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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 작심하고 관객을 울리는 ‘신파!’를 말한다.
2005년 11월 15일 화요일 | 이지선 영화칼럼니스트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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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들이 있다. 꽃 피는 봄에는 로맨틱 코미디가 유달리 잘 팔리고, 찜통더위일수록 호러영화는 환영받는다.

울며불며 사랑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최루성드라마들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에 유난히 쏟아진다. 진부하고 구닥다리 같지만 익숙하기 이를 데 없고, 결국 눈물 찔끔 흘리게 만들고야 마는 이런 종류의 영화나 드라마들을 우리는 ‘신파’라고 부르는데, 그렇다. 바로 요즘,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드는 요즘이야말로 신파의 계절인 게다.

알다시피 최근의 극장가와 TV는 ‘신파’가 점령한 지 오래다. 온통 눈물 바람이다. 최진실의 명연기가 일품이라는 드라마 <장밋빛 인생>은 공전의 히트 속에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 중이고, <너는 내 운명>으로 시작된 극장가의 바통은 <새드무비>로 이어져 관객들의 눈물 뽑기에 성공했다.

형용모순처럼 보이지만, 울고 슬퍼하면서 사람들은 행복해 한다. 이른바 비극의 카타르시스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일까. 한껏 고조된 감정이입으로 주인공의 비극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눈물 속에서 느끼는 감정의 정화로 평안해지는 순간, 관객들은 시원한 기분으로 극장 앞을, TV 앞을 떠난다. 그리고 즐겁게 그 작품을 얘기한다.

“그 영화(드라마) 어땠어?”
“아, 그거? 엄청 울었잖아~!”


신파는 힘이 세다

‘신파(新派)극’이란 본래 창극과 현대극 사이에 등장했던 통속연극의 한 흐름, 즉 근대적 형태의 멜로드라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신파를 새로운 무엇으로 인지하는 사람은 없다. 이 시대의 신파는 고(故) 이영일 평론가의 말마따나 ‘유치하고, 우발적이며, 비합리적인 결말의 대명사’다. 더불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새롭다는 의미는 탈각되고 글자만 남았다.

이제 신파는 촌스럽고, 진부하고, 구닥다리인 무엇을 대표하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지금, ‘신파’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지금도 물론 신파는 극(드라마)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의미가 변용된 이후, 소위 ‘신파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최루유발’이라는 의미가 본격적으로 포함돼 있다.

‘대놓고 울어 보자’고 만든 드라마라는 얘기다. 이렇게 통속적이고 대중적이면서 동시에 관객으로부터 눈물을 뽑아내는 데 적극 복무하는 드라마들, 현대에는 이들을 가리켜 신파라 부른다. 때문에 ‘신파조’, ‘신파적’이라는 단어에서는 비하의 의미도 다소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신파는 여전히 강력하게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이다.

신파조의 정서를 담아내는 대표적 가요 장르 트로트는 십여 년 전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 중이며, 심지어 ‘전통가요’라는 정체불명의 별칭까지 획득한 지 오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신파는 통속적인 만큼 대중과 가까웠다.

조금 멀리 <편지>, <약속>부터 <선물>, <클래식>, <가족>을 거쳐, 바로 지난해 이맘때 극장가를 달궜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이프 온리>, <노트북> 등도 최루성 멜로, 신파의 대표주자들이다. 구닥다리니 진부하니 촌스럽니 아무리 얘기해도 결국 이 눈물범벅 드라마들은 시장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신파는, 힘이 세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앞서 말한 대로 계절이 원인일 수도 있다. 늘 가을 겨울이 돌아오기 때문에, 계절적 특성을 적어도 한 번은 등에 업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신파에 대한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무리 봐도 ‘논리적’ 접근이라고 하긴 어려운 일이다. ‘신파는 어째서 그토록 힘이 센가’를 묻고 나서 ‘날이 추워서 그래’라고 일축한다는 건, 다소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비극적 카타르시스’라는 안전장치

