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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쳐진 시간의 틈을 엿보다
디 아워스 | 2003년 2월 21일 금요일 | 박우진 이메일

평소와 똑같이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밥을 챙겨 먹고, 늘 보는 사람에게 통상적인 안부를 건네고 미뤄둔 일을 처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그렇게 적당히 분주하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 속에서 문득 ‘뭔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시간을 팽팽하게 당기던 긴장은 끊어지고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던 생활 리듬은 깨져 버리고 삶의 질서와 조화는 붕괴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의미를 잃고 의지의 중력은 상실된다. 단 한 순간이다. 존재를 맥빠지게 만드는 그 서늘한 느낌에 딱히 둘러댈 수 있는 핑계거리라도 있었으면 위안이 되련만 사실 거기에는 어떤 뚜렷한 이유도 없어 더 막막하다.

남들 보기에 멀쩡하고 탈없이 굴러가는 듯 싶은 그 어떤 삶에도 이런 순간의 틈이 존재한다. <디 아워스>의 초점은 바로 그 틈을 발견한 하루이다. 하루, 정확히 말하자면 세 개의 하루‘들’이 사소한(사소해 보이는 그러나 의미 심장한) 지점을 통해 겹쳐지고 맞물린다.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 1951년 미국 LA 《댈러웨이 부인》을 손에서 놓지 않는 가정 주부 로라, 2001년 미국 뉴욕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출판 편집자 클라리서. 시공간의 구조 속에 흩어져 있던 이 세 사람이 스크린 속에서 우연인 듯 절묘하게 엮인다.

일정한 삶의 궤도에 올라 선 나이의 그들은 특이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파티를 준비한다. 손수 고른 꽃이 화병에 꽂아지는 순간, 옆으로 돌아눕는 순간, 여성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댈러웨이 부인》을 쓰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려지는 순간, 화를 내거나 기껏 만든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거나 눈물을 흘리고 마는 순간, 세 명은 하나의 이미지로 투영된다. 미묘하게 닮아있는 점들이 차곡차곡 쌓여 감정의 덩어리로 응축된다. 감독은 그들의 삶을 교차시켜 연결하고 있는데 시공간을 겅중겅중 뛰어넘는 단절된 편집을 이용하기보다는 세 인물을 같은 톤으로 통일, 차례차례 ‘놓는’ 방식을 택해 물 흐르듯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간극을 해체시키며 통시적인, 나아가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인간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붙박이고 마는 역할들을 자각할 때 ‘댈러웨이 부인’들은 혼란에 빠진다. 고정된 존재가 오히려 혼란스럽다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고정’ 과정은 분명 ‘배제’를 거친다(인간이 상징계로 진입할 때 억압받은 것들이 무의식을 형성하듯). 그리고 배제된 것들은 수면 위로 떠오를 틈을 엿보며 의식의 언저리를 맴돈다. 즉, ‘고정된 역할’을 깨닫는다는 것은 ‘배제된 가능성’까지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지 않은, 논리적 이성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욕망의 형태로 부풀어올라 사람을 혼란과 우울로 몰아간다. ‘역할’은 기대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지니고 그것에 안주하지만 기대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 역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역할을 자각한다는 것은 그 모순과 대면한다는 뜻. 언니가 ‘동생’을 기대할 때, 남편이 ‘아내’를 기대할 때의 버지니아 울프, 역시 남편이 ‘아내’를 기대할 때, 아들이 ‘엄마’를 기대할 때의 로라, 리처드가 ‘댈러웨이 부인’을 기대할 때, 딸이 ‘엄마’를 기대할 때의 클라리서 모두가 그런 모순을 경험하고 분열된다.

인간을 가장 옥죄는 형태의 ‘기대’는 사랑과 결부된 형태의 것이다. 떠나려는 버지니아 울프의 발길을 되돌리는 건 남편의 사랑 고백이며 자살을 결심한 로라를 흔드는 것은 아이(혹은 생명)에 대한 사랑, 클라리서가 ‘댈러웨이 부인’이기를 자청하는 것 역시 리처드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 행복하리라’는 순진하고 단순한 발상과는 달리 영화에서 사랑의 결말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행할 때(불행하게도 이건 사랑의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지만) 그 사랑은 상대의 목을 조르는 폭력이 된다. 그리하여 리처드는 뛰어내리기 전 창턱에 앉아 자신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는 클라리서를 향해 ‘당신(you)의 삶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세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재연되기보다는 변주된다. 아무리 세 인물이 같은 행동을 했다 치더라도, 그 행동들에 대한 해석은 다 다르다. 그러나 한 인물의 한 행동의 의미는 다른 인물의 다른 행동에 닿는다. 버지니아 울프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옭아맨 삶의 모순에서 해방되었다면, 로라는 가족을 떠남으로써 클라리서는 리처드가 죽음으로써 해방되는 것처럼. 따라서 ‘댈러웨이 부인’들은 세부적인 엇갈림이 어우러져 궁극적으로는 일치하는 기묘한 화음을 이루고 있다. 이런 내러티브 구조는 절대적으로 결합하지 않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기초하여, 풍부한 독해의 가능성을 껴안는다.

원작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출발했다는 것과, 여성들을 조명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성의 지난한 삶을 드러낸다는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다. 진정한 페미니즘이 그렇듯, 사회 구조 속에서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비정상으로 치부되어 억압당한 모든 것에 자유를 주고자 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디 아워스>에서 다루는 동성애나 양성애 역시 이성애라는 주류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억압당하고 숨겼고 몰랐던 부분을 인정하고자 하는 맥락에서 함축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히로인 니콜 키드만,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소용돌이치는 자아를 줄 위를 걷듯 아슬아슬하게 발현한다. 그녀들의 회청색 표정이 심장을 길고 깊게 울린다.

1 )
ejin4rang
무서움   
2008-10-1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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