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달리 조급해보였다. 당연, 늦었으니까! 예정된 시간보다.
물론, 촬영을 앞둔 차기작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막바지 준비로 심신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도 한 후유증일 수도 있을 테고...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는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추천한 영화 돈 시겔 감독의 <킬러>를 영화제를 찾은 친구들과 함께 감상한 후 감독이 아닌 보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킬러>의 독특한 영화언어를 먼저 습득한 선배 영화광으로서 젊은 관객들과 대화를 나눌 행사차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여튼, 수시로 남은 시간을 확인해야 해야 할 만큼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진행된 인터뷰이었음에도 나름, 함량미달이 아닌 짧지만 굵은 대화로 생각될 만큼 생산적 답변으로 얄팍하고 야박한 시간을 채워준 박찬욱 감독에게 심히 감사드린다.
서대원 기자: 지난 18일 ‘시네마테크 친구들영화제’ 후원회의 밤 행사와 기자회견에 참여했었는데. 그 뒤로는 오늘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박찬욱 감독: 그렇다.
서: 그래서 묻는데 다른 감독들이 추천한 영화는 볼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다. 뭐 다 봤던 작품일 가능성이 높지만....
박: 아쉽지만 다는 못 볼 거 같고, 내일 한 편 정도 볼 생각이다. 물론, 오래 전에 다 봤지만 여전히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은 작품들이다.
서: 시네마테크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해 후원회 형식을 빌려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시네마테크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환경은 거의 폭력적일 만큼 시네마테크가 서야 할 자리를 앗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창 불거지고 있는 불법다운로드 문제도 그렇고 DMB 등 급격하고 변하고 있는 매체환경도 그렇고 대중과 시네마테크의 거리는 당최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극장에서 영화보기의 즐거움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 역으로 그러기 때문에 시네마테크의 사회적 역할이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시네마테크의 중요성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린다.
박:.......(하하하)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지금 서기자가 한 말이 가장 중요하고 그게 핵심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서: 필자가 워낙 말이 좀 많다. 여튼, 청년시절 박찬욱 감독은 영화에 대한 갈증을 어떤 식으로 해결했나? 어떤 창구를 통해 은밀한 영화보기의 매력을 맛보았는지 궁금하다.
박: 음....프랑스 문화원, AFKN 그리고 외국에 나가는 사람들한테 부탁해 공수 받은 VHS, 뭐 이런 식으로 영화를 접했었다.
서: 그럼 지금은?
박: 지금이야 영화제가 많으니 그런 데 가서 우선적으로 많은 영화를 접한다. 신작은 별로 보지 않고 주로 특별전이나 회고전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물론, DVD 역시 많이 애용하고 있고. 사실 이런 공간을 일찌감치 누릴 수 있는 젊은 친구들이 부럽다.
서: 신작을 잘 안 보는 이유는 뭔가?
박: 어......한 마디로 말하자면 세계적으로 다 지금 영화를 잘 못 만들고 있다. 또 한정된 시간에 좋은 영화를 골라봐야 하는데 고전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입증된 작품이라 실패할 확률이 상당히 낮다. 그게 반해 신작은 아주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다. 때문에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살아난 작품들을 본다.
서: 김지운 류승완 오승욱 감독 등 막역한 동료들의 귀띔이나 소개로도 이런 저런 영화들 많이 보시겠다.
박: 물론이다.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모여서 다 같이 볼 때도 있고.
서: 말이 나와서 말하는데 프랑스 문화원은 지금까지도 오바해서 말한다면 전설처럼 회자된다. 박찬욱 감독은 물론이고 김홍준 감독 정성일 영화평론가 강한섭 교수 등 거기를 자주 드나들었던 분들이 많은데 당시 열정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때의 이야기 좀 해달라!
박: 그 당시에는 알다시피 인터넷도 없고 DVD도 없고 뭐 여러 가지로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전혀 없었다. 결국 영화정보에 대한 갈증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문화원에서 만나 영화 끝난 후 짜장면 집 가서 인사 나누고 먹으면서 참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친해지고 또 그러다보니 스스로들 나서 정기적인 행사도 열게 되더라. 지금이야 정보가 넘치니까 꼭 모여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 없으니 서로들 토론하는 시간이 정말 많았다.
