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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토피아를 이루는 보헤미안의 삶! 이.상.은
2008년 9월 1일 월요일 | 민용준 기자 이메일

벌써 데뷔 하신지가,
20년 됐죠.

상당히 오랜 시간이군요.
20년쯤 됐으면 이젠 뭔가 보여줘야 되는데, 그런 게 없어서. (웃음)

그래도 많은 걸 얻고 있다고 믿는 팬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가? 너무 쉽게만 해온 거 같아서. (웃음)

시네마디지털서울 2008 트레일러를 제작했더군요.
사실 짧은 트레일러 하나 만들었을 뿐이라 그냥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웃음) 사실 제 분야도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 영화제의 주제가 아무라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참여하게 됐어요. 말 그대로 제가 그 ‘아무라도’니까. (웃음)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홍대인만큼 홍대를 카메라에 담았더군요.
사실 처음 카메라를 잡아본 게 너무 겁나서 아는 동생들 중 카메라를 만지는 친구에게 레슨을 받아가면서 찍었어요. 그런데 네가 다 찍어보라는 식으로 찍는 건 절대 안 도와주더라고요. 그리고 자기가 뭔데 그런 걸 다 찍냐 그러면서 텃세도 심하고. (웃음) 다 찍은 다음에 저희 아버지께 보여드렸더니 반응이 너무 안 좋아서…… 어젠 블로그에 들어가보니 이건 내가 발로 찍어도 더 잘 찍겠다는 댓글도 달렸고. (웃음)

텃세가 심했나요?
장난이죠, 장난. 그냥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란 식으로. (웃음) 디지털 영화는 누구라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한 미디어라고 하더라고요. 영화제 프로그램을 보니, 음악으로 치면 펑크나 락과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았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CinDi의 그런 면이 좋기도 했고요. 발로 찍어도 이거보단 더 잘 찍을 것 같은 제 트레일러를 보신 많은 분들이 용기를 얻어서 내년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좋지 않겠어요? (웃음)

현대는 개인의 창작을 전시하기 용이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발로 찍었다고 말씀하신 그 트레일러처럼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인터넷을 통해 전시하곤 하니까요. 아무래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용이해진 만큼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도 같이 커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기록광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요? 물론 저는 시대가 어떻게 변해간다는 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변하는 것에 맞춰서 살아가게 되는 것 뿐이고, 그 변화라는 것의 기준 자체도 계속 변하니까요. 음, 변화에 선과 악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일단 변화라는 건 재미있는 거라고 봐요.

작년 10월 즈음에 발표한 13번째 정규앨범 ‘The 3rd place’는 전작들보다 대중적이라 말할 수 있는 앨범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래도 좀 더 편해진 느낌이랄까요.
저는 20대일 때 올림픽을 결코 안 봤어요. 그런데 그게 서른 다섯 정도 넘어가고, 지금 와서 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20대엔 우울한 척하면서 혼자 각 잡고 사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점점 없어진 거 같아요. 좋은 게 좋다고 해야 하나. 머리가 나빠져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웃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변화일지도 모르죠. 억지로 20대 때와 같은 태도로 살 수는 없는 거니까요. 물론 언제나 앨범을 만들 땐 치열하지만 제 내면의 변화가 음악에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어가며 좀 더 성숙해지는 변화가.

성숙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것 같아요. 사실 ‘공무도하가’를 비롯해서 20대 당시 발매했던 앨범들은 내면적 갈망을 거칠게 드러내는 느낌도 있었거든요.
20대는 누구나 그런 것 같은데요. 제가 아까 말했듯이 그 때 저는 올림픽을 싫어했어요. 그런데 제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이제 올림픽을 보고 있잖아요. 20대엔 뭔가 그런 우울한 생각들을 하거나 갈등도 있는 그런 상황을 표현하게 된 거죠. 다만 이제 지금은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바뀐 만큼 그 시선 그대로 솔직하면 되는 거죠. 내 스타일은 이거니까, 라는 것에 맞춰서 제가 억지로 늘 그런 걸 만들어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 변화를 순순히 인정하게 되던가요?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게 너무 좋은 걸요. 그러니까 우울하고 어두운 걸 되게 좋아했었는데 취향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고, 그래서 <쿵푸팬더>도 너무 좋고. (웃음)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바뀌는 거 같아요.

