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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의 실미도-'실미도'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4년 1월 12일 월요일 | 이해경 이메일

이현세의 장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읽으셨나요? 한때는 그 만화 모르면 간첩이었죠. 저의 이십대를 지탱해 준 몇 가지 버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인공 오혜성의 이미지를 닮아 보겠다고 까치 머리에 청자켓에다, 군대 갔다 와서는 군용 잠바 검게 물들여서 입고 다니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만화, 영화로도 만들어졌죠. 영화는 영 아니었습니다. 일단 야구 장면이 애들 장난 같으니까요. 전적으로 이장호 감독의 책임입니다. 제목도 아예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라고 붙였으니 할 말 없지요.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실미도>는 어떤가요? 관객들의 반응이 뜨겁다죠. 감동 일색이랍니다.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도 많고, 제가 들어가 있던 영화관에서도 끝날 때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있었습니다. 역시 전적으로 강우석 감독의 책임이지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관객의 호응을 놓고 감독의 ‘책임’을 운운하다니… 예, 저는 이 영화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실미도>는, 제목을 <강우석의 실미도>라고 고쳐도 좋을 만큼 표나게 감독을 드러내는 영화라는 거지요. 그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드러난 감독의 자리가 어디이며, 그래서 잡히는 감독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것을 감독의 자유라 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까닭은, 그가 하필이면 ‘실미도’를 소재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어떤 선택에는 그에 걸맞는 책임이 따르지요. 영화 속에서 실미도 684부대의 대장은 어떠했나요? 그가 자기 몫의 책임 앞에서 보인 자세는 어떤 것이었나요?

잠깐 숨을 돌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실미도>의 대장 역을 맡은 배우 안성기가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서도 상응하는 인물인 손병호 감독으로 나오는군요. 그게 연상의 고리였을까요? 영화 <실미도>를 보고 나서 문득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떠오른 것은… 그렇죠, 영화에 나오는 ‘지옥훈련’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용어를 유행시킨 원조가 <공포의 외인구단>이잖아요. 그런데 만화 <…외인구단>의 지옥훈련은 저를 작품 속의 세계로 더욱 몰입시켰음에 반해, 영화 <실미도>를 보다가 섬에서의 훈련 장면이 시작되면서부터 저는 영화를 보기가 불편해졌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실미도>의 교육대장과 <…외인구단>의 손감독은 다른 게 뭘까요?

불후의 명작 만화를 자꾸 들먹일 것도 없이, 혹독한 수련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널려 있습니다. 잘 보여주면 그만한 재미도 드물지요. 육체와 정신의 단련을 통한 강한 존재로의 변화. 거부하기 힘든 매력 아닙니까? <실미도>를 보면서도 그 재미에 빠질 뻔했으니까요. 빠질 뻔했는데,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이 영화는 이렇게 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이미 알고 있어서였을까요? 그래서 애통한 마음에 쉽사리 재미에 빠질 수 없었다? 아니죠. 그 반대입니다. 이건 완전히 코미디잖아, 제 반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임원희가 간간이 웃겨서가 아니라, 영화 속의 상황이 통째로 그랬던 거죠. 어땠냐 하면요…

남북의 두 독재자가 서로의 목을 따기 위해 특수한 부대를 창설합니다. 먼저 만든 쪽은 나쁘고 나중에 만든 쪽은 정의롭습니까? 따라 하는 꼴이 더 우습죠. 부대원 숫자까지 똑같이 맞추는 발상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결정을 진지하게 내리고 앉아 있었을 최고 권력자와 그 똘마니들을 떠올리면 웃겨서 기도 안 찹니다. 웃기는 질문을 하나 더 던져 보죠. 그 짓을 실행에 옮겼다가 실패한 쪽이 나은가요, 아니면 실패도 못 해보고 때려치운 쪽이 낫나요? 무심코 앞의 것이 여한이라도 없다는 식으로 답했다가는 큰일나지요. 친북좌파로 몰려서요? 아니죠. 극우적인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뒤의 것이 그나마 다행 아니냐는 답이 그나마 사리에 맞을 텐데, 그건 또 얼마나 희극적입니까? 돌격! 해 놓고는 이 산이 아닌가벼… 그런데 혹시, 그래도 그만뒀으니 다행이라는 최소한의 판단조차 영화를 보고 나면 좀 흐릿해지지 않나요? 그 얘기는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요…