서: 그런 일련의 과정이 숙성돼 많은 도움이 됐겠다.
박: 물론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에겐 큰 힘이 됐다.
서: 근데 어디서 보니까 아무리 좋은 영화도 두 번은 보지 않는 게 습관! 이라고 나와 있던데 왜 그런지 궁금하다. 늘 부족한 시간적 이유 때문인지?
박: 맞다 시간적 이유가 크다. 보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으니까!(웃음)
그리고 또 여러 번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영화를 만들 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어 걱정된 측면도 있다.
서: 난감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CJ와 쇼박스 같은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배급 역시 이 같은 어려움에 한몫하고 있다 본다. 때문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도 본의 아니게 원천봉쇄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 영화를 다루는 숱한 매체가 이 같은 척박함을 개선하는데 힘을 보태야함에도 사실 그 환경에 어느 정도 구속돼 있다 보니 그러지 못하고 있다. 작은 영화나 고전이 설 자리가 더더욱 좁아지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 활로를 찾았으면 하나?
박: 우선 어느 나라나 고전/작은영화가 크게 흥행을 못하는 법인데, 그게 우리나라는 좀 심각한 거 같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본다. 머리가 다 큰 성인들을 어떤 식으로든 계몽하고 바꾼다는 건 사실적으로 어렵다. 유년시절부터 영화관을 자주 드나들 수 있는 문화! 그러한 것들을 구축하고 쌓아나가는 게 유일한 방법 같다.
서: 난감한 질문에 이어 엉뚱한 거 하나 더 묻겠다. 전언했듯 거대 기업이 배급함으로써 적잖은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시점이다. 해서, 예술영화전용관의 필요성이 절실한 거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역시 주류 배급을 타고 대중과 만나는데. 감독한테 배급의 문제까지 고려해달라고 하는 건 오바스런 욕심일 거다. 그런데 영화를 만드는 과정상에 있어 어쩔 수 없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시장논리의 부담감을 덜고자 박찬욱 감독은 모호 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차렸다고 헤아려지는데 그렇다면 혹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결정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언젠가 가진다면 어떤 식으든 배급 부분에까지 뛰어들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다.
박: 없다! 하하!
서: 전혀 없다는 말씀인가?
박: 정말 전혀 없다. 그건 어른들이 하는 거다. 나 같은 철부지들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웃음)
서: 철부지라 말씀하셨지만 부단히 사회적 발언을 해오셨다. 이번일도 그 중 하나고. 이라크 파병 문제도 그렇고 부천영화제 사태 때도 그렇고. 얼마전 마스크 오브 리스펙트에서 받은 2천만 원을 전액을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 기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분명 의미가 있다. 단, 내 자신의 일을 그르치고 희생하고 감수하면서까지 나서고 싶지는 않다고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혔다. 민노당 당원으로서의 활동에서도 그렇고.
하지만 본인의 그런 의도와 관계없이 갈수록 박찬욱 감독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점점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영화에만 몰입하고 싶은데 말이다.
박: 맞다. 다 맞는 말이다. 부담이 된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흥행도 잘 되고, 대중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감독이 되다보니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게 아니라면 광고에도 출연하지 말았어야 하고 시상식 같은 데도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를 얻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하나를 잃는 거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본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잘 조율할 수 있냐는 거다. 일단은 조금씩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다.
서: 음 아직은 심하게 큰 부담으로 와 닿지 않는 거 같다. 하하하!
박: 아니다! 아니다! 크게 느껴진다.(웃음) 적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 그렇게 말한 거뿐이다. 뭐 겨울에 날이 추운 걸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거 같다.