앞서 언급했듯이, ‘눈물, 콧물 범벅’의 신파조 드라마는 ‘비극적 카타르시스’라는 일종의 정화효과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개인에 대한 사회경제적 요구가 과중해질수록 이 정화효과의 유효성은 커지는 법이다. 직장상사와의 갈등, 뼈아픈 실연,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과도하게 짓눌린 내면의 자아가 비명을 지를 때, 누구나 한 번은 ‘어디 가서 목 놓아 울고 싶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다 들어 엎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우는 것으로 그 감정을 표출한다. 신파는 바로 이런 비명의 순간에 안전한 계기가 되어줌으로써 기능을 수행한다. 때문에 사회적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나이일수록 이러한 신파의 유효성은 더 높아진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을수록 사람들의 등에는 ‘나이 값’이라는 책임이 하나 더 주어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악극’이라는 이름을 빌어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불효자는 웁니다> <아씨> 등의 신파극이 중장년층의 대대적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을 보라. 옛 시절에 대한 향수와 함께 악극을 통해 관객이 느끼는 것은 일종의 해방이다. 질곡의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는 동안 세월과 함께 쌓여 한계점에 이른 생의 고난으로부터 아주 잠시 잠깐일지언정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 해방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생각보다 거대해서, 관객은 그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대히트를 기록한 뒤, 종영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드라마 <장밋빛 인생>의 주 시청층 역시 삶의 무게를 제법 느꼈을 중장년층 주부들이다. 이들은 드라마 속 캐릭터 ‘맹순(최진실 분)’에게 자신의 삶과 욕구를 투영한다. 바람피우는 남편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리고, 고생만하다 암으로 죽어야 할 자신이 안쓰러워 적금 깨서 무작정 쇼핑을 해대는 그녀의 모습에서, 관객은 바로 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삶에 지친 ‘아줌마’를 굴곡진 인생역정을 겪은 최진실이 온몸을 던져 연기하고 있으니 그 어찌 시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에는 그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바람쟁이 남편마저 반성과 회개 끝에 돌아와 정성스런 간호를 하고 있으니, (치정에서 순애보로의 대반전이 놀랍기는 하지만) 이쯤 되면 동년배의 관객에게 확실한 대리만족까지 제공한다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관객은 알고 있다. 현실이 드라마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집 안을 들어 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드라마 속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대반전’은 현실에서 목도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목 놓아 운 뒤에 깔끔하게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장밋빛 인생> 류의 드라마들만큼 관객에게 훌륭하고 유효적절한 안전장치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단순함 또는 순수에 대한 동경

카타르시스를 통한 대리만족 효과 외에도 신파가 사랑받는 이유는 또 있다. 다변화되고 복잡한 환경 안에 놓인 개인에게 신파드라마의 단순함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 쉽다. 대중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극적 구성에 더 많은 세심함을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드라마적 갈등의 해소라는 것은 언제나 현실보다 단순하고 단선적인 법이다.

단적으로 <너는 내 운명>의 두 주인공을 보라. <편지>, <약속> 같은 이전의 신파드라마가 사회적 배경을 완전히 탈색시킨 뒤 두 주인공의 험난한 사랑에만 초점을 두었던 것과는 달리, 2005년의 신파 <너는 내 운명>에는 주인공들이 겪어야 할 사회적 삶이 그대로 묘사된다.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을 향해 쏟아지던 플래시 세례, 그리고 사랑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었던 촌부마저 3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언론의 값싼 저널리즘, 무엇보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 없는 난공불락의 가족이라는 벽까지. <너는 내 운명>이 보여준 드라마적 깊이는 이러한 배경의 세심함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역시, <너는 내 운명>은 신파다. 배경이 섬세해진 대신, 캐릭터가 단순해졌다. 주인공들은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치 않는다. 특히 극적 감동의 한 축을 단단히 맡고 있는 농촌 총각의 캐릭터는 황정민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기에 힘입어 관객에게 순수 그 자체인 인물로 각인된다. 그는 오로지 사랑만을 보고 달리며, 그로 인해 에이즈와 사회적 편견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은 가뿐히(?) 극복된다.