사실 강변가요제 당시 ‘담다디’를 부를 때만 해도 참 발랄했는데요.
그 때는 19살이니까 19살다운 모습이 나온 거겠죠. 그리고 20대에는 20대다운 게 있었던 거 같고. 20대엔 누구든지 고민도 많고, 어둡고 그렇지 않나요. 지금 어른이 돼서 뒤돌아보니 우울증 있었던 사람처럼 보낸 것 같기도 하고, 되게 오만하기도 했던 것 같고. 20대 당시엔 왜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이나 우리가 느끼는 것들을 세상이 받아들여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우울한 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웃음) 물론 지금 제가 20대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결국 전 ‘싱어 송 라이터’로서 제 인생을 노래에 반영했고, 제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스스로 얘기하다 보니까 그런 변화들이 자연스럽게 노래에서 보이게 된 거란 얘기에요. 10대엔 10대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고, 20대엔 20대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고, 그리고 30대에도 30대다운 고민이 있었던 거 같아요.

스스로 뭔가 특별한 변화를 모색한 바는 없나요?
30대가 되면서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일이 완전히 몸에 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에요. 사실 20대일 때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일을 잘 한다던가, 아니면 꼬박꼬박 고정수익이 생긴다던가, 에 대해서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으니까요. 그것과 다른 인생의 테마가 있었는데 30대엔 조금 변했죠. 그래서 일도 많이 했고. 이제 40대가 될텐데 40대가 되면 또 바뀐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누구나 다 바뀌는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게 제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덕분에 ‘삶은 여행’이라는 베를린 여행기도 냈고요.
최근에도 여행기를 하나 쓰고 있어요. 스페인 여행기.

EBS에서 방영된 ‘세계테마여행’과 관련 있는 건가요?
맞아요. 일전에 낸 ‘삶은 여행’이 잘 된 덕분에 하나 더 하게 됐어요.

판매량이 괜찮았나 보죠?
예. 좀 괜찮다고 하더군요. (웃음)

과거 오래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여행을 행군이나 개척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때는 아마 음악을 하면서 여행을 한다고 할까요? 일과 병행한 여행이란 의미가 컸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런 센 단어를 사용했던 거 같고요. 20대 때는 그냥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내 지도를 넓힌다고 생각했었죠. 자신만이 자신의 지도를 만들 수 있잖아요. 내가 가본 데까지가 내 지도겠죠? 세상을 탐험하고 세상에 대해 좀 알고 싶단 생각도 들고 그랬기 때문이겠죠.

사실 치열함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말이죠. 특히 경쟁이라는 단어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요.
저는 치열한 경쟁 싫어해요. 그런 거 정말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올림픽은 재미있어요! (웃음)

사실 올림픽의 슬로건은 경쟁이 아니라 화합이기도 하니까요. 누굴 이기기 위한 경쟁은 본래 의미와 무관하죠.
그렇죠. 그러니까 스포츠도 아닌 예술에 경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우열을 가리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물론 여기서, 강변가요제는 왜 나갔어? 라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지만. (웃음) 그래도 그 땐 19살이었으니까.

수상이란 결과물이 존재하지만 강변가요제 역시 말 그대도 가요제라는 축제의 의미가 먼저일 테니까요.
그렇죠. 그리고 예술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요즘은 상업예술이란 이름으로 단가를 매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음반판매량이나 박스오피스의 순위가 결국 그 작품의 가치로 대변된다고 할까요.
그러니까요. 그건 이제 상품으로서 경쟁 같은 거죠. 저는 그래서 그 세계가 싫어서 어렸을 때 그 세계와의 연관성을 정리정돈 한 거에요. 덕분에 오래 살 거 같아요. (웃음)

