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어른들의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서도 청불이 아닌 순한 맛으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박찬욱 감독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터다. 하지만, 아름답고 선하고 좋은 것 이면의 추하고 악하고 나쁜 것이 존재한다는 그의 정서와 스타일은 여전하다. 내러티브와 연출의 묘가 깊어졌을 뿐. 아주 사적이면서도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박 감독을 화상으로 만났다. 솔직하고 정성 있게 전하는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칸 감독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린다. 우문이지만, 혹시 수상하지 못했다면 섭섭했을까. 모든 작품이 나름의 특별함이 있겠지만, <헤어질 결심>은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나.
알다시피 수상한 적도 수상하지 못한 적도 있는데 솔직히 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섭섭해하니 왠지 죄를 지은 것 같고 뭔가 잘못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 상투적이라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받는다고 해서 그만큼 좋지도 않다. 못 받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이유다. 경쟁을 붙여서 상을 주고 받는다는 게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일까 싶다. 심사위원단의 구성에 따라서 취향이 많이 갈리고 이에 영향을 받으니 말이다. 영화가 내게 어떤 의미로 남겠냐고 묻는다면, 감독이라면 대부분 그럴 텐데, 배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헤어질 결심>은 박해일과 탕웨이의 영화라는 생각이다. 시상식 때 박해일의 이름이 불리기를 고대했는데, 막상 남우주연상에 송강호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박해일을 잊어버렸다. (웃음) 참 미안하다.
<헤어질 결심>을 기획하게 된 배경은.
이전에 찍은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영국에서 만들고 그리스와 체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촬영했는데, 작업하면서 다음 작품은 무조건 한국에서, 한국어로 극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찍었고, 작품에 어느 정도 자부심도 있지만, 극장에서 보여드리지 못한 점이 아쉬웠거든. 더욱이 이 시리즈가 팔레스타인 분쟁을 다루기에 다음에 찍는 건 메시지나 역사적 배경과 상관없이 영화 자체, 그러니까 가장 순수한 서사를 지닌 영화를 하자고 했다. 당시에 마침 정서경 작가가 (런던에) 여행을 왔길래 앉혀 놓고, 닦달해서 기획하게 됐다.
주제곡인 정훈희의 ‘안개’를 트윈폴리오(송창식 윤형주)가 불렀다는 사실도 영화를 기획한 계기 중 하나라고 밝힌 바 있다. 노래의 어떤 면에 끌린 건가.
어려서부터 좋아한 가수와 곡이라 여러 상념과 추억을 일으켰다. 게다가 송창식 선생의 목소리로 들으니 너무나 신선하더라. 영화일을 하고 있지만, 어릴 때 들은 한국의 대중가요가 제 감수성을 크게 키워줬다고 생각한다. 그중 송창식 선생은 특히 좋아한다. 그래서 익히 아는 노래지만, (관객에게) 선생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었다. 영화에 안개가 그 자체로 여러 번 등장하기도 하지만, 극이 지닌 여러가지 모호한 상황과 감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공동각본가인 정서경 작가가 모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고문 장면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해서 엄청 수위가 센 영화를 예상한 이가 많다. 원래는 ‘고문’ 같은 설정이 있던 건가.
전혀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서경 작가에게 한 번 따져볼 생각이다. (웃음) 그런데 보나 마나 뻔한 게 ‘저 인간이 어디 가겠어?’ 뭐 이런 예상을 장난스럽게 표현한 게 아닌가 한다.
영화제 수상도 의미가 있지만, 관객의 반응이 무엇보다 궁금하다고 했다.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영화는 어떤 메시지도 없고 딱히 주제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는, 그냥 (개인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이라는 두 인물의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이 둘의 감정은 감춰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이 유심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느끼는 감정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슬프기도 하고 때론 아주 답답하기도 하다.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또 아주 우스꽝스러운 순간도 있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혹은 사랑에 빠질 때의 모습일 거다. (말했듯 관객이) 개인적으로 느꼈으면 한다.
리뷰나 댓글 반응을 좀 살피는지.
원래 잘 찾아보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 처음으로 리뷰를 읽고 있다. 영화에 관한 개인적인 관점과 생각이 흥미롭더라. 전문적인 평가를 떠나 개인의 개성과 생각이 잘 드러난 리뷰가 있길래 읽으면서 ‘이 기자분이 시집을 내면 한 권 사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매우 개인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사적인 영화가 아닌가 한다. 언론 중에서는 가디언지의 ‘히치콕을 보지 않고 만든 히치콕 영화’ 같다는 의미의 평가가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인 탕웨이, 박해일 배우가 연기를 참 잘하고 호흡 또한 뛰어나더라. 두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예상외의 연기로 (당신을) 놀라게 한 장면이 있을까.
