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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아메리칸
달콤쌉싸름한 사랑의 소묘 | 2003년 11월 20일 목요일 | 심수진 이메일

. ‘야한 속옷은 남자를 유혹하는 법이지!’
. ‘야한 속옷은 남자를 유혹하는 법이지!’
‘짙은 눈썹에 검정색(혹은 갈색) 눈동자가 움푹 들어간 고독한 눈매, 정돈이 되어 있지 않은 가느다란 곱슬머리가 물결치듯 이마 위로 흘러내리면 좋겠다!’고 한때 이상형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보다 보니 그런 이미지는 왠지 프랑스 남자들과 겹쳐지기 시작했는데, 급기야 <언페이스풀>에서 다이안 레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 올리비에 마르띠네즈를 보는 순간 ‘이 사람이다!’라는 엄청난 필이 꽂혔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의 프랑스 남자에 대한 환상은 깊어졌다. 장난 반 농담 반으로 기회가 되면 프랑스 남자랑 사귀고 싶다는 내 말에 희한하게도 주변 사람들 모두 ‘프랑스 남자들은 쉽게 불붙었다가 금방 식어버린대!”라는 등의 속사포같은 우려를 쏟아냈다. 아, 정말 프랑스 남자들은 그런 것일까?

성급한 일반화야 말로 필자가 가장 혐오하는 일이지만, <프렌치 아메리칸>을 보고 나니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체념에 가까운 믿음이 생겨났다. 사랑의 속성이 ‘지속’과 ‘영원’이라고? 멀게는 <러브스토리>부터 가까이는 <국화꽃 향기>까지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 무수한 영화들이 주마등같이 머릿속을 스쳐가지만, 필자는 아무래도 사랑의 쓸쓸함을 믿는 쪽이다.

얼핏 보면 말랑말랑한 영화 <프렌치 아메리칸>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러한 우울한 사랑의 단면들을 가볍지 않게 응시하고 있다. 젊고 발랄한 미국 여성 이사벨(케이트 허드슨)은 둘째 아이를 임신한 언니 록시(나오미 왓츠)를 돌봐주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 도착해 보니 형부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도망치듯 집을 떠나가던 찰나였고, 나중엔 이혼과 함께 재산분할까지 강요한다. 이러한 내막에는 록시가 결혼할 때 미국에서 가져온 그림 한 점이 중세 시대의 유명 화가가 그린 진품이었기 때문. 록시가 이로 인해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 복잡하고 지루한 이혼 소송에 얽매이는 동안, 이사벨은 재력을 갖춘 외교관이자 형부의 삼촌인 에드가와 연애를 시작한다. 고가의 명품인 에르메스 켈리 핸드백을 선물로 덥썩 안기는가 하면, 전망 좋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맛좋은 프랑스 요리를 선사하는 달콤한 연인 에드가.

하지만 그림 소유권을 둘러싸고 록시의 프랑스 시댁과 미국의 친정 식구들 간에는 일대 마찰이 빚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이사벨과 에드가의 밀애 사실이 양가에 밝혀진다. 고민하는 이사벨에게 에드가는 작별을 의미하는 마지막 선물을 전한다. 다이안 존슨의 베스트 셀러를 원작으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전망좋은 방>)이 연출한 <프렌치 아메리칸>은 두 자매의 각기 다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프랑스와 미국의 서로 다른 문화적 특징과 기질을 위트있게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물론 미국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은근한 프랑스 꼬집기가 우세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신경쓰지 않아.”라는 대사라든가 겉으로는 우아하게 행동하면서 속으로 이득을 챙기는 프랑스 사람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군데군데 칼날같은 비판의 촉수로 작용한다.

“정말 사랑하게 되면 탈출구가 없어요.”
“정말 사랑하게 되면 탈출구가 없어요.”
그럼에도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모습을 취하던 이 영화는 클라이 막스를 거치면서 예상 외로 섬뜩한 반전(?)을 마련하고 있다. 과연 무엇일까? 힌트를 잠시 뒤로 하고, 필자가 실망하게 된 프랑스 남자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해 보자. 록시의 남편인 샤를르 앙리(그도 역시 필자가 좋아하는 우수어린 외모와 근접하다!). 그는 이사벨에게 록시를 떠나가는 이유에 대해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 그녀는 나의 삶에 생기를 주고 무한한 영감을 주거든.”이라고 말한다. 또 이혼에 쉽게 합의해 주지 않는 록시에게 “시를 쓰니까 자유로운 사랑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이 왜 그래?”라고 묻는다. ‘한 사람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 감정은 영원하지가 않아. 그렇다고 내가 한 사람을 사랑했던 일이 거짓이었거나 꿈이었거나 착각은 분명 아니었어.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어.’ 필자는 변하는 사랑에는 어디선가 읽었던 이러한 속성이 깃든 것이라 생각했는데, <프렌치 아메리칸>에서 그의 대사를 듣는 순간 그러한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이란 오히려 처음의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더 큰 해악일지 모른다. 상대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사랑이란 자기만의 환상과 욕망을 특정한 대상에게 쏟아부으면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 모든 사랑은 결국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욕망을 얼마나 고결하고 우아하고 신성한 것으로 치장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프랑스 남자들에게 있는 것만도 아니다. 좋게 말하면 그들만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버림받는 입장에선 분명 그들은 야속한 사람들이고, 그러한 애증을 견디지 못해 극단으로 치닫게 되기도 한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프렌치 아메리칸>이 마련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반전의 힌트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
ejin4rang
사랑과 욕망   
2008-10-16 09:33
callyoungsin
사랑에대한 환상과 욕망을 표현하며 점점 영화를 반전으로 이끄는...   
2008-05-22 14:4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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