13번째 앨범을 발표한 현재의 이상은을 아는 사람도 존재하겠지만 여전히 ‘담다디’라는 과거형으로 이상은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꽤 많을 거에요. 자신을 여전히 ‘담다디’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그에 대한 생각도 바뀌죠. 20대 때의 저는 뭔가 새로운 걸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준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죠.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작가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쟁적인 시스탬에서 벗어난 음악을 하는데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을 해주고 있으니까, 앨범이 한 장이라도 더 나갈 수도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요. 더 긍정적이 된다고 해야 할까? ‘담다디’가 저에게 이득이었을 거라고, 그게 없었다면 지금보다 좀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계속 나이를 먹고 변해가니까, 이 다음에 한 50대쯤 되면 ‘아침마당’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할지도 모르잖아요. (웃음) 그때는 그런 덕을 볼 수 있지 않겠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 나이를 먹으면서 얼마나 생각이 바뀔지 모르는 거니까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고민했던 것들도 답을 알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어른이 돼가면서 이런저런 걸 알아왔지만 아직도 모르는 거죠. 언젠가 제가 60대가 되면 ‘담다디’라는 이름의 밥집을 내서 돈을 벌지도 모를 일이죠. (웃음) 저라고 맨날 이렇게만 사나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쁠 거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진 그게 너무너무 싫었지만 지금은 ‘담다디’란 밥집을 낼까, 이런 생각도 하고. (웃음) 어떤 사물들을 보는 관점도 자연스럽게 바뀌더라고요.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진 건가요?
너그러워진 건가? 일단 20년이나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젠 좀 아득바득하지 말아야 될 거 같은데요.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웃음) 그냥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20년 동안 걸어오면서 해볼 거 다 해봤으니까요. 20대답게 치열하게 고민했고, 30대답게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말하시니까 20년이 간단히 들리지만 그 20년은 실제론 상당한 여정이었을 텐데요.
뭐 그리 상당했겠어요. (웃음) 물론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그런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 음악을 한다는 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우리나라가 시장이 작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요. 사실 일본에서는 경쟁이 필요 없는 예술도 많이 발달한 덕분에 거기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좋은 회사도 소개받았어요. 우리나라 안에서만 보지 않고 밖으로 눈을 돌려서 좀 더 여유롭게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여전히 호시탐탐 노리고 있죠.

아무래도 ‘공무도하가’ 이전에 앨범이자 ‘Darkness’란 타이틀로 알려진 셀프 타이틀 앨범의 마지막 곡인 ‘Twisted but Straight’에 처음으로 영어 가사를 쓴 걸로 압니다. 그 후에 발매된 앨범부터 본격적으로 영어가사를 쓰기 시작했고요. 아무래도 그것이 해외로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여행을 너무 좋아하니까 외국에서 노래를 하면 계속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래서 계속 밖에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영어가사를 쓰게 됐어요.

원래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것으로 아는데 연기를 지망하셨던 건가요?
고등학교 때 연극을 좋아해서 연극부에 있었어요. 원래 미대를 가려고 했다가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고 이미 예체능계로 넘어간 마당이니까 실기 시험을 안 보고 공부만해서 들어갈 수 있는ㄴ 학교가 어딘지 찾아보고 그냥 진학한 거에요.

사실 그럼 연기라는 한 우물을 파고 싶어서 진학한 건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지금도 파고 있었겠죠. (웃음) 고등학교 3학년 때, 연극부를 만들어서 한양대 연극제에 나갔었어요. 그런데 저는 상을 못 타고 후배들이 다 상을 타서 나는 연기하면 안되겠다 생각했었죠. (웃음) 그저 좋아했을 뿐이에요.

‘담다디’로 강변가요제에서 수상했고 결국 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노래를 하고 싶다는 욕심은 얼마나 컸던 건가요?
그냥 소풍 가서 노래하면 다 뒤집어 지니까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죠. 그냥 단순한 거였어요.

즉흥성을 중시하는 편인가요?
그때마다 하고 싶은 걸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노래할 때 너무 행복했죠. 어릴 땐 뭘 하는 게 좋을까 싶어서 그림도 그려봤고, 연극부도 만들어보고, 그랬지만 뭘 했을 때 내가 전율할 정도로 행복한가, 생각해보니 노래할 때더라고요. 그래서 그럼 노래를 해야겠다 싶었죠.

