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삼스런 말이지만, 세상엔 볼 영화 천지다. 극장에는 매주 새로운 영화들이 걸리고, 최신 블록버스터부터 고전 영화까지 많은 양의 영상물이 하루가 멀다하고 출시된다. 밖에 나가기 귀찮으면 집에서 TV만 켜시라. 3월에 EBS는 <저개발의 기억>같은 쿠바 영화들을 틀어준단다. 시간과 돈이 문제일뿐, 우린 과잉이라 해도 좋을만큼 풍요로운 영화 환경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 어디 그런가? 이 풍족함 속에서도 때로 ‘허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상업성이 조금 떨어진다거나 미묘하게 시류성을 잃어, 개봉이나 출시가 안 된 영화들이 아쉬운 것이다. 그런 영화들이 출시사/배급사에게 좌절을 안겨주지 않을 만큼의 상품성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다행히도 그런 영화들을 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소비층이 확대/세분화되고 심의도 이전보다 느슨해지면서, 개봉까지는 무리더라도 출시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영화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영화들처럼 말이다.
이 영화들을 출시 혹은 개봉해달라! 출시사/배급사는 돈을 벌 것이고(?), 관객들은 즐거울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영화들!
1.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 (Napoleon Dynamite, 2004)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의 캐릭터들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소위 ‘차브’ 세대의 코미디들과 구별되는 차이점을 갖고 있다. 싸구려 취향과 놀고먹자식의 무뇌아적 유흥정신을 요란하고 지저분하게 떠벌리는 대신,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의 캐릭터들은 그저 조용하게 자신의 세계에 골몰해 있으며 그저 내키는대로 살아갈 뿐이다. 자신들이 남들과 다른 ‘별종’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자체를 결여한 채, ‘왜 다들 나만 못 살게 굴까?’ 정도가 불만일 뿐인, 완벽한 ‘꼴통’이자 ‘아웃사이더의 아웃사이더’인 것이다. 이 영화의 즐거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요령부득의 바보들이 사회적으로 기대되고 요구되는 지적 성취/취향의 세련됨/성실한 삶의 자세 등을 무참히 저버리며 ‘꼴리는대로’ 살아갈 뿐인데도, 결국 자신들의 욕구를 성취하고 ‘성공’을 이룬다. 바보들의 백일몽 같은 결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 황당한 결말은 자기 개선과 사회적 성취의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는 작년 미국 인디영화계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영화이기도 하다. 단돈 40만 달러로 제작되어 미국에서만 100배 이상의 수익금을 얻었다.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를 연기하며 인상적인 카리스마(?)를 선보인 존 헤더의 출연료는 고작 1,000달러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출시된 DVD도 상당한 판매고를 올렸다.
2.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 (Life Of Brian, 1979)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은 영국과 미국 출신의 6인조 코미디언 그룹 ‘몬티 파이튼’이 만든 5편의 극장용 영화 중 하나다. 예수와 같은 시대를 살다가 못박혀 죽은 ‘브라이언’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빛나는 대사들과 바보같은 말장난, 업치락뒤치락 슬랩스틱까지, 코미디가 보여 줄수 있는 모든 종류의 웃음을 선사한다. 또한 모든 종류의 권위를 부정하고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아나키즘적 전략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가령 서슬퍼런 빌라도는 r발음을 제대로 못해 수많은 군중앞에서 노골적인 조롱을 받고, 유태인 해방을 위해 봉기해야한다는 과격한 혁명주의자들은 행동 대신 토론만 할 뿐이다.
그런 조롱의 대상이 희화회되어 등장하는 ‘신’의 모습이나 맹목적이고 무지한 종교들인들에까지 이르면, 노골적인 신성모독은 아니지만 민감한 크리스천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 영화는 신성모독을 이유로 노르웨이와 아일랜드에서 80년대까지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풍자정신이 ‘몬티 파이튼’이 선사하는 웃음의 핵이자 미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 그들의 짖궂은 장난에 조금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몬티 파이튼’의 영화 중 <삶의 의미>만이 국내에 출시되었다.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쪽이 형식적인 내러티브나마 존재하고 웃기기도 더 웃기는데 왜 아직까지 출시가 되지 않았나 의아하다. 아마도 몇몇 씬에서 잠시 성기가 드러나기 때문인 듯한데, 그런 한심한 이유로 출시가 안 되는 거라면 이거야말로 ‘몬티 파이튼’의 영화 자체만큼 어이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3.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1998)
톰슨의 원작은 일명 ‘곤조 저널리즘’으로 알려진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사실의 전달’이라는 전통적인 저널리즘 방식을 탈피하여 소설적인 왜곡을 마다않으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모하하게 했다고 평가받는다. 원작에서 톰슨 자신의 반영인 Raoul Duke는 ‘아메리카 드림’의 실체를 추적하겠다며 라스 베가스로 향하지만 그 여정은 마약과 알콜의 나락 속으로 빠져버린다.