초반부, 남편 시신의 눈가에 있는 개미가 찍힌 사진을 보고 ‘서래’가 ‘개미가 사람을 먹어요?’라고 묻는다. 내용은 끔찍한데 너무나 무심하게 말한다. 살을 비비고 살던 남편이 죽었고 그 살이 부패해 벌레에 먹히거나 하는 그런 끔찍한 상황인데도 크게 감정의 동요가 없다. 마치 인생이란 그런 것이고 그래도 자연은 굴러간다는 뭐랄까 싸구려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는 인물이라는 걸 드러내는데 이런 탕웨이의 해석에 놀랐다.
또, 서래가 잠을 잘 못 자는 해준을 재워 준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해준이 누워서 잠들기 전 ‘내 심정을 가져다 뭐 하려고 했냐’고 물으니, 서래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답한다. 그 말을 듣고 해준이 ‘아~’하고 답하는데 이걸 굉장히 길게 말한다. 개인적으로 웃기면서 친밀한 해준의 면모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공무원으로 형사로 꽉 조인 인물인데 그런 모습을 내려놓고 장난기 있는 느낌을 준다. 시나리오에는 그냥 ‘아’라고 돼 있거든. 과연 ‘박해일의 해준이구나’ 싶었고, 현장의 스태프들도 특히 좋아했던 장면이다.
같이 해보니 두 배우는 어떤 사람이든가.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박해일과 탕웨이는 비슷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상반된다고 느꼈다. 탕웨이는 가만이 있으면 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신비함을 풍기는 사람이다. 반면 박해일은 다 들여다보이는 것같이 투명하다. 꿍꿍이가 없고 감출 것이 없는 사람인가 보다 싶다. 조금만 친해지면 그의 영혼이 얼마나 맑은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를 변태라고 하는 이유는 생각이 엉뚱하고 상투적인 면을 추종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같이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특한 면이 있는데 이를 숨기지 않고 얘기한다. 박해일의 이런 면이 해준에도 드러났다는 생각이다.
두 배우에게서 발견한 의외성이 있다면.
박해일은 봉준호 감독과 같이 작품한 적이 있고, 송강호와도 친해서 비슷한 부류의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그런 면이 많았는데, 아마도 <헤어질 결심>이 전작들과 좀 차이가 있었나 보더라. (편의상 구분하자면) 1부 마지막에서 서래에게 (자기는) 붕괴됐다고 말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데 있어 정말 많이 고민했다고 하고, 그게 보였다. 그런 고민이 드러난 게 의외라면 의외였다. 사실 배우는 감독이 옆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결국엔 혼자서 해결해야 해서 아주 외로운 입장인데, 그걸 잘 드러내지 않는다.
탕웨이가 언어 감각이 좋다는 건, 사전 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광동어도 영어도 매우 빨리 익혔다고 들어서 믿음이 있었는데 이를 뛰어넘었다. 자기는 소리만 외워서는 대사를 말할 수 없다고, 한국어를 기초부터 문법 하나하나를 배워 나갔다. 문법과 발음, 두 명의 선생한테 배우는데 그의 공책을 보면 감탄할 정도다. 한글을 우리보다 더 잘 쓴다. (웃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후시녹음으로 보완해야 하는 경우에도 매번 감탄이었다. 녹음실 부스가 좁아서 매우 답답하고 30분만 들어가 있어도 정신이 혼미한데 그 안에서 몇 시간이나 심지어 한 대사를 100번 넘게 반복하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후반부 서래의 대사 속에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라는 표현이 있다. 순간 당신이 얘기한 어른의 사랑의 한 조각을 발견한 느낌이었는데, 제목의 탄생 비화가 있다면 알려달라. (웃음)
<아가씨>(2016) 때와 비슷하다. 정서경 작가와 같이 글을 쓰고 얘기하는 중에 딱 걸린 단어다. ‘숙희’(김태리)가 ‘히데코’(김민희)에게 ‘아가씨, 이리로 오세요’라는 대사에서 아가씨를 음미하게 돼 정했다. 이번에는 서래가 ‘결심’이라는 말을 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서 걸린 단어다. 결심했는데 과연 성공할지 확인하고 싶어할 거로 생각했다. 관객을 궁금하게 만드는 제목이라 좋았다.
서래는 해준에게 현대인으로서는 ‘품위’ 있다고 말한다. 사실 그가 그렇게 품위 있는 캐릭터는 아니라는 생각인데, (웃음) 어떤 의도를 담은 표현인 걸까.
이기적이랄까, 세속적이고 경박하다고 스스로에게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 어느새 이런 모습을 보이는 데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 지금, 지금 이 시대에 멸종 동물 같은 보기 드문 기품을 가진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품을 계속 뿜뿜하면 재미가 없으니, 그가 어떻게 붕괴되고 원래의 품위를 어떻게 잃어가는지. 또 이런 자신을 인지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고통과 부끄러움 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배우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이 듬뿍!
<헤어질 결심>은 두 주인공을 주축으로 그 감정선을 따라가지만, 베테랑부터 신인까지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참여했다. 편의상 1부 부산과 2부 이포로 구분하자면, 부산에서는 ‘해준’의 후배 형사인 ‘수완’역의 고경표와 ‘미지’역의 정이서, 해준이 쫓는 범인 ‘홍산오’로 깜짝 출연한 박정민이 있다. 2부 이포에서는 해준의 아내 ‘정안’역의 이정현, 서래의 새로운 남편 ‘임호신’역의 박용우, 역시 후배 형사인 ‘연수’역의 김신영, 그리고 ‘철썩’이로 불리는 ‘철성’역의 서현우가 등장한다. 감독의 정성스러운 코멘트를 전한다.