결국 강변가요제에서 수상한 덕분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얻게 됐어요. 그 당시 불현듯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건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나요?
처음엔 노래한다는 게 그냥 노래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음악도 이제 산업이잖아요. 그게 저하곤 썩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그럼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다 음악을 하는 건 좋은데 과연 어떻게 음악을 하는 게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하는 걸까 생각하게 됐죠. 처음엔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공부를 해 들어가보니 자기가 직접 음악을 만드는 경우가 있더군요. 그냥 스타나 아이돌이 되는 길은 저하고 안 맞았던 거죠. 그런데 일본엔 제가 원하는 음악적 세계가 많이 발달돼있더라고요. 그러다가 이제 그 쪽에 있는 회사를 어떻게 알게 돼서 배웠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여전히 전 경쟁적인 세계와 잘 안 맞는 거 같아요.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걸 너무 못해서, 저는 그런 게 굴욕적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런 게 너무 싫고 저하곤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거짓말도 잘 못하는 성격이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잘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걸. 그런데 제가 원하는 길로 가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했죠.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문화의 다양성이 잘 유지되는 시스템을 갖춘 것 같습니다. 사실 일본처럼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극도로 발전한 나라에서 다양한 장르들이 나름대로 씬을 유지하는 걸 보면 말이죠. 크건 작건 나름대로 시장규모가 유지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주류의 범주에 들지 않는 이상, 제약이 많이 발생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서만 머물 생각이 없었고, 얼터너티브(alternative)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었던 거죠. 평생 음악을 하고 싶으니까. 아무튼 우리나라는 좁지만 이 세계는 넓어요. 만약 우리나라에 제 팬이 백 명이 있고 일본에도 한 오십 명 있다면, 그리고 나중에 베를린에서 공연했더니 또 열명이 생겼다면, 그렇게 한 나라를 벗어나 여러 나라에서 조금씩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일단 큰 욕심 없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활동해나갈 수 있는 무대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외국에 나가서 음악을 하려면 어느 정도 음악에 난이도가 필요해요. 그게 예전에 ‘공무도하가’같은 난해함이 아니더라도, 약간 세련됐다고 해야 하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탄탄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한국 사람들 듣기엔 너무 낯선데, 혹은 이건 한국에서 안 팔리겠는데, 정도가 돼야 일본에서 사가겠다고 하거든요. 약간 미안한 얘기지만 취향의 갭이랄까요? 그에 따른 숫자의 갭도 커요. 그런 특별한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일본에는 많고, 한국에서는 소수니까. 그런데 일본의 얼터너티브에만 수준을 맞추면 그것도 좀 문제가 있고, 그러니까 대충 어느 정도의 선을 유념해야죠. 물론 일본에서도 메이져 음반사들은 그런 시도를 잘 안 하지만 건강한 인디 회사들이 나름대로 대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좋은 인디 회사들한테 인정받을 수 있는 레벨로 만들면 되거든요. 지난 7월 23일에 13집도 일본에서 발매됐어요. 일단 ‘Spitz’라는 밴드가 있는 인디 회사인데요. 거기에 저하고 ‘공무도하가’때부터 같이 작업했던 와다 상이란 분이 계세요. 사장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프로듀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 분과 친구분이신 한국 사장님이 권해주셔서 들어보시더니 일본에서 발매할만하다고 해서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들으면 쟤 왜 저러니? 하고 재수없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외국에 팔려면 대중성보단 음악성에 치중해야 해요.

최근작을 비롯해 그 이전에 발표한 ‘Romantopia’나 ‘신비체험’같은 앨범은 확실히 대중적인 친화도가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판매량도 늘었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비대중적인 이미지로 인식되는 건 대중적으로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요즘 얘길 들어보니까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가수는 마케팅 비용만 4억 정도? 저는 그건 꿈도 못 꾸는 이야기죠. 그렇게 자본의 힘으로 크게 광고하니까 가만히 앉아있어도 자기 코앞까지 오는 마케팅에 취하기 쉬울 수 밖에요. 마케팅 비용이 4억이라는 건 저는 꿈도 못 꾸지만 만약 4억이 있다 해도 전 제작비로 쓰겠어요. 반대로 이 얼터너티브 쪽은 그런 자본력이 없어요. 영화도 그렇지 않나요? 인디영화나 예술영화들은 큰 자본력으로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음반도 똑같아요. 그래서 스스로 발품을 팔아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 찾을 줄 아는 매니아들 아니고서야 접근이 힘든 거죠.

자본에 의해서 예술이 좌우 당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자본의 힘이 대단한 게 취향도 비슷하게 만들어버리잖아요. 그런데 제 음악에 자본력을 더한다는 것도 사실 우습죠. 만약 그 자본력에 무릎을 꿇어버리면 또 어떤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걸요.