요컨대 실미도의 비극은 코미디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허구로 창작된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에 그 희극적인 효과는 더합니다. 이럴 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는 표현이 통용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허허 웃어야 할까요? 수십 명의 고통스런 삶과 허망한 죽음 앞에서 웃어 넘기자고 한다면 미친놈이죠. 저는 실미도의 불행이 정말 지랄같이 처절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우스꽝스러움과 슬픔과 광기가 뒤범벅된 역사의 아수라장이지요. 한마디로 아이러니…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어떤 인물에든 동화되든가 적어도 호감을 느끼면서 얻게 되는 종류의 재미에는 빠질 수가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느꼈고, 그렇다면 아이러니… 그렇습니다. ‘실미도’에 딱 들어맞는 접근 태도는, 필요한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긴장 속에 포착되는 균열의 흔적, 이른바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 터무니없는 상황에 의해 좌우되는 개인들의 운명, 그리고 그 결정의 계기마다 작용하는 권력의 음험하고도 무식한 횡포, 그래서 ‘실미도’를 이제 와서 들추며 느껴야 할 슬픔이나 분노는 그토록 차가운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영화를 보면서 했겠어요? 다 나중에 정리된 생각들이고, 영화는 관객에게 다른 태도를 요구하며 숨가쁘게 넘어가잖아요.

