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어느새인가 이서진은 깔끔하고, 건강하고, 신사적으로 나이 드는 미혼 남성의 표본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불새>(2004)나 <이산>(2007~2008)보다 훨씬 큰 대표작처럼 느껴지는 예능 <꽃보다 할배>와 <윤식당> 시리즈의 효과인지도 모른다. 내심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해묵은 생각을 하는 이 사회의 누군가에게,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을 깍듯하게 모실 줄 아는 그의 모습이 의외의 호감을 안긴 덕일 것이다. 담백하지만 정확한 영어 실력으로 식당을 찾은 외국 손님을 능숙하게 응대하는 모습에서는 결혼하지 않고도 제 능력껏 잘 나이 먹어가는 남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렇게 브라운관 앞 대중과의 거리감을 잔뜩 좁혀놓은 그가, 모처럼 영화 <완벽한 타인>으로 돌아왔다. 만취보다는 적당한 취기를 즐기고, 자극보다는 일상의 안정을 유지하며, 작품에 한없이 빠져있기보다는 빠르게 현실로 돌아올 줄 아는 힘을 기른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듯 보이는 그를 만났다.
데뷔 20년을 바라보는 긴 경력에 비해 영화 출연은 좀 뜸했다.
솔직히 말하면, 좋은 대본이 들어와 주질 않았다.(웃음)
<완벽한 타인>은 당신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재규 감독을 잘 안다. 함께한 드라마 <다모>(2003)가 작품이 잘 되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됐고 또 좋아하게 됐다. 이 감독이 나에게 대본을 줄 때는 절대 아무 대본이나 주지 않는다. <완벽한 타인>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워낙 독특했다. 주류보다는 마니아를 형성하는 작품을 만드는 스타일이라 잘 연출할 것 같았다. 다른 배우들과 함께해서 부담도 별로 없었다.
극 중 레스토랑 대표 ‘준모’ 역을 맡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늦깎이 신랑인데, 무지막지한 바람둥이다.
나에게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아예 그런 느낌이 없는 역할을 연기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색다르게 보일 것 아닌가. 사실 이재규 감독이 시나리오를 줄 당시에는 내 역할이 뭔지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읽으면서 아마 나한테 ‘준모’라는 역할을 주겠다 싶은 생각만 어렴풋이 들었는데 그게 맞았다. 생각 없이 말을 툭툭 하는 게 나랑 비슷한 점이 있다.(웃음)
집들이에 모인 어린 시절 친구들과 그 배우자가 ‘스마트폰 잠금 해제’ 게임을 벌인다. 공교롭게도 당신이 맡은 역할이 극 중에서 가장 질 나쁜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다.(웃음)
‘준모’는 여러 여자에게 발을 걸치고 그들의 눈높이를 잘 맞춰주는 능력을 타고난 남자다. 대신 뒤처리가 좀 좋지 못한 거다. 사업을 다 실패하는 거로 봐서 머리가 좋거나 치밀한 사람도 아니다. 오직 이성 관련 부분에서만 타고난 능력이 있는 건데, 잘 찾아보면 주변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다.(웃음)
김지수, 조진웅, 염정아, 유해진, 송하윤, 윤경호까지 7명의 배우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연기한다. 크든 작든 한 번씩 서로 연기로 붙는 장면이 있으니 꽤 재미있는 촬영이었을 것 같다.
테이블 배치상 내 옆에 (조)진웅이가 앉았다. 저쪽에서 이야기를 한다고 이쪽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으니, 서로 술도 따라주고 음식도 권하는 식으로 연기했다. 처음에는 물곰탕이니 닭강정이니 하는 것들이 다 맛있었는데, 촬영이 계속되니 나중에는 이렇게 먹다가 큰일 나겠다 싶더라. 그런 고충을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촬영을 시작하면 괜히 대본에도 없는 “이거 먹어~”같은 대사를 하면서 서로의 앞 접시에 음식을 올려놓곤 했다.(웃음) 나와 또래인 (유)해진 씨와는 원래 안면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 영화로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까칠한 변호사 ‘태수’역을 연기한 유해진과는 정면으로 맞붙는 갈등 장면이 있다.
해진 씨는 ‘에고(ego)’가 강한 사람이다. 대화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연기를 할 때는 의외로(?) 생각이 굉장히 많다. 연기에 대한 고민도, 연구도 깊다. 나는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데 그쪽은 감독과 이렇게 하면 어떤가, 저렇게 하면 어떤가 하며 계속 고민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다 비슷한데…(웃음)
(웃음)
나는 일단 연기를 마친 뒤에는 더 이상의 생각은 잘 안 한다.(웃음) 촬영하면서 성격이 제일 비슷하다고 느낀 건 염정아다. 본능적인 배우다. 진웅이는 뭐, 상남자다. 거칠다.(웃음)
어린 아내 ‘세경’역의 송하윤과의 합은 어땠는가. 초반부터 꽤 야한 신이 나온다.
