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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루저들, 파이팅!!, 뜻밖의 보물 같은 영화! 윔블던
2005년 3월 24일 목요일 | 노바리 이메일


봄이 오는 건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한결 따뜻해진 봄바람으로도 느낄 수 있지만, 극장가에 로맨틱 코미디와 멜러영화들이 걸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도 느낄 수 있다. 한차례 아카데미 특수가 지나가고, 이제 슬슬 로맨틱 코미디와 멜러영화들이 개봉을 시작했거나 준비하고 있다. 오늘 들여다볼 영화는 이런 로맨틱 코미디 바람의 선두주자 <윔블던>이다.

작년 가을 개봉에서 봄으로 미루어진 워킹타이틀표 로맨틱 코미디 <윔블던>은, 제목에서 보이듯 테니스를 소재로, 테니스 선수들인 인물들이, 영국에서 벌어지는 대표적인 테니스 경기인 윔블던 대회에서 벌이는 달콤 쌉싸름한 연애를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입긴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30대 루저들 파이팅!”을 외치는 뜻밖의 보물 같은 영화라고.

미국에서의 한심한 흥행성적이나 떨떠름한 악평들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대체로 흥행성적이나 심지어 유명 평론가들의 평론들도 결국은 절대적인 진리치가 아니라 한 시대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토대를 반영한 그 사회의 산물인 법. 미국인들 입장에서 이 영화가 반갑지 않았던 것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지나치게 영국적인 특징들일 터이다. 하지만 미국적 정서든 영국적 정서든 똑같이 ‘서양의 정서’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국적인 유머와 영국적인 투덜거림에 훨씬 덜 불편한 마음으로 훨씬 더 즐겁게 반응할 수 있다. 그간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들이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해오면서 우리가 영국식 유머와 코미디 코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프닝 크레딧에는 키어스틴 던스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지만, 누가 뭐래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폴 베터니가 연기한 피터 콜트이다. 만년 ‘가능성 있는 선수’에 불과했고, 이젠 운동선수로서는 퇴물일 수밖에 없는 30대 초입의 피터 콜트가 은퇴 직전 ‘한 건’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와중에 윔블던 우승컵은 물론 사랑하는 여자도 얻는다는 이야기. 줄거리는 참 단순하다. 거기에 한국에서는 (비록 <반칙왕> 등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흥행에 성공 못한다는 통설이 지배적인 스포츠 영화. 그 중에서도 한국인들이 좋아하고 대중적으로 즐기는 스포츠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테니스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은 너무 큰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폴 베터니는 눈썰미 좋은 소수의 영화팬들만 인지하고 있는 이름이다.

통설상 스포츠 영화가 ‘재미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스포츠 경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스릴과 스펙터클이 영화라는 매체에 담길 때에는 지루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들은, 실은 스포츠 그 자체의 매력을 다루기보다는 스포츠를 경유해 인생의 굴곡을 은유하기 마련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성난 황소>도 <록키>도 마찬가지다. 다만 훌륭한 스포츠 영화의 특징이라면, 스포츠의 매력 자체를 훌륭하게 담으면서도, 스포츠를 통해 사람과 인생의 이야기를 매우 능숙하게 풀어나간다는 것.

하긴 스포츠의 스릴만이 목적이라면 스포츠 영화를 볼 게 아니라 스포츠 경기를 볼 일이다. 문제는 많은 감독들이 스포츠 영화를 연출함에 있어 스포츠 경기 자체의 매력과 영화의 매력을 고루 담으려다가 조율에 실패해 죽도 밥도 못 만든다는 점. 그렇다면, 아예 영국의 대표적인 테니스 경기를 전면에, 심지어 제목으로까지 내세운 <윔블던>은 과연 얼만큼 성공하고 있을까?

<윔블던> 역시 다소 위태해 보이는 구석이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꽤 성공작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영화 <윔블던>이 선택한 전략은 오히려 다른 성공적인 스포츠 영화들이 선택한 전략과 정반대의 전략이라는 점에서 꽤 신선한 매력을 준다. 위험도를 감수한 만큼 높아진 매력이라 할까.

<윔블던>의 전략이란, 바로 스포츠 경기 그 자체에 집중도를 높인다는 것이다.

