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가학과 피학의 정반합, 그것도 인간이다 (오락성 6 작품성 9)
안티크라이스트 | 2011년 4월 11일 월요일 | 민용준 이메일

안티크라이스트 일명 적그리스도, 이 불경한 언어를 제목으로 내건 <안티크라이스트>에는 불순한 기운이 그득하다. <파리넬리>를 통해서 유명해진, 바로크 작곡가 프레데릭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2막에서 등장하는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도입부는 강렬한 성애에 빠진 두 남녀의 섹스를 유려한 고속촬영의 방식으로 포착한 뒤, 투명한 흑백의 색감으로 유려하게 담아낸다. 그 욕망이 절정의 쾌락으로 분열되는 오르가슴의 찰나를 공유한 부부는 동시간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삶의 균열로 빠져든다. 극렬한 성욕 속에서 어린 아들의 죽음을 방치하게 된 부부의 일상은 점차 우울과 무기력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광기로 침전돼 간다.

입구와 출구 역할을 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4장의 단락으로 구성된 영화의 서사는 음울한 분위기를 밑천으로 삼아 점차 흉악한 분위기로 발전돼 나간다.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점차 비이성적인 광기로 뻗어나가는 아내(샬롯 갱스부르)의 행위와 이를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남편(윌렘 데포)의 관계는 행위자와 관찰자의 단계를 넘어 가학과 피학의 상대자로 진화한다. 이는 성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상대에 대한, 혹은 스스로에 대한 파괴적 희열을 느끼는 새디즘과 매조히즘의 대비적인 양상까지 맞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가학과 피학의 대비적 상징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이성적인 (척 하지만 실상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남성과 비이성적인 광기로 물들어가는 여성의 대비를 통해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은유로 가 닿는다.

‘자연은 악마의 교회’라 일컫는 <안티크라이스트>는 종교모독이라는 주제를 건드릴만한 요소로 치장돼 있으나 이를 단순히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겨냥이라 국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신앙에 가까운 인간의 이성적 신념이 무지한 광기로 변질되는 과정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자 상징과 은유를 동원한 독설에 가깝다. 11세기 중세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 시절의 광기 어린 역사를 배경으로 둔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가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성을 무기로 둔 한 남성이 피라미드를 그려나가며 여성의 비이성적인 행위를 악마적인 본성과 연결해나가는 과정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둘러싼 광기의 매커니즘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남성성의 기득권으로 무장한 사회 전반에 대한 공격적인 은유처럼 보인다. 특히 에필로그로 명명된 엔딩 시퀀스는 이런 영화적 메타포를 블랙코미디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포르노 배우를 대역으로 삼아 촬영했다는) 성기 노출과 삽입 신을 비롯해서 (언론시사회에서는 공개됐지만 정식 상영본에서는 삭제된다는) 여성의 성기 절단을 비롯한 극악한 신체 훼손 신 등, 당신의 자극적 역치를 시험에 들게 할만한 몇몇 장면이 존재하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단순히 극악무도한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라 폄하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성의 껍데기가 벗겨진 채 쾌락과 생존이라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남겨진 남녀의 끔찍한 양상을 묘사하는 과정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힘의 본질과 이성적 무기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성적 행위를 비롯한 폭력의 상응까지, 극단적인 광기와 함께 가학과 피학의 매커니즘에 갇힌 남녀의 양태를 묘사하는 영화는 문명과 이성이라는 제어로부터 발가벗겨진 인간의 본질이 이토록 손쉽게 파괴될 수 있는 나약한 것임을 강렬하게 조명한다. 광기란 결국 순수한 극단의 소산이다. 정이든, 반이든, 가학과 피학은 어떤 식으로든 합의 광기로 통하게 돼있다. 그것이, 아니, 그것도 결국 인간이다.

2011년 4월 11일 월요일 | 글_민용준 beyond 기자(무비스트)    




-이토록 문제적인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대단한 문제작.
-과감함을 넘어선 강렬함, 샬롯 갱스부르와 윌렘 데포의 살 떨리는 열연.
-자극적인 이미지는 강렬한 성찰을 위한 고문적인 충격에 불과하다.
-단순한 고문 포르노 정도로 인식할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다
-악마적인 악취미로 여길 만한, 눈 뜨고 볼 수 없지만 감을 수도 없는 몇몇 광경들
-오, 주여! (라스 폰 트리에를 회개시키고 싶다는 여의도동 조 모 목사님의 한 줄 평)
-자르는 그 장면이 궁금했는데 그 장면이 잘렸다니.
6 )
pontain
뭘 자르는 장면이 궁금하다고 기자 자신이 밝혔죠.

결국은 잔혹성과 음란성에 눈이 가면서도 반 기독교적 상징이라고
"여겨질 만한" 몇 장면가지고 단순한 고문 포르노가 아니라고 우기는
기자..

정신병원에 가면 자해를 일삼는 환자들이 많은데 그걸로 다큐찍으면
또 뭐라고 칭찬할지..   
2011-04-15 19:58
mannerluck
pontain님... 무슨 소릴 하시는지...

저는 님의 그런 모습이 평론가들의 모습보다 더 아는체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평론가들이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라니... 논리적비약이 너무 강하셔요...

님이 더 아는체 하는 사람으로 보여요...ㅠ.ㅠ   
2011-04-15 09:09
pontain
평론가들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심리적 분석 어떠니하며 아는 체 할 수 있거든요..

그냥 쉽게 트리에의 정신질환이 악화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보는 평론가들은
없을까요?

 너무 싱거워서 맘에 안 드나?   
2011-04-14 22:08
bsbmajor
저는 민용준 기자의 말에 공감하는데ㅋ 작품성 9를 줘도 논란이 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우선 이 작품이 호불호가 많이 갈리고 안좋다는 의견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평론가중에 호의적인 평을 쓴 사람이 많이 있더라구요^^ 대표적으로 이동진 평론가가 걸작이라고 극찬하였죠^^   
2011-04-14 13:03
nooree123
분명 영상적으로 봤을때 특출한 작품임에는 틀림 없고 인간의 본성과 성적 파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인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해외 언론,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언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메시지 자체가 매우 난해하며 남성의 권위주의를 이런식으로까지 그로테스크하게 묘사 해야 했었나 하는 의문점도 든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영화의 새디스트, 마조키스트 적인 묘사는 분명 도를 지나쳤으며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페티쉬즘(fetishism)과 같은 정신병자적 성향이 더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노골적인 것을 넘오 병적으로 보여지는 성적 장면들을 하나의 "예술"로 풀이하는 감독이나 기자를 난 이해하기 힘들다. 기본 메시지가 일단 공감대를 사기 어려우며 영상은 아름답지만 병적인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이 작품에 9점이나 줬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황당할따름   
2011-04-14 10:25
pontain
라스 폰 트리에라는 정신질환자 감독에게 낚여버린 민용준기자..   
2011-04-12 20:56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