김신영 개그맨이 정극 연기에 처음 도전해 화제를 모았다. 이외에도 고경표, 박정민 등 쟁쟁한 배우가 참여했다.
여러 번 얘기했는데 ‘행님아’ 시절부터 김신영의 팬이었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방송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관찰력이 예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핵심을 캐치에서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데, 확실히 핵심을 파악하는 점에서는 천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극 연기도 잘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현장에 와서 처음에는 눈치도 보이고 주눅들었다고 본인은 말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너무 잘했다. 카메라 앞에서 얼지도 않고 상대 배우와 주고받는 호흡도 능숙했다.
고경표는 당시 그의 인기가 막 치고 올라갈 때라 팬도 많고 자칫 바람이 들기 쉬운데 이런 면이 참 없었다. 물러날 때와 앞에 나설 때, 그러니까 딱 위치 파악을 잘했다. 사실 촬영하다 보면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할 때조차도 주목을 끌기 위해 불필요한 행동을 하는 배우가 종종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건실한 배우더라. 그렇기 때문에 편집으로 잘려 나가지 않고, 적당한 톤과 연기로 사랑스럽다 혹은 귀엽다는 평을 듣는 것 같다. <기생충>에서 피자집 사장으로 나왔던 정이서는 고경표와 같이 형사로 나온다. 재미있는 장면이 있었는데 시간 상 편집돼서 아쉽다. 박정민 배우는 이번에는 분량이 적지만, 언젠가는 송강호나 박해일처럼 크게 될 거라는 마음에 인연을 맺는다는 취지로 섭외했다. 그런데 특별출연치고는 너무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해줬다. 구두 신고 뛰는 장면도 많고, 우여곡절을 겪은 엄청난 전사를 지녔으나 이를 표현할 기회는 별로 없는 어려운 캐릭터인 데도 불구하고 잘 소화해줬다.
2부 이포에서는 ‘정안’과 ‘호신’이 신스틸러라 하겠다.
박용우가 주연한 <달콤, 살벌한 연인>(2006)을 좋아한다. 두 번 보는 영화가 별로 없는데 이 영화는 두 번 봤다.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극 중 자기를 소개할 때 ‘항문을 좋아하는 애널리스트가 아니’라고 소개하면서 호탕하게 웃고 쑥스럽게 잦아드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이정현은 영화 <꽃잎>(1996)이나 가수로서의 퍼포먼스를 보면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보면 그냥 평범한 생활인 같은데 어떻게 그런 연기와 노래, 춤을 해내는지 그 메커니즘을 잘 모르겠다. (웃음) 이번에도 남성호르몬에 자라액이 좋다고 하면서 남편 해준을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 등이 너무 웃겼다. 그 장면을 다만 몇 프레임이라도 더 넣고 싶은 마음에 다른 장면의 프레임을 줄이려고 노력할 정도였다. 지금 봐도 빵 터진다. 아, 그리고 2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있다.
‘철썩’역의 서현우 배우!
그를 처음 눈여겨본 건 영화 <남산의 부장들>(2019)에서 ‘전두환’으로 등장했을 때다. 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못 하는 것도 같은 종잡을 수 없는, 여하튼 잊을 수 없는 연기였다. 당시에 뒤풀이 자리가 있어서 무슨 생각으로 연기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이번엔 오디션을 거쳐서 캐스팅했고, 이때 장광설을 늘어놓는 대사를 선보였는데 끝나고 나서 스텝들 모두 박수쳤었다. 극 중 인물들이 다들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 절제하는 편이라 완전히 다른 패턴의 인물이 있으면 극에 전환이 되겠더라. 또 이를 받아치는 김신영의 캐릭터를 살릴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하는 중국어 대사의 경우 탕웨이가 직접 가르쳐줬다. (탕웨이가) 해보라고 하면서 계속 고쳐주곤 했다. 근데 그녀가 무서운 선생님이라… (웃음) (서현우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겠지만, 우린 ‘그 누가 탕웨이에게 배워 보겠냐’고 감사한 마음으로 잘 배우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영화 애호가로 유명한데 최근 흥미롭게 본 작품과 주목하는 감독, 배우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한다.
한국 영화는 KAFA(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좋은 사람>(정욱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외국 영화는 <베네데타>(폴 버호벤 연출), <퍼스트 카우>(켈리 라이카트 연출),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의 <나이트메어 앨리>(2020)다. 특히 <나이트메어 앨리>는 극장에서 봤는데 과연 이게 영화다 싶은 게 극장에서 보는 즐거움이 컸다. 또 애플TV+ <파친코>에 출연한 김민하 배우가 신선했다.
사진제공_CJ ENM
2022년 7월 6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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