<불의 전차>나 <쿨 러닝>처럼 극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걸작 스포츠영화에서 정작 스포츠 경기 그 자체가 차지하는 러닝타임상 비율은 대단히 적다. 스포츠영화에서 우리는 경기 그 자체보다 경기를 준비하기 위한 훈련기간이랄지, 팀의 동료들과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며 팀웍을 다져나가는 과정, 또한 인물들의 개인적인 - 가족 혹은 연인 사이, 가끔은 슬럼프나 슬럼프를 유발하는 운동선수로서는 안 좋은 습관 등 - 갈등을 극복해 과정 등을 훨씬 더 많이 본다. 그렇기에 마침내 결승에서 우승컵을 따거나, 혹은 안타깝게 패배하는 순간의 클래이막스 감을 더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윔블던>은 정반대다.

영화는 인물을 소개하는 도입 부분 약 10분이 지나면 곧바로 경기가 시작하는 윔블던 대회장으로 무대를 옮겨가 버린다. 영화의 주무대 역시 윔블던 경기장과 그 주변에 한정되어 있다. 관객은 피터 콜트가 뛰는 경기 대부분을 볼 뿐만 아니라 마지막 결승전은 꽤 긴 시간을 할애해서 보아야 한다. 제목에 충실하게도, 이 영화는 도입부분과 사족처럼 붙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온전히 윔블던 대회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단, 이 영화가 스포츠 경기 자체에 집중한다는 전략 하에 선택한 전술은, 바로 피터 콜트와 관객을 온전히 동일화시키는 과정이다.

다른 스포츠 영화들의 경우 아나운서의 시끄러운 경기 해설을 집어넣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경기에 임한 우리의 주인공 선수의 머릿속 그 자체를 다룬다. 서브를 넣을 때마다, 또 상대편에게서 공이 날아올 때마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이 전형적인 영국 남자의 얼굴을 극단으로 클로즈업함은 물론,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온갖 중얼거림과 궁시렁거림을 듣게 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스포츠영화가 극한의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의 승리, 그리고 인생에 있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우리들의 영웅’을 만들어내고, 또 관객들에게 ‘당신도 영웅이 될 수 있다’며 용기를 주는 반면, 이 영화는 오히려 우리 주변, 그리고 나 자신 속에 있는 패배자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또한 ‘우아하게 포기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의 승리는 승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아한 은퇴를 목적으로 하여 거쳐갈 수밖에 없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피터 콜트는 우리들의 영웅이라기보다 ‘우리들의 반-영웅’이다.

물론 영화관에 가서까지 비루하고 초라한 우리네 인생을 새삼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게 영화 관객들의 솔직한 심정인 법. 이를 위해 ‘로맨틱 코미디’라는 외피를 빌리면서 이 영화가 아주 유효적절하게 써먹은 전술 또 하나가 바로 ‘유머’이다.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유머들, 우리가 익히 영국산 영화들에서 보아왔던 그런 종류의 유머들이 이 영화에서는 아주 강도 높게 구사된다.

대체로 영화평론가들이 기자들이 ‘고급 유머’라고 얼렁뚱땅 말하는 영국 유머란, 미국식 직설법 유머나 화장실 유머와 다른 종류의 유머이지, 저급과 고급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 그런 유머가 아니다. 오히려 영국 유머의 본질은 이런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소심하고 어리버리하고 쫀쫀한 꽁생원이,
2)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고 그것도 헐값에 팔아먹기 직전인 상태에서,
3) 끝없이 궁시렁만 일삼다가
4) 그 와중에 있는 힘을 다해 최후의 무기로 “비아냥” 혹은 “비꼬기”라는 카드를 꺼내드는 것.

물론 비아냥의 대상엔 자기자신도 포함되어 있으니, 곧 조소와 비아냥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초라한 존재감을 어떻게든 인정하고자 하는 마지막 발악인 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국 코미디에서, 특히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이는 유머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을 고급 유머라 일컫는 건, 왠지 영국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껴도 단단히 느끼는 미국인들의 어법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영국이든 미국이든 우리에겐 어차피 외국이고 서양인데 말이다.