누구나 어느 한 시절, 순수를 간직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겠나. 신파스럽지만 목 놓아 울기도 어려운 현실을 겪어 내다보니 무뎌지고 굳어질 뿐이다. <너는 내 운명>은 바로 그 누구나 간직했던 순수를 자극한다. 모두가 잃어가고 있어서 이제는 예스러운 것이 돼 버린 순수라는 감정, 그리고 바로 그에 대한 동경이 보다 쉬운 감정이입을 창출해낸다. 이것은 최근 몇 년간 세를 늦춘 적이 없었던 복고주의의 유행과도 일맥상통한다.

주인공의 역경과 고난, 그리고 그 극복과 해소의 과정에서 관객은 당연히 카타르시스와 함께 대리만족을 경험하게 되며, 동시에 순수에 대한 동경욕구까지 해소하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것, 누구나 한 번은 가졌음직한 감정에 대한 반복적 묘사와 자극이 지금까지 오래도록 신파를 대중 속에서 자리하게 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신파는 진화한다

“신파는 패배만 거듭하는 한국 서민의 변형된 저항의 형태이며 마조히즘에 의한 자기해방의 수단이다.”
- 고(故) 이영일, ‘영화와 현대사회-전후 한국영화의 20년에 부쳐’, <영화예술>

신파를 가리켜 ‘유치하고, 우발적이며, 비합리적인 결말의 대명사’라고 말했던 고(故) 이영일 평론가의 분석이다. 수십 년 전의 것이기는 하나 그의 분석틀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패배적 환경 하에서 지친 대중이 변형된 저항이자 마조히즘적 자기해방의 행위로 ‘눈물’이라는 지극히 소극적 액션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지극히 억압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소시민들이 가질 수 있었던 선택지가 다양하지 못했듯이, 경제적 불황이 반복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 역시 대중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반경 역시 그리 넓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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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시대와 세기가 바뀌었다는 2005년에도 대중의 선택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다소 보수적 정서를 유발할지언정, 촌스럽고 진부해 결과가 빤히 보일지언정, 관객은 여전히 냉혹한 현실의 무게를 잠시라도 내려놓기 위해 눈물의 판타지를 선택하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선택은, 추워진 날씨에 옆구리 시린 개인들이 보다 따뜻한 것을 찾다보니 생겨난 일종의 유행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으며, 일부의 지적처럼 ‘냉소적 개인주의 문화의 하향세와 따뜻하고 인간적인 문화에 대한 갈증’이 낳은 결과일 수도 있다.

또 사회경제적 압박이 거세지면서 더욱 강해진 안전장치에 대한 요구가 신파에 대한 강력한 욕구로 드러난 것일 수도 있으려니와, 복고문화의 유행과 함께 예스러운 것, 한때 누구나 가졌으나 현재에는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한 향수와 반작용으로써 순수에 대한 집착과 동경이 부풀려지고, 그로 인해 발생한 집단적 지향이 신파드라마의 인기라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두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원인이건 간에 다행인 것은, 대중에 의해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는 이 ‘유치하고 우발적이며 비합리적인’ 통속적 판타지가 (아주 더디지만) 조금씩 변화하면서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씨>의 별당아씨가 눈물 바람 속에 인고의 세월을 견뎠던 것과 달리 <장밋빛 인생>의 아줌마는 남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악다구니를 쓸 줄 안다.

<편지>나 <약속>의 주인공들이 사랑의 비극성 앞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었던 것과는 달리, <너는 내 운명>의 주인공들은 투쟁에 가까운 과정 끝에 자신들의 사랑을 기어이 지켜낸다. 이들 변화한 신파가 드러내는 통속적 판타지는 분명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시대의 변화를 조금씩이라도 반영하고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진화하고 있다는 것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파는 진부하다. 구닥다리이며, 촌스럽다. 통속적이고 또한 보수적이다. 그러나 신파도 변화하고 있다. <봉선화 연정>이 <어머나!>로 변화했듯이, <아씨>가 <장밋빛 인생>으로 달라졌듯이, 신파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것이 여전히 우리가 신파를 즐길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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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say11tem
가슴아픈 영화네여   
2007-11-25 12:55
loop1434
신파라도 설득력있다면 관객을 울릴수있다   
2007-08-31 12:21
kpop20
관객을 울리는 신파   
2007-05-17 11:50
googoo
신파라는 말을 그냥 스치듯 알고 있었는데 많은 도움됐습니다.   
2005-11-1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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