아무래도 얻는 바가 있으면 잃는 바도 있는 법이니까요.
영화도 음악과 똑같을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예술영화감독이 상업영화를 찍을 수도 있겠지만 예술영화만 고집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으니까 예술영화만 고집하겠죠? 음악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그것이 꼭 자본만의 문제라고 보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부분들을 고민하면서 저에게 맞는 길을 취하면 되는 거죠. 자본이 있어도 그걸 잘 다룰 수 있고, 그 자본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좋다면 그 길로 가면 되는 거에요. 하지만 전 인디 분위기가 나는 홍대가 제 취향이고 너무 좋아요. 그래서 고집 피우고 싶다 해야 하나. 락이나 포크 음악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외국 아티스트들은 안 그래도 되는데 왜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들이 코미디 프로에 출연할 수 밖에 없는지 수긍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거기에 타협하지 않고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다음 세대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전 지난 20년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물론 아까 우스갯소리로 ‘담다디’ 식당을 내겠다고 했지만. (웃음)

그런 면에서 좀 더 본인의 경험담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곡가에게 잘 팔릴 것 같은 곡을 받아서 노래 부르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을 경험하지 못했겠죠. 일본의 유명한 락밴드인 ‘스피츠(Spitz)’가 소속된 회사의 사장님에게 네 음악 좋다, 는 칭찬을 들었다던지, 내가 좋아하는 ‘커트(Cut)’나, ‘스위치(Switch)’같은 일본의 문화잡지에 내 이야기가 실린다던가, 이런 것들. 사실 일본에서는 상업적인 것과 작가적인 것을 엄격히 구분해요. 우리나라에서 매니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숫자가 적어서 그리 불리는 경우지만 사실 일본에는 매니아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 많아요. 실제로 동경에서 예술전문직에 종사하는 분들은 공부도 많이 했고 그만큼 돈도 잘 벌죠. 그런데 우린 왜 그렇게 뭔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건지 모르겠어요. 동경 자체가 트렌드를 만들어서 발신하는 곳이니까 거기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이나, 작가들은 트렌드 세터로서 인정받고 잘 살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래도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식 차이가 그런 대조적 상황을 발생시키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가 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근래에 문화 자체를 그저 순간적인 유희로 소비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전 미리부터 포기를 했으니까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아시아의 중심이 동경이라면 왜 서울은 안 되는지, 그걸 미리 포기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그게 누구를 위한 건지, 그런 생각이 필요하다고 봐요.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에요. 왜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있는 곳을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포기해버리는가 라는 거죠. 그리고 지금은 문화가 너무나 중요한 시대잖아요. 이번에 바르셀로나를 갔다가 완전히 반했는데 사실 바르셀로나라고 하면 스페인의 수도도 아니잖아요.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도시인데, 너무 멋있는 거에요. 우리나라 지방들은 다 서울 흉내만 내잖아요. 자기들만의 문화를 가지고 1등이냐, 2등이냐, 경쟁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색깔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죠. 동경이 1등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따라가야지, 가 아니라 동경이 1등을 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에요. 엄마 친구 아들이 1등을 하건 말건 그건 남의 일이고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왜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해야 하냐는 말이죠.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요.

결국 외국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그런 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은데요.
척박하니까. 내가 지금 여기 이 오아시스가 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물이 없다고 그냥 말라 죽을 순 없잖아요. 물을 찾아야지. 그건 그냥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해야 할까요?
결국 자신의 이상을 찾아서 스스로 떠난 것이라고 봐야겠군요.
제가 한영애 선배님처럼 무슨 직접적인 정치적 압력을 받은 건 아니니까요. 사실 제가 노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계기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라디오로 듣게 된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 때문이에요. 많이 놀랬죠. 너무 아름다운 거에요. 우리나라에서도 내면을 노래하고 팝송보다 멋있는 음악들이 나오는 구나, 라는 생각을 해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그 때 80년도에 잠시 우리나라 음악계의 르네상스기가 찾아왔어요. ‘어떤 날’이라던가, ‘들국화’라던가, 한영애 선배님이라던가, 그런 대단한 분들이 활동하는 좋은 시기에 고등학생이었는데 그게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래서 나도 저런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정부가 탄압을 하면서 그 싹이 완전히 없어졌거든요. 그 당시, 포크송을 비롯해서 한 단계 레벨이 높아진 음악을 국가가 억압한 거죠. 그런 맥락이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왔다면 영국 저리 가라고 할만한 대중음악문화가 자라났을 거에요. 그렇게 문화적 싹을 잘라버리는 그런 국가에서 다음 세대는 어떻게 될까요? 그 길을 가고 싶어도 길이 없어졌는데 어떡하겠어요. 여기 없으면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나라에 가서 그게 뭔지, 공부도 좀 하고 그래야 하는 거죠. 내가 원하는 세계가 여기 없으니 나가야죠.