그랬어요. 강우석 감독은 상황의 아이러니보다 인물의 휴머니티에 더 큰 비중을 뒀습니다. 거기까지는 시비 걸 게 못 되죠.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죠. 강우석의 <실미도>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류의 유사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소수의 관객들하고만 소통 가능한 얼치기 예술 영화는 더욱 아니고, 꽤 많은 예산이 들어간 한국형 블록버스터, 흥행에 성공해야만 하는 알짜배기 상업 영화니까요.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감독이 해야 할 일은 다 해야지요. 그 부분에서 강우석의 탁월함은 인정 받아 마땅합니다. 이 영화를 일부러 촌스럽게 찍었다지요. 잘 한 겁니다. ‘실미도’에 어울려요. 세련된 영상으로 가져갔다면 도리어 썰렁했을걸요. 인간들이 모이면 어디에나 정이 싹트고, 반목과 갈등 속에서도 기어코 정으로 뭉치고야 말고, 사선을 함께 넘나들기에 그 정은 더욱 돈독해지고, 살벌하게 돈독해지고, 그렇게 최대한으로 남성적인 내용의 투박함이, 적절하게 촌스러운 화면에 담겨 관객을 몰아갑니다. 그것이 관객 몰이의 진수임이 입증되고 있잖아요. 문제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다가 그 섬에 그들이 왜 모여 있는지조차 아예 잊어버릴 수만 있게 해 준다면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정치와는 거리가 먼 오락이기만 할 수 있다면요. 하지만 <실미도>가 그럴 수는 없잖아요. 지독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한 얘기를 이어가 볼까요. 강우석 감독이 설마 그들이 북으로 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큰일날 생각이에요. 그런데 영화는 왜 자꾸 그들의 북파가 취소된 것을 문제 삼는 것처럼 오해를 사죠? 저는 강우석 감독이 국가를 빙자한 독재 권력의 만행을 비판하고자 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왜 684부대를 창설한 결정에 대해서는 별 시비 없이 그냥 넘어가죠? 일관성이 없기로는 영화나 영화 속의 국가나 매한가지군요. 그랬다가 부대를 정리한다는 결정에 대해서만 눈을 부릅뜨고 덤비는 걸 보면요. 감독이 후자만 나쁘고 전자는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리는 없을 텐데요. 이런 차이는 있겠죠. 전자는 어쨌든 일단 죽을 사람들을 살린 결정이었고 후자는 그 사람들을 죽이라는 결정이었다… 아, 이제야 알겠네요. 그러니까 감독은 부대원들을 정말로 사랑한 거로군요. 자기 영화의 주인공들이니까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어서, 국가의 탈을 쓴 권력이 그들을 죽이려 하니까 꼭지가 돌아서… 제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참.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좀더 계속하겠습니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얘기로 이어질 수도 있거든요. 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아무리 부대원들을 살리고 싶어도 방법은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우선 그것까지 허구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영화 내용에 따르면, 설령 북으로 보냈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생환한들 그들은 죽을 목숨이었다니… 그러니까 영화가 그들의 편에 서서 유독 작전 취소에 따른 비정한 결정에만 비판을 집중했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지만, 감독이 설마 그들이 북에 가서 죽거나 갔다 와서 죽는 것은 개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누굴까요? 감독이 가장 애정을 갖고 입장을 살려 주고 싶었던 인물은? 그 정도 짐작은 어려운 게 아니죠. 어떤 인물이 <실미도>라는 영화의 중심에 서 있습니까? 그 자리 근처가 바로 감독 강우석의 자리가 되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감독이 평소에 갖고 있던 정치 의식과는 상관 없이,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곧 ‘실미도’를 향한 영화의 시선이 되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실미도 684부대의 부대장. 그가 그 부대의 창설에 이의를 제기할 리는 없습니다. 이미 명령에 복종해서 부대를 직접 꾸렸고, 그에게는 김일성 암살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사형수를 비롯한 세상의 낙오자들이 자신의 손에 의해 최정예 인간 병기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전율하며 지켜보았을 겁니다. 그들을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믿었겠지요. 그런데 그들의 희망이 자신의 것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급기야는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죽여야 하는 처지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그때서야 그는 느닷없이 국가와 권력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중앙정보부가 국가냐고 대들 수 있었을까요? 그가 자꾸 멋있게 나오면 헷갈리는 사람은 관객입니다. 지금도 평양의 주석궁을 탱크로 밀어버리는 통일을 꿈꾸는 일부 정신 나간 사람들이야 논외로 치고, 단지 헷갈리는 게 싫은 많은 관객들은 강직한 매력을 뿜어내는 부대장에게 동화되는 쪽을 택하는 게 편할 테죠. 그러자 평화 통일이라는 미명 하에 소중한 인명의 몰살을 명하는 권력의 하수인만 죽일 놈으로 보이고, 급기야 부대장이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온몸을 휘감아오는 비장감 속에서, 나라면 저런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부대장의 자살은 강우석 감독의 선택입니다. 영화적인 선택일 뿐만 아니라 가상의 실존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제 추측이 아니라 감독이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부분을 무척 고민했고, 결국 ‘나’라면 그렇게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부대장이 사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드라마를 원하는 감독으로서는 성에 안 차는 최후였을까요? 아무튼 강우석은 부대장의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이 글에서 일찌감치 던져 놓았던 한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가 자기 몫의 책임 앞에서 보인 자세는 어떤 것이었나요?’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은, 영화에서 684부대원들에게는 애초에 살 길이 없었다는 것을 대장이 모르고 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부하 교관도 알고 있는데 그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렇다면 그의 비통한 자살은 좀 넌센스 아닙니까? 부대 창설의 공모자나 적어도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음흉한 계략이 있었다면 원래부터 그 몹쓸 흉계에 가담했다고 봐야 할 그가, 새삼스레 분개하고 무력감에 치를 떨다 못해 죽기로 작정한다는 것은 좀 어리둥절하지 않은가요? 그게 군인정신입니까? 아니면 그새 그토록 정이 들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싶었던 거라고 헤아려줘야 하나요? 감독은 자신이라면 그랬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지만, 저는 그 부대장이 강우석만큼 의리에 죽고 사는 인물이었을 개연성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보는데요. 실제로든 영화적인 허구로든 말입니다. 인간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시 상황의 문제인 거죠.