(송)하윤이는 처음부터 나에게 주도권을 맡겨줬다. 말이 멜로지, 야한 신은 거의 액션 연기에 가까워서 여자 배우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는데 하윤이는 내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해줬다. ‘영배’역을 맡은 (윤)경호는 나보다 한 10살쯤 어린데, 나와 해진 씨와 진웅이가 경호 놀리는 재미로 살았다.(웃음)
한정된 공간 안에 오손도손 모여 앉아 촬영해야 했던 만큼 서로 상당히 가까워졌겠다.
전라도 광주의 세트에서 한 달 동안 합숙하다시피 했다. 각자 숙소에서 잠만 따로 자는 거지, 눈 뜨면 남자 사우나에서 발가벗고 만나서 촬영장도 같이 가고 저녁도 같이 먹고 다시 같은 숙소로 돌아왔다. 한 신 촬영이 끝나고 카메라 위치나 각종 세팅을 바꿀 때도 계속 식탁에 앉아서 떠들었다. 이게 촬영인지 노는 건지...(웃음) 하지만 다들 베테랑이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가도 슛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연기로 연결되는 분위기였다. 한 번 연기를 시작하면 끝도 안 난다. 서로 계속 밀고 나간다. 해진 씨는 진짜 끝까지 간다.(웃음)
원작이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굳이 찾아봤을 것 같진 않다.
솔직히, 그렇지.(웃음) 나는 대본이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는 스타일이다. (원작과 비교해서) 뭐가 바뀌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꽃보다 할배> <윤식당> 시리즈에서 보여준 예능 캐릭터가 대중에게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작품 속 인물에 그 모습이 겹쳐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다들 혼돈할 것이다. 뭐가 진짜고 뭐가 연기인지 말이다. 아마 이재규 감독은 그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예능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까, 그 모습 그대로 영화에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준모’는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역할이기도 하니까.
예능 이미지가 연기 활동을 제약할 것 같은 걱정은… 아마 없겠지.(웃음)
아휴, 전혀.(웃음) <윤식당>에서 (정)유미에게 커피를 타라고 시킨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이 방송에 나간 뒤에 걔가 믹스커피 광고를 찍었다. 아, 내가 탈걸! 엄청 후회했다.(웃음) 예능에 출연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시기적인 면이 크다. 나영석 PD에게도 맨날 이렇게 말한다. 알지, 이거 안 되면 우리는 이제 예능 끝이다! 나도 걔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점점 이서진이라는 이름이 어떤 상징이 되어가는 것 같다. 결혼하지 않고도 건강하고, 깔끔하고, 신사적으로 살아가는 미혼 남성의 이상적인 모습 같달까.
내 또래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기 관리를 하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내 만족 때문에 관리하는 편이다. 외모를 뽐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항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어서 그렇다. 운동도 하고, 잠도 많이 자고, 물도 많이 마시고, 약도 먹고 병원도 잘 간다.(웃음)
지금 삶에 충분히 만족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촬영이 다 끝나면 멍한 편이었다. 아직도 작품 속 그 상황에 있는 것 같고, 상대 배우가 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일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빨라지더라. 자극에 무뎌지는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게 나이를 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쁘지 않다. 일상으로 빨리 돌아올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더 좋은 일이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는지.
이제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한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 가정이 나오는 역할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 왜, 자식에게 따뜻한 부정을 느낀다거나 하는 그런 역할 있지 않은가. 잘 못 할 것 같기도 하고, 보는 분들도 별로 안 좋아할 것도 같고.(웃음) 이제는 멜로도 그만하고 싶다. 중년 멜로에는 사람들이 큰 관심이 없을 테고, 그렇다고 어린 여자 배우와 연기하면 대중들에게 왜 자꾸 그런 조합을 만드냐고 한 소리 듣는다.(웃음) 나 역시 어린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서 연기해야 하는 게 부담스럽다.
앞으로 당신이 원하는 작품을 선보이길 바란다.
그래서 곧 <트랩>이라는 연작 드라마를 선보일 예정이다. 인간 사냥에 휘말린 앵커 역할을 맡았다 산에서 처절하게 뛰어다닌다. 내일부터 1주일 동안 횡성의 산속에서 촬영을 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사람들과 오붓하게 모여 앉아 저녁 먹고 소주 한잔할 때가 제일 좋다. 예전에는 2차, 3차도 가곤 했는데 요즘은 살짝 취하면 바로 집에 들어간다. 일상이 흐트러지면 다음 날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게 싫다.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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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