사실 그 당시가 어리다고 보면 어린 나이였을 땐데 일말의 두려움은 없었나요? 주변의 우려도 좀 있었을 거 같고요.
제가 날라리 신자긴 하지만 기독교 신자에요. (웃음) 성경을 보면 모세의 출애굽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찾아간다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한대수 선배님께서도 날라리 기독교 신자신데, (웃음) 그런 사상이 한대수 선배의 노래 안에도 들어있어요. 내가 여기서 있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억압받아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그렇지 않은 자유의 땅으로 가는 게 낫다고, ‘행복의 나라’가 바로 그런 노래죠. 저도 제가 꿈을 펼칠 수 있는 땅으로 가버린 거에요. 그런데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도 제가 가야 하나요? 여기가 그렇게 되면 안 되나요? 여기가 그렇게 된다 해서 나쁠 게 뭐가 있나요?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21세기인데 여긴 아직도 그런 가요? 아직도 여기는 행복의 나라가 아닌가요? 이렇게 물어보고 싶어지지 않겠어요?

절망적인 과거로부터 달아났다면 현재의 가능성을 되묻고 싶어지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여기가 약속의 땅이 될 수 있다는 의지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고요.
(희망이) 보이고 있고, 많이 좋아졌어요. 지금 제가 우리나라에서 7년 정도 있었는데 그건 홍대같은 곳에서 어떤 갈증들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금은 나가버려야 한다는 걸 느끼기 보단 여기 머물면서 더 발전하는 걸 보고 싶어요. 그리고 많이 좋아진 거 같기도 하고.

공연 문화도 확실히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외국 뮤지션들의 내한도 변변하지 않던 과거에 비해 요즘은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같은 큰 행사가 정착되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국내외 인디밴드를 망라한 쌈지 페스티벌 같은 공연도 잘 이어지고 있고요.
많이 활성화됐죠. 그런데 좀 더 욕심을 내야 될 것 같아요. 페스티벌은 외국 크루(crew)들이 가져 온 장비들을 잘 연결하고 하는 정도니까 겉치레에 불과할 수도 있고요. 실제론 음악을 만든다던가, 기획한다던가, 레코드 회사, 매니지먼트, 그리고 작은 공연장들과 같은 저변이나 인프라가 생겨야 하는데 그건 사실 열악하니까요.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안으로 들여다보면 좀 더 시간이 걸릴만한 일이 많죠.

그 열악한 인프라를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소수 취향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의 성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걸 원하는 사람들이 저만 있는 게 아니겠죠. 그런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취향을 바꾸지 않는 이상은 점점 좋아질 테고요. 그리고 물론 팬도 중요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어야죠.

메인스트림과 인디펜던트가 분리된 영역으로서 정의되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상호간에 자극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제가 잭 블랙을 되게 좋아하는데,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젝 블랙은 매니아들의 아이콘이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쿵푸팬더>목소리를 연기할 정도로 바뀌었죠. <쿵푸팬더>는 큰 자본을 이용한 영화지만 잭 블랙이 지닌 성향들이나 취향을 잠식하지도 않고요. 사실 우리나라에서의 문제는 그런 것들이 없다는 거죠. 코미디 프로에 나가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투자 받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이 없어요. <터네이셔스 D>같은 영화를 찍던 잭 블랙이 지금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요. 미국 사람들이 <스쿨 오브 락>같은 영화에도 과감하게 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일 수록 소재나 내용, 음악도 식상하잖아요. 왜 다 그렇게 해야 하는지 말이죠. 우리나라 자본은 왜 인디적인 성향을 절대로 도와주려 하지 않는지 저는 정말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에요. 그런 일을 발견하기 힘들잖아요. <괴물>의 봉준호 감독님 정도뿐이랄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현상이 자꾸 일어난다면 자본의 유입이 원활해지고 문화적인 조화가 이뤄지는 상황도 기대해볼 수 있을 거에요. 맨날 인디라고 해서 지지리 궁상으로만 있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자본에 의한 기획들이 이뤄질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잭 블랙이 <쿵푸팬더>를 했다고 해서 얘가 변절했다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건 그게 좋은 기획이기 때문이죠. 어느 날, ‘언니네 이발관’이 10억 짜리 음반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런 사실에 작품이 좋았나 보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거에요. 저는 아티스트들에게 자본 때문에 스피릿(spirit)을 버리는 걸 요구하기보단 그런 기획이나 투자가 좀 더 많아졌으면 해요.

