뚜렷하고 원하는 바가 확실하지만, 의도적으로 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묻어가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도 지녔다. 임지영은 자신의 길을 명확히 알고 있다. 한 번의 주연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탄탄하게 쌓아올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실력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완전히 낯선 매력을 말이다.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