심각해보이는 플롯과는 달리 영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의 초반부는 오히려 유쾌한 분위기다. Raoul Duke(조니 뎁 분)과 그의 동료 Dr. Gonzo(베네치오 델 토로 분) 2시간여의 상영시간 동안 내내 마약과 술에 절어 온갖 추태를 부리는데,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심지어 ‘벽에 똥칠하기’라는 ‘궁극의 추태 신공’까지 선보이는 장면은 코미디의 감각으로 연출된다. 그러나 마약과 술에 대한 그들의 탐닉이 심해질수록 영화는 현기증이 날만큼 혼란스러워진다. 등장인물이 환각 상태에 빠져 있는 시간의 길이에 있어서나, 환각 상태의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몽환성의 강도에 있어서나,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는 최강의 ‘마약에 관한 영화’다. 흡사 공포영화를 연상케하는 후반부의 환각 장면은 ‘아메리카 드림’에 대한 신랄하고 난폭한 해석처럼 보인다.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에서 Raoul Duke을 연기한 조니 뎁은 언제나처럼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배역에 몰두하기 위해 원작자 톰슨의 옷을 빌려 입고 그와 자가용을 바꿨으며, 심지어 톰슨의 대머리를 연출하기 위해 톰슨에게 직접 면도를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카메오로 출연한 토비 맥과이어, 카메론 디아즈, 크리스티나 리치, Verne Troyer(오스틴 파워 시리즈의 미니 미)등을 구경하는 것도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의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4. 핑퐁 (ピンポン, 2002)
일본 상업영화는 물론 나름의 한계를 갖고 있다. 가령 감동을 강요하는 오버연기에 민망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없이 황당하고 신기한 얘깃거리만을 소재로 삼는 경향도 한심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하지만 <핑퐁>화처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얘기를 거창하면서도 오밀조밀하게 풀어내는 솜씨 역시 일본영화니까 가능한 것 같다. 고교 탁구부 선수들의 성장담을 마치 삼국통일에 버금가는 장대한 좌절과 성취의 드라마로 만드는 재주에는 실로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마츠모토 타이요우의 원작 만화의 완성도를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라이징과 인상적인 대사들은 역시 인기 각본가 쿠도 칸쿠로의 시나리오에 힘입은 바 크다.
두 주연 쿠보츠카 요우스케와 아라타의 매력 역시 거부하기 힘들다. <고>, <IWGP>등을 통해 이미 많은 확보하고 있는 쿠보츠카 요우스케는 귀여운 바가지 머리에 안하무인의 성격을 가진 페코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여성 관객이라면 배우 겸 모델인 아라타에 더 시선이 갈지도 모르겠다. 그가 우울한 표정에 저음이지만 섬세한 목소리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 여성관객이라면 황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핑크 플라밍고 (Pink Flamingos, 1972)
쉽게 구해볼 수 없는 영화들에 대해선 과장된 설명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핑크 플라밍고>에 대한 호들갑스런 설명들-역사상 가장 추잡한 영화라느니, "가장 상스럽고, 멍청하며 불쾌한 영화"라느니-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다. 고어씬에 한정해서 본다면 <핑크 플라밍고>의 카니발리즘은 애교스러운 수준이고, 성기노출만 한정해서 본다면 <핑크 플라밍고>보다 더 노골적인 포르노도 많으며, 그 악명높은 ‘개똥주워먹기’만 해도 색다른 자극(?)을 위한 일본제 ‘분변물’을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오늘날의 관객으로서는, <핑크 플라밍고>의 강도가 기대만큼 세지 않다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상 가능한 온갖 추잡하고 엽기적인 행위들을 빠짐없이 골고루 선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사회의 위선을 공격하는 가장 위악적인 방식의 모범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총합으로서의 엽기영화 혹은 역사적 가치로서의 엽기영화로서 <핑크 플라밍고>가 선취한 의의는 독보적이라 하겠다.
사실 <핑크 플라밍고>처럼 노골적으로 도덕률과 기성 권위를 비웃는 불쾌한 영화를, ‘히피’나 ‘펑크’ 문화의 시대적 산물이었던 30년 전 영화를 이제와서 출시나 개봉할 필요가 있을까, 동의하지 않는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오늘날 <핑크 플라밍고>를 챙겨본다는 것은 악취미의 발로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핑크 플라밍고>의 영화적 가치를 떠나, ‘<핑크 플라밍고>같은 영화까지’ 출시나 개봉은 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최근작 <피와 뼈>의 섹스씬에서 ‘성기에 검정칠하기’가 당연하다는 등장하는 것을 보고, 영상물 심의기구에서 전향적이니 어쩌니 떠들어대도 결국 바뀐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본 필자, 다시 한 번 통감했다.
엽기 영화로서 상징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핑크 플라밍고>가 출시나 개봉한다면, 그건 우리의 영상문화가 전근대적인 ‘심의’의 폐해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고, 우리의 문화가 가장 위악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도 수용할 수 있을만큼 성숙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