쉬운 일은 아닐 거에요. 아무래도 돈을 가진 사람들은 당장의 수익을 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자본이 좀 더 지혜로워야 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돈을 벌기 위해서 투자를 하는 거니까 금방이라도 팔릴만한 것에만 투자하잖아요. 이게 당장 안 팔리더라도 조금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농사를 지어가면 언젠가는 가능성이 보이는 것들이 있어도 그걸 할 바에야 손 쉬운 S라인한테 돈을 투자해버린다던가. (웃음) 그러니까 결국 씬이 맹목적인 자본에 의해 말라가고 고갈되고 종래엔 망하는 거에요.

자본이 예술을 위한 수단이 돼야 하는데 목적을 지니고 지배하려 하니까요.
물론 자본도 절반 정도 자신의 몫을 챙길 필요는 있어요. 투자를 한다는 게 죄가 아니니까요. 다만 투자해서 반은 현실에서 취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반 정도는 좀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에 투자해야죠. 좀 더 깊이가 생길 것 같은 아트(art)를 위해서 활용돼야 하는데 그런 장기적인 안목이 없으니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답답하죠. 가까운 일본만 해도 장기적으로 문화와 예술을 위해 자본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아티스트가 당장은 그저 그렇다 해도 가능성이 있으니까 투자해보고 키워보자, 가르쳐보자, 그런 풍조가 있는데 여긴 그런 게 없어요. 자기 혼자 죽을 똥을 싸고 올라가야 해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오늘날 전통적인 예술 장인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도 그것과 연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길 수가 없죠. 그걸 어떻게 해내겠어요. 누군가의 후원이 있고, 아티스트를 키우기 위한 투자가 있어도 가능할지 모를 일인데 자기 힘으로만 올라오라고 했을 때 누가 그걸 버텨낼 수 있겠어요. 그건 국가적으로 주도해나가거나, 사람들의 의식이 좀 더 깨어나서 먼 미래를 내다보고 스포츠만큼이나 우리나라의 명예를 높여줄 수 있는 깊이 있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키워주고자 할 때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니 열악하고 척박하죠.

어쩌면 20년 동안 자신의 영역을 찾아 떠돌았던 만큼 지금 발 디딘 이곳이 진정한 자신의 로만토피아(Romantopia)가 되길 바랄 것 같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급하게 마음 먹을 것도 없고, 보챌 것도 없이 희망을 지니고 있다면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물론 조금 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면 넓은 세계로 나가서 경험을 하면 되는 거죠. 그리고 여긴 여기대로 키워나가면 되는 거고. 그런데 질문들이 왜 이렇게 진지한 거에요?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잖아요. (웃음)
2008년 9월 1일 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2008년 9월 1일 월요일 | 사진: 권영탕 기자(무비스트)

16 )
kisemo
기대되네요   
2010-05-15 13:46
skdltm333
정말 옛모습 그대로네요~   
2009-03-04 05:42
ymsm
늙지도 않네...   
2008-10-31 16:05
podosodaz
한결같은 모습과 음악스타일 보기 좋네요   
2008-09-12 11:58
lse0918
크크크크크 내이름도 이상은인데 ㅋㅋㅋ 게다가 88년생이고 !! 이분 넘좋음 !   
2008-09-06 14:32
rlarkdud1
와!! 너무 반가운 얼굴이에요~ 이상은씨는 저와 남자친구가 함께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가수 중에 하나죠.ㅋㅋ 아~ 이상은씨! 콘서트 안 하나요?? 담백하고 잔잔한 당신만의 목소리. 듣고 싶어요~ㅜㅜ   
2008-09-05 17:08
can1505
멋지고 아름다운 보헤미안 이상은   
2008-09-04 00:48
joynwe
보헤미안이란 말이 왠지 어울리는 이상은 씨   
2008-09-0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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