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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유쾌한 그들만의 우주
제이 앤 사일런트 밥 | 2003년 3월 29일 토요일 | 임지은 이메일

영화에 얽힌 개인적인 기억 하나. 나는 상영일정을 줄줄 꿰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에너제틱한 영화광은 절대로 못되는 인간이지만, <제이 앤 사일런트 밥>에 한해서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우리 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사람에 든다고 자부하고 있다. 영화의 (믿을 수 없는) 개봉 소식을 듣고 환호작약 서울 압구정동의 모 극장으로 달려갔을 때 극장에는 나와 내 친구를 포함, 단 두 명뿐이었다. 원래 시끄럽게 영화 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처자들이다 보니 이거야 완전히 내 세상이다.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그야말로 광란의 순간을 만끽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자 웬 아저씨 한 분이 오셔서 "재밌었냐"며 측은한 듯한 눈길로 보더니 귀염둥이 제이와 밥이 노닐고 있는 영화의 스틸 사진을 한 꾸러미 주셨다. 기자 자격으로 간 것도 아니고 그냥 놀러 갔을 뿐인데. 영화는 4일인가 5일 건 후 바로 간판을 내렸다.

개인적인 경험 둘. <제이 앤 사일런트 밥>이 비디오로 출시되던 무렵 본인은 비디오대여점의 심야알바생으로 분투하고 있었다. 밤의 비디오가게란 특히 손님이 없을 때는 마치 세상의 끝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라, 그럴 때 외로운 알바생은 자주 이 영화를 데크에 넣고 플레이 스위치를 눌렀다. 그걸 보면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헤헤거리고 있노라면 가끔 들어서는 손님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그건 이전 극장 아저씨의 눈길과 아주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따위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늘어놓았냐, 그냥 입이 심심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죄송합니다) 관객에게 와닿는 이 영화의 의미라는 것이 다분히 개인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방과 후, 혹은 퇴근 후에 동네 꼬치집에서 배꼽친구와 편하게 널부러져 있는 듯한 종류의 감흥이란 말이다.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으며 낄낄대는 우리 자신들이야 더없이 흥겹지만, 옆에서 그걸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가끔, 아니 매우 자주 그것이 한심하게 비친다. 그리고 이 영화를 친구에 비유할 수 있는 이유 또 한 가지. 친구와 시시껍절한 개인사를 늘어놓는 그 순간에 특별히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소개할 필요는 없다. "저는 서울에 사는 이십대 중반의 처녀애로써 음식 솜씨가 제법 얌전하고 귀염성도 있으나 흠이라면 주사가 좀 있는 편입니다" 따위의 말은 생략해버리고 "아 쓰바. 나 또 술 먹고 한 건 했어." 한 마디면 되는 거란 말이다. you know what i'm saying?

그러나, 아무리 가족보다 더 친숙하고 편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둘 사이에는 엄연한 역사가 존재한다.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며 쌓아온 베이스가 존재하기에 척하면 척, 일사천리로 팍팍! 통할 수 있는 거 아니냔 말이다. <제이 앤 사일런트 밥>이 '개인적'이라고 말한 데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숨어있다. 더없이 편하고, 시시하고, 아무 생각 없이 멍청히 웃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모종의 학습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 이 어느 별에서 오셨는지 모를 영화와 나 사이에는.

우선 정해진 수순대로 간략한 줄거리부터 소개.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수다스런 제이와 아주아주 극도로 중요한 말 외에는 웬만하면 굳게 입을 다무는 사일런트(벙어리) 밥은 편의점 앞에서 죽치고 서서 음담패설을 지껄여대며 마약을 파는 껄렁쇠들이다. 그러다가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블런트맨과 크로닉(번역하면 띨띨이와 중독자, 정도?)'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헐리우드로 향한다. 주제에 명예에 살고 죽는 이 친구들, 인터넷에서 "이 또라이 자식들 얘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재수 없다. 제이와 사일런트 밥 죽어버려라" 하는 식으로 신나게 자신들을 씹어대는 걸 목격하자 나름 빡도신 게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명성(이란 게 있었나 당최)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긴 떠났는데, 중간에 섹시한 4인조 다이아몬드 도둑을 만나고, 예기치 않게 원숭이를 훔치게 되면서 일은 사정없이 꼬여들기만 한다. 이런 어떤 줄거리... 설명했지만 하는 나도 괴롭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다 까놓고 말해서 실상 줄거리라 할 만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는 지구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그 안에는 아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소소한, 그러나 골때리는 재미들이 가득 흘러 넘친다.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간략한 배경지식 몇 가지를 소개한다. 감독 케빈 스미스는 자신이 일하던 편의점을 배경으로 동네 친구들을 출연시켜 찍은 흑백영화 <점원들>로 1994년 선댄스와 칸에서 수상함으로써 일약 독립영화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 전작과 함께 일명 뉴저지 삼부작으로 불리는 <몰래츠>(우리 나라에서는 <섀넌 도허티의 몰래츠>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와 <체이싱 아미>를 내놓았는데, <몰래츠>의 경우 관객과 평단의 혹평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 후에 보여준 <체이싱 아미>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여전히 재기 있게, 그러나 밀도 있게 다룬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그 후 선보인 작품이 종교계의 열렬한 반발을 이끌어낸 발칙한 영화(하느님이 여자(그것도 앨라니스 모리셋)이고 예수와 성경에 나오지 않은 예수의 13번째 사도가 흑인인 것으로 설정되어있다) <도그마>. <제이 앤 사일런트 밥>은 이 네 편의 영화에 모두 출연하는-그리고 어슬렁대면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결정적인 역할들을 담당하는- 제이와 밥을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뉴저지 시리즈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없이 중력에 순응한 듯한 넉넉한 몸매의 밥은 바로 감독 케빈 스미스 자신이다.