부대원들의 생명은 처음부터 그의 책임 밖에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강우석의 부대장은 설경구에게 물 떠 오라고 시키는 멋을 부리며, 그렇게 고의로 자기 몫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는 부대원들의 것과 똑같이 소중한 기간병들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부대장이 철통 같은 보안을 유지하며 부대원 몰살 작전을 벌여 기간병들이라도 살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강우석 감독에게는 비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누구도 그 부분에 대해 뭐라고 주장할 수 없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정리하겠습니다. 강우석의 <실미도>는 실화를 소재로 삼아 드라마를 만들어냈습니다. 흔히들 하는 작업입니다. 감독은 관객에게 거리를 두지 말고 영화에 뛰어들 것을 요구합니다. 흥행을 위해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관객에게만 뛰어들라고 해놓고 자기는 밖에서 팔짱 끼고 서성일 수가 있습니까. 감독도 영화 속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오니까 상황 전체의 아이러니는 안 보이고 매력적인 한 인물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감독은 영화 속을 두루두루 거니는 척하지만, 결국은 대장 곁에 붙어 있는 게 편한가 봅니다. 그래도 참았어야 하는데 그 인물을 부각시키고 싶은 욕망을 어찌할 수 없었을까요? 여기서 <실미도>의 딜레마는 발생합니다. 이 영화가 정치적이지 않을 도리는 없다고 했죠. 그런데 감독은 ‘정치 영화’를 포기하고, 의리와 배신과 분노와 비극이 교차하는 감동의 휴먼 드라마로 나아갑니다. 상업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죠. 하지만 포기한다고 간단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포기’라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등한시했다고 고쳐도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실미도>가 정치적이지 않을 도리는 없기 때문에, 감독의 정치 의식이 무뎌지는 틈을 타서 이상한 정치적 쓰레기가 영화 속으로 침투해 냄새를 피웁니다. 그것은 지난 세기의 유물로 버리고 가야 할 고약한 이데올로기의 썩은 냄새입니다. 그 냄새를 원래 좋아해서 실컷 맡는 사람도 있겠지만, 좋아하지 않는데도 냄새에 취하게 된다면 문제입니다. 그 많은 관객들이 그 냄새를 원래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으므로,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데 냄새 나는 줄도 모르고 취하게 되는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한국 영화계의 거물인 강우석 감독의 정치 의식이 원래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영화에서는? 아마도 멋진 대장의 이미지에 먼저 홀려 악취에 둔감해지는 까닭이겠지요. 그래서 관객도 모르고 감독도 모른 채… 문제는 그 냄새가 긍정적이고 매력적으로 그려진 인물에게서 나오게 만든 감독의 실수라고 해 두지요.

모르고 한 실수였다고 보는 쪽이 희망적입니다. 다만 순수하게, 31인의 억울한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보는 사람들도 그 충정을 십분 이해하는 가운데 감동의 눈물과 박수로 화답했다, 그렇게 보는 편이 마음 편합니다. 그렇게 이 영화의 정치성을 거세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역시 강우석 감독이 우뚝 서 있는 게지요. <공공의 적>에서도 집요하게 추구되는 남성 판타지, 그 남자다움의 거친 공격성 그리고 부드러움의 허위에 대한 편파적인 혐오감이 쌍권총으로 들려 있는 게지요. 조중사와 박중사의 대립이야말로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또 하나의 중요한 자기만의 진실 아니겠어요? 그 두 인물을 향한 감독의 시선이야말로 무지하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대목까지 자세히 얘기하기에는 제가 지금 너무 지쳐 있습니다. 글이 길어져도 너무 길어졌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이나 보신 분들에게, 이 영화를 <실미도>가 아닌 <강우석의 실미도>로 보시거나 되새겨 보시기를 간곡히 권합니다. 그것이 강우석 감독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태도라고 믿습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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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1017
우리의 아픈 시대를 다시 한번 보게 해준 아주 고마운 영화...   
2010-03-16 16:08
apfl529
ㅍ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1
qsay11tem
슬픔이 느껴지는 영화에요   
2007-11-27 13:22
kpop20
친구는 봤다던데...   
2007-05-18 23:15
imgold
그냥..재미는 있었지만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칠만큼의 큰 감동은 없었는데..   
2005-02-0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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