서: 차기작인 <사이보그자만 괜찮아>처럼 '부담되지만 괜찮아!'로 들린다. 그나저나 이번에 책이 나왔다. 10여 년 전 나왔던 ‘은밀한 영화보기의 매력’을 ‘박찬욱의 오마쥬’라는 책 이름으로 그리고 인터뷰와 일상의 이야기를 묶은 산문집 ‘박찬욱의 몽타주’ 이렇게 두 권이 재출판 됐다. 한때 헌 책방에서 10만 원을 넘을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책이고,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찾아 다시금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서문에 보니 이상하게도 그 유명세만큼 당시엔 책이 안 나갔다 하더라! 어떻게 지금은 많이 팔렸나 모르겠다.(웃음)
박: 글쎄 말이다. 하하! 어...오마쥬의 경우 3쇄까지 들어갔다 들었다.
서: 아 그럼 전에 비해 무자게 잘 나갔다 볼 수 있겠다. 1쇄 당 얼마나 찍었나?
박: 그게 중요한데 나도 그걸 잘 모르겠다.(웃음) 궁금하면 함 물어봐라! 출판사에.
서: 참고로 본 기자도 샀다. 어떠신가? 십 수 년 만에 책이 다시 나왔는데
박: 음....사실 그렇더라. 전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내가 별 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까 자연스레 글 잘 쓰는 사람도 많더라! 예전엔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 잘 쓰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지금 보니까 영...
서: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박찬욱 감독을 보면 지성미가 뚝뚝 흐른다고. 물론 그걸 시샘해 “잘난 척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냐!”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하하! 또 예전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박찬욱 감독을 ‘교양인’이라 총정리 했더라! 막상 본인 자신은 이런 주변의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박: 음...한때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싫었고, 그런 인상을 가졌다는 말도 못마땅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좀 예술가적인 기질, 자유로움 그런 걸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같은 말을 그닥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나에게 없는 걸 가져갈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지금으로선 받아들이려 하고 있고 또한 교양을 인식하려는 태도를 가지려고 한다. 영화라는 게 어떤 영감과 감정 그런 걸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아주 이성적인 부분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기도 하다. 영화도 건축가가 건물을 짓듯 아주 침착하게 차곡차곡 쌓아가는 지성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다. 세상 사람들은 예술가에겐 지성이나 교양이 다른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그래서 더욱 지성과 교양을 견지하려 한다. 지금은 내 자신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서: 3월 중 <사이보그지만 괜찮어>가 촬영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무리는 잘 돼 가고 있는가?
박: 무엇보다 여주인공이 아직 확정이 안 돼서 걱정이다.
서: ???? 강혜정이 일찌감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지 않았나? 기사도 다 그렇게 나와 있고 말이다.
박: 난 거기서 대해서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 하하! 어쨌든, 강혜정은 아니다. 누가 처음엔 썼는지 몰라도 굳이 내가 나서서 부인하지 않으니까 그냥 확산돼 사실로 굳어져 버린 거 같다. 아직 여주인공은 결정되지 않았다.
서: 정말 기기묘묘한 일이다.
박: 아니 아무도 그걸 나한테 묻지를 않더라!(웃음)
서: 마지막으로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영화들! 사실 뭐 어려운 작품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재미 넘치는 영화들도 꽤 많다. 결국, 선입견이 무서운 거다. 거의 본능적으로 이 같은 영화를 꺼리는 친구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박: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일단 ,한번 오라고 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다. 일단 한 번 오시길 바란다. 여기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온 영화고,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살아온 영화다. 시공간을 초월해 어느 때봐도 즐겁고 재밌는 영화들이다.
서: 감독임과 동시에 시네마테크를 찾는 한 명의 관객으로 어떤 영화? 혹은 누구의 영화를 보고 싶은가?
박: 어, 많은 작품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루치노 비스콘티의 회고전을 보고 싶다. 그의 전 작품을 큰 화면으로 마주했으면 한다.
참고로 본 필자는 개인적으로 ‘필름위에 흐르는 고품격 떡무비 기획전!’을 열고 싶다. 정말로....속말이긴 하지만..ㅎㅎㅎ
취재: 서대원 기자
사진: 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