그리하여 그간 그의 작품에 출연했던 모든 캐릭터들이 껄렁껄렁 얼굴을 내미는 이 '완결판'은 <스타워즈>, <조스>, 스탠 리(<헐크>, <스파이더맨>)의 만화들, 존 휴즈 영화, < ET >를 비롯한 감독이 유년시절부터 열광했던 대상들에 대한 패러디와 오마주로 넘실거린다. 따라서 전작을 전부 보지 않는다면 당최 영화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 제이슨 리가 왜 초반에서는 브로디(<몰래츠>)로 등장해 제이와 밥에게 충고를 던지다가 갑자기 눈 가리고 아웅하듯 수염을 붙이고 뱅키(<체이싱 아미>) 행세를 하는지, 벤 에플렉은 왜 <체이싱 아미>의 만화가 홀든-그러나 그 와중에도 "<굿윌헌팅> 영화는 별루지만 벤 에플렉은 죽이지 않냐"면서 능청을 떤다-이었다가, 헐리우드에서는 또 벤 에플렉 그 자신(!)이 되어 <굿윌헌팅2 >를 찍고 있는지, 또 그가 "레즈비언이랑 사귀던 때가 그리워" 운운하는 건 또 무슨 뜻인지 <체이싱 아미>를 비롯한 뉴저지 연작들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혀 감도 잡히지 않고, 따라서 짜증스러워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이 시끌벅적하고 시시하고, 별볼일 없지만 재기 넘치는 친구들을 사랑하는 적잖은 사람들에게 작품성 같은 것과는 별개로 <제이 앤 사일런트 밥>은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될 법하다. 그간 일련의 '뉴저지연작시리즈'에서 정들대로 든 얼굴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기쁨에 비하면 입 딱 벌어지게 화려한 카메오들은 오히려 뒷전.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연장면은 더 이상 제이와 밥이라는 이름으로는 만나볼 수 없는 두 사람의 멋들어진 작별인사인 거다. 아아 귀염둥이 제이, 귀염둥이 밥(<연애소설>의 손예진 노래부르는 포즈로). 이들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울어버릴 것 같아. 방심할 일이 아니다. 당신도 나처럼 될 수 있다. 저 케빈 스미스 유니버스의 문을 두드리기만 한다면.




[특집 부록(...이런 거 누가 받고 싶겠냐!)]:
영화에 나온 주목할 만한 수다들, 그리고 팁 몇 가지.

1. 맷 데이먼(맷 데이먼 자신으로 출연)과 벤 에플렉(역시 벤 에플렉으로 출연)은 <굿윌헌팅 2 >를 찍는 촬영장에서 서로를 깎아내리며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인다. (*팁: 케빈 스미스는 <굿 윌 헌팅>의 공동제작자이기도 하다)
맷: "야, '바운스'보이. <바운스> 찍고 고른 게 겨우 이거냐? <도그마>-벤 에플렉과 맷 데이먼이 타락천사로 분한 케빈스미스의 전작-처럼 망하려고 작정을 했군."
벤: "그러는 넌 말 타고 골프 치면서 게이 영화나 찍지 그러냐(<리플리>를 비꼼). 그게 딱이라니까."
맷: "이봐 이봐, <포스 오브 네이춰>에 누가 나왔더라?"
벤: "쓰바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지금도 감독(*팁: <제이...>의 케빈 스미스를 지칭함. 그들은 막역한 친구사이다)이 친구라서 이딴 거 찍구 있잖아!" (갑자기 에플렉과 데이먼, 카메라-정확히는 그들이 말하는 '이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를 응시한다) 다 그런 거라구.
맷: 그렇지. 이따금 <레인디어 게임>(아시다시피 벤 에플렉 주연의 스릴러)도 찍어야 하고 뭐 그렇겠지. (이죽대는 맷과 다소 상처받은 듯한 벤. 그러다 벤 에플렉은 감독에게 "구스!(역시 구스 반 산트 그 자신이다) 액션 들어가요?"라고 묻지만 돈뭉치를 세는 데 여념이 없는 감독이 던지는 말은 단 한 마디. "바빠!" 에플렉, 체념한 듯한 얼굴로 중얼댄다. "정말 대단한 예술가시군요.")

2. 자신들의 영화가 '미라맥스'에서 제작된다는 얘기를 들은 제이, 의아한 얼굴로 브로디에게 묻는다.
제이: "미라맥스는 예술영화만 찍어. <피아노>, <크라잉 게임>...."
브로디: "걔들도 <쉬즈 올댓> 이후로 볼장 다 봤어." (*팁: <제이 앤 사일런트 밥>의 제작사는 미라맥스다)

3. 제이와 밥이 스튜디오를 헤매다 들어가게 된 곳은 <스크림>의 촬영장. (*팁: 스크림 시리즈에는 제이와 밥이 카메오 출연한 적 있다) 실제로 메가폰을 잡고 있는 것은 '진짜' 웨스 크레이븐이고 섀넌 도허티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해 "퍽킹 미라맥스!"를 외친다. (*팁: 섀넌 도허티는 케빈 스미스의 두 번째 영화 <몰래츠>에 출연했었다)

4. <스타워즈>에 대한 오마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영화에는 '루크 스카이워커'로 분했던 마크 해밀과 '레아 공주' 캐리 피셔가 실제로 출연한다. 무슨 역으로 출연하는지는.... 봐야 안다.

여기까지. 너무 길었죠? 헥헥.

1 )
ejin4rang
재미있고 유쾌하다   
2008-10-16 14:5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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