<윔블던>에 이 유머 코드는 아주 유효적절하고, 그 신랄함의 강도는 이제껏 보아왔던 어떤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초라한 처지를 무조건 징징대거나 애써 과장해서 불행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초연한 척 하면서 자조할 줄 아는 유머 감각은, 진정 나이가 들수록 절실히 필요하다 느껴지는 미덕이다. 초라한 자신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거랄까. 이미 인생 쓴맛을 슬슬 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습득되기도 하지만.

수많은 기사들은, 원래 피터 콜트의 역으로 휴 그랜트가 거론됐으나, 테니스 선수 역을 하기엔 그의 나이가 많아서 폴 베터니가 (대타로) 선택됐다고 쓰고 있다만 내가 보기엔 뻥이다.

이 역은 나이 들어서도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휴 그랜트형 미남이 아니라, 폴 베터니처럼 얼굴의 굴곡에 아예 인생의 쓴맛이 아로새겨져 있는 배우가 했어야 하는 역할이다. 폴 베터니 특유의 차갑고 어두운 느낌이, 또 인생의 실패 따위는 모른 채 자신만만하고 화사하기만 한 20대 열혈청춘의 매력과 만나 비로소 부드러워지는 변화, 바로 그것이, ‘로맨틱 코미디’인 <윔블던>에서 피터 콜트라는 캐릭터가 보여주어야 할 매력인 것이다.

또한 인생의 내리막길 막바지에서 (그나마 조금 나은) 마무리를 하기 위해 안쓰러운 신음소리를 연발할지언정 사력을 다 하는 그 절실한 느낌, 바로 그것이 ‘30대 루저를 응원하는’ <윔블던>에서 피터 콜트라는 인물의 본질인 것이다. 폴 베터니는 휴 그랜트의 대타로 생각하기엔 가진 매력이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물론, <기사 윌리엄>에서의 ‘벌거벗은 초오서’나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쉬의 환상 속에서만 등장하는 ‘제멋대로 룸메이트’ 같은 조연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캐릭터를 빛나게 했던 폴 베터니답게, 피터 콜트라는 인물을 너무나 생생히, 그리고 설득력있게 우리 앞에 그려낸다. (비록 그가 현실에서는 제니퍼 코넬리의 남편이자, 촉망받는 배우라는 꽤나 화려한 포지션에 있다 하더라도.)

아쉬운 건 폴 베터니와 키어스틴 던스트 간의 화학반응. 이전 <브링 잇 온>이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키어스틴 던스트는 매우 훌륭한 배우이긴 하나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씁쓸한 현실감각을 중화시키는 팬시한 매력이 있는 배우는 아니다. 두 배우간 키스씬이나 러브씬에서도 이렇다 할 낭만적인 팬시함이 느껴지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이 영화가 응원하는 30대 루저들의 절절함을 더 돋보이게 해주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마지막 결승전 경기에서, 젊디 젊은 미국인 상대 선수와 싸우면서 서브를 넣을 때마다, 공을 한 번 쳐낼 때마다 ‘헉’, ‘헉’, 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피터 콜트의 처절한 사투는, 아마도 직장이 집에서 먼 것이 유난히 힘들고, 피곤해서 화사한 날씨의 주말에도 방구석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있으며, 매일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는 듯한 기분으로 출근 지하철에 몸을 싣는 30대 관객들에게 보다 특별한 공감대를 줄 것이다. 20대 때 가졌던 야망이나 규모만큼은 웬만한 블록버스터 못지않은 스펙터클한 꿈들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루저의 정서를 온몸으로 체득해 가고 있는 30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속삭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번쯤은, 우리도 ‘반짝’하고 빛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게 찬란한 다이아몬드 같은 반짝임은 아니더라도, 그냥 봄날 어느 오후의 햇살 같은 따뜻함에 불과할지라도, 단 한번, 오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뒤이어 속삭인다.

그 빛남은 성취감이나 승리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한 장을 잘 접기 위해 필요한 거라고. 잘 포기하고 잘 정리하기 위해 필요한 거라고. 우리가 매일 중얼거리는 낯익은 레퍼토리, “나도 몸이 다 됐어”나 “그래, 죽기밖에 더하겠니” 등을 영화 내내 똑같이 읊어대고 있는 피터 콜트가 주는 용기와 위안이, 그래서 고맙다.

2 )
qsay11tem
로맨틱한 영화네여   
2007-11-26 13:18
kpop20
기사 잘 읽었습니다   
2007-05-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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